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33:18~23, 눅10:21-24, 롬11:33-36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어떤 것인지를 한껏 보여주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모두가 이런 좋은 계절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마음껏 맛보고 즐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들이었으면 좋겠다. 반면에 이런 창조주의 좋은 세계를 무책임하게도 오염시키고 훼손하여, 자연이 순환의 질서를 잃고 인간에게 역습하는 일들이 빈번해진 일에 대하여서는 회개하며,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창조 질서 복원에 힘쓰겠노라는 참회 운동도 함께 일어나는 때도 되어야 하겠다.
무엇보다도 쓰레기를 아무 데나 무책임하게 버리는 일은 창조주 여호와를 무시하는 행태가 분명하다. 이제는 집안의 쓰레기 분리수거에 힘쓰는 일, 낚시꾼들이 해안가에 있다가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일, 시민들이 다니는 길거리에나 각종 휴양지에 등에는 절대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일들은 모두가 창조주를 향한 올바른 예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지금 이 창조주에 대한 예의가 무시되는 현상 때문에, 지구촌은 저 네팔 참사처럼 참담해지고 있다고 본다.
오늘은 마침 종교개혁 기념 주일이면서, 한 해의 수확에 대한 감사의 절기를 맞이하고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가 제 길을 잃고 잘못된 길에 빠져든 일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신앙 개혁운동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세상을 향한 공익과 공생을 위한 선한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집단의 탐욕과 성직자의 사욕을 채우려는 일에 빠져들면서, 자업자득으로 촉발(觸發)시킨 반성 운동이었다.
‘교회가 길을 잃었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세상을 구원하도록 부름과 소명 받은 집단 자체가 이미 소경이 된 상태가 아니겠는가! 교회가 그러면, 세상인들 얼마나 참담하고 위태로워졌을까! 지금의 한국교회 처지는 어떨까? 그 중세 시대의 교회와 무엇이 다를까? 개혁이 필요 없는 시대를 만들 책임이 교회에 주어졌는데, 지금의 우리 교회는 먼저 교회부터 개혁되어야 한다는 수준에 빠져 들었기에-, 심히 두렵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종교로서의 한국기독교의 신뢰도가 10%대에 머물렀겠는가? 카톨릭과 불교보다도 신뢰도가 현저히 낮아진 모습은 아무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을 잃게 되었다. 이제는 오직 여호와의 긍휼만을 바랄 시간뿐이다.
대책과 출구를 찾아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의인 칠천 명의 남은 자가 있음을 보여줄 최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출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교회의 갱신된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중세 교회가 역사적 심판을 받았던 주제인, 하나님 말씀의 사유화(私有化)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말씀을 오직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공익적 도구로만 사용하고, 말씀을 밥벌이의 도구로나 성직자의 존재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악용되지 않는 일체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말씀의 종으로만 살고 죽는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런 중에 이번 주간에 말씀목회연구원이 전국 대회를 개최하는 일이 매우 주목된다. 이 단체는 본 교단이 채택한 삼위일체력(三位一體曆)이 전국교회 주일 강단에서 제대로 증언하게 되도록 추동하는 집단이다. 성서가 제시한 교회력 중심의 목회가 실천되도록 힘쓰고,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증언서인 구약과 복음서와 서신서가 매 주일 설교에서 세 본문으로 규합되어 통일된 본문과 균형 잡힌 설교 내용으로 증언될 수 있도록, 지원하며 보급하는 일에 진력한다. 그래서 말씀에 따른 목회가 성립되도록 힘쓰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교단의 모든 교회들이 말씀 위에 선 건강한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하려고 힘쓴다.
이런 노력은 분명히 힘겹고 버거운 일이다. 그러기에 서로의 기도와 헌신과 협력이 모아질 때 꽃을 피우게 된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살아서, 모두를 건강하게 살리는 일만큼 보람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 일이 잘되면, 교회의 모든 부끄러운 모습들도 일거에 다 씻어낼 수 있게 되리라. 모든 목회자가 이 일에 한마음이 되어 이 거룩한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고, 성도들 역시 섬기는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도록 뜨겁게 기도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성부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며 그를 찬양하는 일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신론(神論)에 집중한 모양이다.
먼저 구약에서는 모세가 먼저 여호와께 그 영광(모습)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드린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당신과 인간 및 피조물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한 것의 한계에 대하여 밝히신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보는 일은 불가함을 명백히 하신다. 보면 살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대상이 있음이 드러난다. 서신서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놀라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울려 퍼진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한다. 이 부분이 잘못되면, 그의 인생이 망가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손해를 끼치는 불행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그만큼 나도 함께 커지고 존귀한 존재로도 성숙해진다. 부디 이 감사절기에 더욱 은혜의 하나님을 깊이 알면서, 그를 향한 우리의 감사도 더 키우자.
1. 구약 / 출33:18-23 /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내가 --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모세는 왜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어 했을까? (18절) 그것은 금송아지 제작과 경배하는 일로써 여호와께 극도의 분노를 유발하여 무려 3,000명이나 죽임을 당했던 일과 함께,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가나안에 가지 않겠다는 말씀까지 하시자(32:34, 33:3참조), 그 말에 절망한 모세가 여호와께 목숨을 걸고 매달리며(32:32) 백성을 대한 용서를 구하고 ‘여호와께서 친히 가시지 않으시려거든 자기들을 아예 이곳에 올려보내지 말라’면서(33:15), 여호와의 직접적인 동행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호소한다. 그 결과, 모세는 마침내 여호와로부터 뜻을 돌이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매우 값진 약속까지도 얻어냈다. (12-17 참조).
