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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6-07-07 (화) 23:42 1시간전 3  

본문) 계 21:1-7, 사65:17-25, 눅13:22-30


오늘은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늦장마가 와서 전국이 장마 피해 대비하느라 긴장하고 있다. 무더위와 함께 극복해 내야 할 장마라서, 정신 차려서 이 고비를 잘 이겨내야 하겠다. 이런 중에 세계는 예상치 않았던 베네수엘라에서의 대지진과 유럽 대륙에 임한 40도 넘는 무더위,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들로 인한 파괴와 상처들로 인하여 여전히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발생한 배제고 야구부원들의 광주제일고 선수들을 향한 부적절한 야유(揶揄)들로 인하여, 국민이 큰 충격과 함께 우리 사회에 내재한 지역 차별과 극우세력들의 반역사 의식에 관련된 문제들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다. 그만큼 현재의 우리나라는 이념적 대립과 극우화의 갈등이 심각한 사회 현상임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서 뛰쳐나온 일이어서, 미래를 향한 우리의 아픔이 더욱 크다. 


그런 중에 정부와 재계는 AI 시대의 도래로 인한 반도체 산업 호황에 따른 생산라인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구축하여, 국가의 항구적인 미래 발전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그동안 AI 시대에 아주 필요한 자원인 땅과 물과 전기 등의 좋은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역개발에 낙후된 곳이었던 호남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지역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본격적인 기초 작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작업은 실로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국가 개혁의 시발임이 분명하다. 좋은 뜻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정치적으로나 지역적 이해관계 등으로 인하여 적잖은 반대와 시련도 있을 것인데, 부디 큰 성과를 내어서 우리나라가 초일류 국가로 우뚝 서게 되기를 기도하며 축복한다. 무엇보다도 천혜의 선물인 반도체로 인한 대규모 이익들이 국민간의 양극화나, 청년 등의 특정 세대가 소외되는 함정에도 결단코 빠져들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새 하늘(new heaven)과 새 땅(new earth)이 열릴 것을 예고하고(구약) 보여준 말씀(서신서)들로 가득하다. 이는 기존의 첫 번째 것(세력)들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면서, 얻게 된 결과물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혁이나 갱신 수준이 아니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완전히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것이 새 시대의 주역으로 도래할 것임을 말해 준 것이다. 


미래(未來)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과거에 붙들려 사는 자에게서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미래가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면, 오직 처음과 나중의 주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모두를 아실 뿐이다(계21:6). 그러기에 창조주가 열어주시려는 미래를 현재의 사람이 알 수 있으려면, 방법은 하나이다. 바로 그분의 신령하고 놀라우신 영이신 성령(聖靈)의 감동과 보여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예언자나 선지자들은 AI가 없었던 옛 시대에 그 초(超)기능적 인지(認知) 능력을 행사하신 분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의 그 신비한 인지 능력인 미래를 예측하는 초 인지력은 어디에서 누가 주었을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신령하신 성령이셨다. 성령을 받아 접하게 되면, 그는 성령이 제공하는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의 미래를 전했고, 그의 능력도 행사하면서 당시의 무지한 집단과 어둠의 시대를 이끌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백성을 이끄셨다. 


지금 우리 시대는 분명히 AI 인공지능 시대이다. 컴퓨터 반도체의 신비스러운 매체인 인공지능이 이제 어느덧 현대인의 두뇌(頭腦)와 가슴에 파고들어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게 해 주고, 그것도 순식간에 설명도 해 주며 방향도 제시한다. 사람이 그것에게 질문만 적절하게 하면, 그를 통하여 자기가 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해 준다. 비서도 그야말로 완벽한 비서이다. 그 바람에 현대인은 그 AI 의존도가 깊어졌다. 


