본문) 사 6:1~8, 요8:12-20, 계15:1-4
오늘은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다. 낙엽의 계절인 11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한 낮과 밤의 기온 편차가 매우 크게 나타나서, 건강관리에 매우 유의하여야 할 때이다. 정부는 고령자를 중심으로 독감과 코로나 예방 주사도 무료로 접종해 주고 있는데, 우리도 이 기회를 활용하여 건강 지키기에 힘을 보태면 매우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 나라엔 이렇게 국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모두 하나님의 큰 은혜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자인 우리가 자주 쓰는 이 말, 곧 ‘은혜(恩惠-gratia)를 입었다’라거나, ‘은혜받았다’라는 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는가? 잘 알고서 사용하는지가 궁금하다. 이는 저 소처럼, 되새김질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묻는 말이다. 그 내용을 알고 사용하면, 그때부터는 그 은혜가 나의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추동해 주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그에 부응한 삶이 빈곤하다. 참 허망한 일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만일 자식들 줄 중의 하나가 아버지의 돌봄을 ‘부모로서의 너무나 당연한 책무’라는 의식으로 받고 사는 것에 비하여, 또 다른 자식은 그 부모의 돌봄을 ‘자식을 향한 은혜와 사랑’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산다면, 그 차이에 따른 결과는 과연 어떨까? 별 차이가 없을까, 아니면 큰 차이가 날까? 그 깨우침의 차이는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앞 자식에서는 나올 것이 없을 것이나, 뒷 자식에서는 나올 것이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아주 오래전, 일본 유학 시 기숙사 생활에서의 경험담이다. 일본인 친구와 몇 개월 함께 기숙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학교에 인턴으로 와서 일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부친은 동경에서 의사였다. 생활도 넉넉한 것이 분명한데, 그가 보여준 학교생활은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한 모습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는 반드시 잘 되어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만 하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고 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은 나에겐 아주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부모의 돌봄을 은혜로 아는 자식의 모습도 새롭거니와, 그런 깨달음이 주는 힘이 어떤 것인지도 엿보게 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저력까지도 엿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의 자녀들은 진정 얼마나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부모의 돌봄을 은혜로 알고, 그러기에 반드시 보답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성장하는 자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하나님의 인간과 만물 돌봄과 사랑은 진짜 본능적(本能的)이다. 모든 만민에게 아무런 조건도 묻지 아니하시면서, 햇빛과 비를 주시고, 부모와 함께 대지란 터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을 향해 모든 돌봄과 사랑을 쏟아붓는 부모의 바로 그 모습을 창조주께서도 드러내 주신 것이다. 차별 없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분이다. 의(義)로우신 하나님의 참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조물주의 은혜와 혜택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전혀 똑같지 않다. 대체로 하나가 아니라 둘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받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나만 받는 것도 아닌데, 뭐 새삼스럽게 감사할 것 없잖느냐’라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받은 것을 은혜와 사랑으로 받는다. 그래서 감사하기도 하고, 보답하려고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분기점(分岐點)이 있음을 보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앞세워 다음 단계의 큰일이나 계획을 추진하려고 할 때이다. 그때는 그 둘 중에 누구를 앞세워 일하려고 하겠느냐는 점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모의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사는 자식일까, 아니면 은혜와 사랑으로 알고 그 부모를 위해 뭔가 보답하려고 마음을 품고 지내는 자식일까? 대답은 분명하리라. 은혜와 사랑에 반응할 줄 아는 자식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를 믿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구약 본문에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하나님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질문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라며 자신을 추천(推薦)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은 결국 그런 이사야를 그 시대를 대변할 당신의 선지자로 택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의 어떤 모습에서, 그의 자천을 용납하셨을까? 또 이사야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추천하면서 나아간 것일까?
바로,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던 자기를 살려주시는 은혜, 용서해 주신 은혜를 받고서,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뭔가 헌신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5-7절, 출33:20 참조). 그런 사죄와 속죄의 은혜에 대한 체험과 감사가 없었다면, 그런 자원하는 마음이 그에겐 자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런 의로우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마음을 절실히 품게 된 것이었다.
복음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만나고 따르면서 얻게 된 자를 생명의 빛을 얻는 자라고 한다(12절). 인간은 본질상 죄와 어둠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빛 되신 예수를 뵙고 그 은혜를 입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그 자신에게서도 그 빛을 발산하는 피사체(被寫體)로서의 삶이 시작됨을 그렇게 말씀하셨다. 곧 생명을 살리는 빛이 그에게 은혜로 주어졌을 때, 그 빛을 좇아 살면 그도 역시 빛을 발산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란 말이다.
서신서인 계시록은 그래서 해서 어둠과 죄악을 이기고 난 자들의 최후 삶의 모습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모습을 전한다. 그들은 그 나라에서 승리자인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영생의 기쁨을 향유하며 사는 모습을 전한 것이다.
1. 예언서 / 사6:1-8 /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소명(召命)을 받게 된 순간을 전한 곳이다. 그때 그는 유다 왕 웃시야가 사망하면서 국가적 위기가 급증하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다. 특히 북쪽의 앗수르 제국의 흥왕과 그 위협이 심각했고, 유다 내부의 여호와를 향한 불신앙에 따라 중심을 못 잡는 우왕좌왕하는 외교정책 때문에, 유다 왕국 전체의 운명이 크게 위태로워진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성전에 나아간 것이다(1절).