그러면 상황이 끝났는가? 아니다. 본문은 약속받은 직후에 보인 모세의 반응이었다. 모세는 여호와께 ‘주의 영광(永光)을 내게 보이소서’라며, 뜻밖의 요구를 하고 나온 것이다. 이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로 생각되는데(20절), 이는 하나님의 근본과 본질을 드러낸 모습을 말한 것이다. 소위 ‘얼굴과 얼굴을 대면 해 보게 해 달라’는 값비싼 청구를 한 것이다! 이런 신인(神人)의 얼굴 대면은, 본래 하늘의 것이지 이 세속에서의 것이 아니다(고전13:12 참조). 그런 놀라운 차원의 요구가 모세에게서 나온 것이다. 곧 피조물이 조물주의 본체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는 초유의 사건을 기대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모세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다. ‘내가 함께 가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나?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요구를 비(非)신앙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여호와는 여전히 불안한 모세가 자기들의 가나안 입주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말씀에 의한 약속보다도 더 큰 확증을 받아낼 일환으로, ‘주의 영광(얼굴/모습)을 내게 보이소서’라 했다고 보신 것이다. 그동안 모세는 숱하게 여호와를 대면해 왔다. 하지만 모든 대면은 말씀을 통한 것이었지, 영광을 대면해서 얻어낸 것은 없었다. 그러기에 모세는 지고(至高)의 경지의 문을 두드리면서, 은혜를 통한 이스라엘의 가나안 시대를 확실히 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호와는 친절하셨다. 모세의 마음을 헤아리신 여호와가 그가 요구가 안고 있는 위험성(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20절)은 분명히 깨우쳐 주시면서도, 그가 그토록 뵙기를 원한 여호와의 영광 보기는 비록 맛보기였지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취하신 신비한 방법을 통하여 존엄(尊嚴)인 얼굴 대신에, 그의 등(back)이라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셨기 때문이다(22-23절 참조).
여호와는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어떤 배려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인지를 스스로 밝히셨다(19절).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인 존귀와 영광과 화려함 등을 그들 앞에 지나가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여호와의 이름도 선포되게 하시며,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신다. 이와 함께 여호와는 모세에게 매우 주목할 만한 명령 하나를 내리셨다.-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21절). 이 반석은 무엇일까?
여호와 곁에 있고, 모세를 그 위에 세우며, 그 틈 사이에서 여호와의 등을 보게 한 반석이 과연 누구일까? 바로 성자 그리스도이시라고 본다. 이 반석의 모습을 우린 복음서에서 만난다.
2. 복음서 / 눅10:21-24 / ” 천지의 주재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 아는 자가 없나이다“
본문은 성자 예수님의 성부 되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하다(마11:25-27 참조). 그의 찬양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지만, 천지의 주재(主宰) 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 만민에게 보여주신 지혜와 슬기의 놀라움에 대한 찬양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1) 예수께서는 창조주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 일반의 자기를 드러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 보여주시는 행위에 대하여 우선하여 감사드림과 함께 격한 공감(共感)을 표시하셨다(21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 대상들인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예수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로서 백성들을 지도하며 추앙받으며 지내던, 서기관과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곧 율법주의자들이요 바리새인들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자신이 ‘의인(義人)’인 듯 간주하며, 사회적으로는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들과는 스스로 구별하며 지낸 자들이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음을 그렇게 지적하신 것이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는 자신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연령상의 어린이들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며 배척을 당하던 자들인 작은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로서, 종교적으로는 ‘죄인’들을 지칭을 받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제도권 종교인들에게 죄인이라 비난과 배척을 받았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긍휼과 자비를 받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살던 이들이었다(출33:19 참조).
2) 하늘 아버지를 아는 이들이 또 있었다(22-23절). 아버지의 아들 되신 예수와 예수의 소원대로 계시(啓示)를 받은 자들이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누군가? 바로 예수에 의하여 소명 받고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살기 시작한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를 아는 자의 반열에 들어선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그토록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였던 바를 얻어낸 참 축복받은 무리였다(24절).
-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앎의 대상이 된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양하고 사는가?
3. 서신서 / 롬11:33-36 / ”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로다 아멘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오묘(奧妙)함을 찬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모든 인간적인 이해력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어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믿는 자들은 그 구원과 은혜의 깊이와 부유함을 알 수 있고, 감사하고 경탄하면서 자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경이로운 구원의 배치(配置)를 확인할 곳을 우리는 이미 약속도 받았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곳에는 예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은 전혀 찾을 수 없고, 다만 어린아이같이 살았던 자들만이 성령의 영접을 받아 영생을 누리며 살 터이기 때문이다(눅10:21, 사65:17-25, 계21:1-7 참조)
o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며 감사주일이기도 하다. 다시 내 신앙의 구도를 생각하자. 나는 진정 하늘 아버지를 뵙기 원하며 지내는가? 나는 내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람 중에서 그의 자녀요 백성이며 택한 자로 인정된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사는가?
만일 이런 고백이 나의 심령에 매말라 있다면, 그러면서 온통 이 세상 필요한 것들에만 집중하며 살고 있다면, 나는 두려워해야 한다. 선후가 뒤바뀐 까닭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면, 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우선순위만 잘 지켜진다면 괜찮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분의 은총의 손길이 내 삶을 더욱 풍성케 하실 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