그러기에 AI를 잘만 사용할 수 있다면, 누구나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 일정 수립이나, 가정 및 교회 목회 활동, 설교 작업, 심지어 국가 정책 수립이나, 나아가 나라 간의 전쟁과 상대방을 향한 폭격하는 일까지도 AI에 의한 것이 되었잖은가! 이런 점에서, AI는 개인이나 집단을 위한 무한대한 이기(利器)가 되었다. 그렇다면, 매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곧 ‘AI가 편의를 제공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보혜사(保惠師)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마디로 ‘될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은 인격(人格)이지만, AI는 비(非)인격인 기능(機能)체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물론 개인의 유익을 도모하게 해 주는 도우미이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나라를 우선하게 하여 주는 신령한 주체인 데 비하여, AI는 자기를 다루는 자의 도우미의 역할과 그 한계를 벗어나서, 자율적이고 공의(公義) 적인 의(義)를 끌어낼 주체적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AI를 통하여, 인간 사회와 관계를 평화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도모할 영역까지 기대할 수가 없다. 그 역할은 분명히 인격의 주체이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역만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AI 사용과 이용은 그런 차이와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능상의 도우미로는 괜찮지만, 인격상의 기대와 협력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움과 이끄심에 의존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오늘 받을 핵심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라는 말씀을 다시금 붙잡아야 할 이유이다. 이런 면에서 실패하면, 곧 편안하고 안이하게 믿고 지내려 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는 ‘구원을 받으려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게 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4-27 참조). 예수로부터,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절)며 내침을 당할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과 보혜사 성령의 위로와 보상을 제대로 받게 될 사람들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곧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누군지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전반에서 보여준 특성들을 다시 확인해 본다. 


보혜사의 위로를 받게 될 사람은 처음 하늘과 처음 세상에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에 거부하고 저항하며 그로 인해 박해도 받고 차별도 받아 억울한 눈물로 쏟으며 살고(계21:4), 그러면서 항상 하나님이 주실 새것, 곧 신령한 새것에 목말라하며 산 자들이다(계21:6). 그러기에 그의 주변엔 항상 죽음의 위협과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 떠나질 않는다(4절). 


그래도 그는 그 낡은 것의 압박에 포기하지 않고 견디며 힘써 싸운다. 오직 주님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실 것임을 확고히 믿기 때문이다. 비록 문은 좁지만, 그래도 그 문이 활짝 열릴 것을 소망하며 산다(7절, 눅13:24). 그의 아픈 가슴은 오직 기도와 간구와 부르짖음으로 가득하다(사65:19 참조). 눈물과 아픔과 탄식과 인내와 믿음과 소망만이 그의 양식일 뿐이다. 그는 그날과 그때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면서, 마치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대비하며 산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런 그를 보고 들어주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1. 서신서 / 계21:1-7 / ”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상속으로 받으리라“ 


주의 거룩하신 영은 그가 하늘 보좌에 초대받은 저자 요한에게, 하늘 영광의 최정점에 있는 최후의 세계랄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그곳에서 살게 될 무리가 거처할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의 현장까지 보여준다. 그곳은 이 죄악 세상의 모든 기존의 낡은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곳으로서, 그곳에 영접받은 이들에게는 가히 영생복락의 신 세계적 삶이 부여된 곳이다. 


1) 요한이 보게 된 세 하늘과 새 땅은 지상의 삶을 지배하고 누르고 있는 옛 세상, 곧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진 곳이었다. 마치 빛 앞에서 어둠처럼 사라졌다(1절). 세상에서 맹위를 떨쳤던 사망의 권세도 사라졌고, 혼돈의 세력인 바다도 사라졌다. 그러면서 그곳에 거주할 생명들의 새로운 거처가 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내려와서 새 판(마당)이 펼쳐지기도 했다(2절). 그 모습은 신랑을 맞이하려는 신부의 아름다운 단장과 같았다. 


2) 그곳은 하나님의 장막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친히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처소였다(3절). 마치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이 잠시 인간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 모습을 연상시킨 곳이었다(출40:34-35 참조). 그의 백성에게 이곳은 사망 권세가 극복되고 영원한 위로만이 공급된 곳이었다(사25:6-8 참조). 


3) 여기서 우리는 그곳에 거주할 하나님 백성의 특징들을 눈여겨보게 된다(4-7절 참조). 이곳에 들어 온 무리 중에는 처음 세상에서의 권세자, 부자, 용사, 힘 있는 자, 영웅호걸 등의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세력들에 짓밟히며 배척당하고 빼앗기며 멸시당하고 결국엔 억울한 눈물을 쏟으며 죽임까지 당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것도 흔들림 없이 그런 삶을 유지 보전한 이들이었다. 그러기에, 새 하늘 새 땅의 판도는 이 세상의 판도와는 완전 정반대였다. 