1) 그때 여호와는 당신을 찾아 성전에 나온 이사야를 만나 주신다(1-4절 참조). 그 바람에 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옷자락, 그를 모신 보좌들로서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과 그들의 만군의 여호와를 향한 찬양과 주변의 화답하는 소리들, 그로 인한 요동하는 문지방과 성전에 충만한 연기 등의 놀라운 하나님 세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2) 그 순간, 그는 여호와가 주실 화(禍)와 저주(咀呪)가 자기에게 미칠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들면서, 죽음의 위협에 빠지게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이것은 죄인인 자가 거룩하신 여호와를 보는 순간, 그는 곧 죽게 된다는 정보를 일찍이 모세로부터 직접 경고로 들었던 말씀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출33:20 참조).
3) 하지만 그런 이사야의 실존적 두려움을 씻어 주는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제공되었다. 그의 부정한 입술의 악을 사(赦)하여 줄 놀라운 신령한 행위가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었다(6-7절). 스랍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손에 가지고 그에게로 날아와 그것을 그의 입술에 대면서,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사하여졌다’라면서 그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결되었음이 통보되었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은혜에 당사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4) 그러자 이번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여호와께서 ‘보낼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러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사야는 지체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 그런데 여기서 의아(疑訝)한 부분이 있다. 여호와께서 어디를 보내겠다는 말씀도 없이 당신을 대신해서 갈 사람부터 찾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이사야는 주저 없이 ‘저요’라며 자천(自薦)하고 나선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받은 자의 특성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죽을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을 갖는 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자신이 그의 것임을 인식하면서, 그의 필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려 한다. 이것이 참 은혜받은 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하나님 역시 그렇게 응답할 줄 아는 자를 기꺼이 받아 마음껏 사용하시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도 자신을 생각해 보자. 나도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그의 찾으심에 응답한 자로 사는가 거부한 자로 사는가, 그러기에 내 안에도 그의 빛이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는가?
2. 복음서 / 요8:12-20 / ” 예수깨서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본문은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난 자, 곧 이사야처럼 그를 만나서 그를 따르게 된 자는 더 이상 옛사람의 모습인 어둠이 다니지 아니하고 새 사람의 모습인 생명(生命)의 빛을 좇으며 살게 된다는 것을 확인해 주시고 선포해 주신 성자 예수님의 말씀이다.
물론 이 대상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며 살기 시작한 당신의 제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 대상은 광범위하다. 곧 그들(사도)의 증언을 듣고 함께 세상의 빛 되신 예수의 뒤를 따르며 인생을 새롭게 살기 시작한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점은 새 삶을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도 확인하게 해 주시는 말씀도 된다. 그 중요한 내용은 이것이다 :
1) 이 사람들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자신이 그간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의 굴레를 거부하고, 그때부터 공적(公的)이며 세상과 이웃을 향한 책임적(責任的)인 삶을 사는 존재로 변화되어 살기 시작한 존재가 된 무리이다. 이것은 실로 아주 커다란 존재의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에, 그의 빛을 받은 그 자신도 이 때부터는 세상과 이웃을 품은 공인(公人)의 삶을 살게 됨을 말하여 준다.
2) 따라서 외부(세상)의 공격과 비판과 박해가 그런 변화 받은 자들에게 가해지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그가 여전히 사적인 영역에 속한 존재였다면, 그런 역반응은 아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세상과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는 순간부터, 그는 주변으로부터 찬반을 불러오는 존재가 되고, 뜻을 달리하는 반대 세력도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본문에서 예수의 선언(12절) 직후에 발생한, 기득권자인 바리새인들의 반발과 공격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변명은 그런 차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13-19절 참조). 주님은 당신과 함께 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시면서, 초지일관 세상의 빛으로 사신 것이다.
3. 서신서 / 계15:1-4 / ” 또 내가 보니 ---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군의 왕이시여 —참되시도다 “
본문은 그런 삼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신을 바쳐서 세상의 온갖 도전과 박해와 역공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믿음의 길을 걷다가 하늘에 오른 무리들이, 하늘 보좌 앞에서 승리와 영광의 노래인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흥겹게 부르고 있는 모습을 전한 내용이다. 이는 곧 누가 최후에 영광의 그 나라에 이를 것이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인지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명백히 밝혀주며 깨우쳐 주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유하심을 자신을 구원하신 은혜와 감격으로 받고, 그러기에 그가 주신 생명의 빛을 따라 자신의 옛사람을 청산하고 복음이 안겨주신 새 사람의 지침을 받들어서, 그 일에 죽도록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받게 되고 영원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기리 살게 될 것임을 일깨워 주신 말씀이다.
o 이 추수의 계절에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받는다. 내 생은 과연 창조주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어떻게 받았는지를 성찰해 보자. 그러면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온 삶이었는지 혹은 무심하게 외면한 채 내 욕망만 챙기며 살아왔는지도 살펴보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내 삶을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의 모습으로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길을 찾아보자. 부디 뜨거운 가슴에서 나온 응답이 우리에게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