4) 그곳에 영접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될 사람들에게 상속으로 주어진 위로는 이렇다(4-6절). 곧 모든 억울하게 흘렸던 눈물이 씻김을 받는다. 죽음이 없어졌다. 애통함도 없다. 이별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 흔한 아픔도 괴로움도 사라졌다. 새로워진 만물들로 충만하다! 무엇보다도 그 세계는 처음과 마지막의 주되신 하나님이 그곳 모든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그 거주자들은 그 어떠한 것에서도 결핍과 핍절에 의한 목마른 일이 없다. 공급되는 생명수 샘물로 인하여, 매사가 충만하고 풍성할 뿐이다. 


2. 예언서 / 사65:17-25 / ”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


본문은 계시록에 확인된 바로 그 세계가, 수백 년 전인 선지자 이사야 시대에 이미 에언으로 예고된 바로 그 세상이었음을 밝혀준 곳이다. 요한과 이사야, 이 두 증언의 공통점은 처음과 마지막 내용에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어 보인다. 


곧 이사야가 전한 새 하늘과 땅의 모습은, 이 세상을 초월한 빛 가운데 나타난 계시록의 현장과는 달리, 세상 현장(現場)의 평안(平安)과 최상의 복지(福祉) 차원으로 그 내용이 나타날 것을 언급했다(18-24절). 그것은 이사야 예언은 부활 경험 이전의 지평에서 나온 것이어서, 부활 이후의 신령한 빛의 지평을 담아낼 수 없어서 그랬다고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인 25절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발하신 구원의 빛이 어떤 것인지도 밝혔다는 점에서 아주 소중하다. 


1) 본문의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선지자의 선포는 오랜 포로 생활 이후 귀환 길에 들어선 이스라엘에게 던진 비전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창조주의 손길에서 나온 수준의 완벽함을 담은 새출발이었다. 새 옷을 입은 <새 예루살렘>이 그 모델이었다(17-18절). 


2) 기쁨과 즐거움, 곧 안전과 평화가 가득한 성에서의 삶이 약속되었다. 곧 다시는 빼앗겨서 울고, 찢어져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하는 소리가 없다(18-19절). 백세가 약속된 무병장수의 시대가 열렸다(20절). 토지와 건축물을 침략자들에게 빼앗기는 일도 없다. 자신의 수고와 생산의 열매가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21-23절). 소위 여호와의 자손답게 품격과 품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23절). 위기를 막아 줄 SOS에 대한 구조의 손길도 즉각적이다(24절). 


3) 새로운 메시아 예수로 인한 구원의 시대도 맞본다. 곧 강자와 약자가 함께 어울리며, 먹으며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25절). 이는 강자가 가진 힘을 지배가 아닌 섬김과 돌봄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세계에서는 해함도 상함도 없다(사11:6-9 참조). 


3. 복음서 / 눅13:22-30 /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


마지막 과제는 ‘이런 새 하늘 새 땅에 영접받게 될 자가 누구냐’라는 점이다. 본문은 자기 구원의 확신에 애매모호한 마음을 가진 자의 질문이 ‘구원받을 자가 많을까요 적을까요’라는 수준이었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 주변에 많이 있는 들러리 신자들을 향한 경고와 함께, 진정으로 그곳에 들어갈 자의 자격부터 먼저 갖추라는 점에 초점을 두셨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요구였다(24절). ‘힘쓰라’는 ‘싸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깨어서 어둠의 세상을 향해 말씀을 행하는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10:29-37 참조).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그를 따라다니는 무리와,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식탁도 함께 하면서 지내는 자들도 많았으나, 그에 비하여 그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려는 의지의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그렇게 날카롭게 말씀하셨다(25-27절). 그뿐 아니라, 자기는 혈육상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이기에, 구원은 꼭 받는다는 혈통절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자들도 많았다(28절). 그 점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아니다’를 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 친분관계로나 동족과 혈족 차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사느냐의 여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분명 좁은 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구원의 절대조건이고, 거기에 순응한 세계인들이라면 누구나 그 나라 잔치에도 순서에 따라 참여할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29-30절). 


O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임박했다. 그러기에 먼저 나의 현재적 신앙의 모습을 재점검하자. 말씀의 실천형인 좁은 길인가, 관계 보전이나 유지 차원의 편의주의적 넓은 길인가? 주신 말씀에 목숨을 걸었는가, 참고 수준으로 세월을 보내려는가? 이제는 속히 결단해야 한다. 그날과 그 시는 속히 임한다. 성령의 권고를 무시하지 말고, 어서 깨어 그 나라를 구하려는 삶의 형태로 내 삶의 방향을 더욱 견고히 세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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