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28:11-31, 욘3:10-4:11, 막16:15-20
오늘은 강림 후 여섯째 주일이다. 때는 어느덧 한 해의 후반기에 접어든 7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무더위 역시 기승하고 있어서 항상 건강에 유의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세계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불안한 휴전이지만, 그래도 호르무즈 해협에 붙잡혀 있던 우리 상선들이 이제 세척에 이르렀다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어서 남은 상선들도 자유롭게 되길 빈다. 월드컵 축구가 32강 반열에서 탈락하여 자존심이 상하는 충격이 컸지만, 이것 역시 보다 나은 한국 축구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다행스러운 사태가 아닐까 싶다.
이런 중에도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저 중남미 국가인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대지진에 의한 피해 사건이다. 구조 장비가 없어서, 무너진 건물과 잔해를 치우지 못해서, 그 속에 깔린 수만 명의 이재민들이 죽거나 죽어가는 비극에 처한 현실 때문이다. 진정 남의 나라 일 같지 않다. 그런 천재지변은 언제 어느 곳에서 또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일이어서, 우리의 경각심을 한층 일깨워 준다. 우리 총회는 강도 만난 이웃인 그곳 난민들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는데, 부디 신실한 마음들이 모아졌으면 한다.
오늘 주일은 마침 우리 총회 모든 교회가 맥추(麥秋)감사주일로 지킨다. 이는 보리 추수에 대한 감사 개념보다는, 전반기의 삶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드리고, 후반기의 삶도 선히 인도해 주실 것을 기원하는 마음의 예물을 구별하여 바치며 지키는 감사절이다. 그러기에 평소 감사에 인색하게 반응해 온 이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더욱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베푸신 은혜를 찾아보며, 감사하는 기회를 가져봄이 좋겠다.
특히 오늘의 감사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선교에 헌신하는 분들을 향한 사랑과 감사도 담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는 그런 복음을 전한 이들의 수고와 헌신의 열매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예수 믿게 된 것도 모두 그런 전파자들의 충성된 헌신과 기도의 열매가 아니겠는가! 이런 제의를 하는 까닭은, 오늘 우리가 받게 된 강림 후 6번째의 세 본문 말씀의 메시지 때문이다. 확인해 본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이제 그들이 이 지상에서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매우 단호하게 선포하셨다.
” 너희는 온 천하(All the World)에 다니며 만민(All Creation)에게 복음(福音)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5-16절).
이 분부에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 주셨고, 그 보혜사의 지도와 능력을 힘입으면서, 그들은 유대의 장벽을 넘어서 온 세상 이방인과 그들의 세계, 그리고 모든 피조 세계를 향하여까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가 곧 구세주이시니, 그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교회 공동체들이 세워졌다.
오늘의 서신서인 사도행전의 내용은 그 선교 초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어떻게 당시의 땅끝이기도 한, 로마에까지 전파되었는지를 비교적 상세하게 전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왜 주의 복음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외국인)에게까지 허용되게 되었는지를 밝혀주기도 한다.
구약의 요나서는 유대인만이 아닌, 온 세상 만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가 예수 이전인 구약시대부터 있었음을 밝혀주면서, 그때 있었던 문제는 무엇이며, 그런 이방인 선교를 지시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슨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도 상세히 밝혀준다.
1. 서신서 / 행28:11-31 / ”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그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쟁론을 하며 물러가더라.) “
본문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의 내용으로서, 사도 바울이 당시의 땅끝으로 간주 되는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와서 주의 복음을 전하였던 모습을 담고 있다. 곧 땅끝 선교의 주역이 누구인지를 보여준 모습을 담고 있다(행1:8 참조).
그곳 로마 현장도 단순하지 않았다. 바울이 밤낮 쉬지 않고 모세와 율법을 근거로 삼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언을 들었던 상당수의 유대인은 기존의 모세 율법을 향한 강고한 집착과 율법주의적 구원관의 영향 등으로 말미암아, 바울의 이 예수 복음과 구원론을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왜 하나님께서 이 예수 복음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로 보내져야 하는지를 알게 한 연유이기도 했다(28절 참조). 이방인은 율법에 의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계명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 바울의 지중해 선교 여행은 알렉산드리아 호(號)를 타고 진행되었는데,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을 경유한 후에 비로소 로마에 이르렀다(11-14절). 도착할 때에는 바울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곳의 형제들(성도들)이 따뜻한 영접이 있었다. 그들은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에까지 나와서, 바울 일행을 영접했다. 바울에게는 처음 보는 교우들이었지만, 이미 그렇게까지 주의 복음이 확장된 모습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할 수밖에 없었다(15절).
2) 바울의 로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인 한 명이 지키는 셋집살이였는데, 무려 이 년간이나 계속되었다(16, 30절 참조). 그곳에서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31절). 로마에서의 바울의 삶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17-29절 참조) :
➀ 먼저 유대인 고위층 인사들을 청하여, 자신이 로마에까지 오게 된 사연에 대한 변명을 하였다(17-20절). 여기에서 그는 로마인은 자신의 무죄를 인정하여 석방하려 하였으나, 동족 유대인이 반대함으로써 결국 이렇게 황제에게 재판을 받고자 하여, 이곳 로마에까지 오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그 주요 원인은 자기가 품고 지내온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련된 것이었음도 밝히고자 했다(20절).
➁ 그들의 반응은 신중했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예수의 기독교에 대하여 유대로부터 편지나 개인적 접촉을 통한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없었음을 해명하면서(21절), 그러기에 이제라도 바울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자 하였다. 다만, 그가 믿고 전하는 예수의 교회가 당시 어디에서나 반대를 받는 줄은 잘 알고 있음도 밝혔다(23절). 이는 초기의 기독교가 자리를 잡는 데에서 얼마나 힘겨웠는지를 충분히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➂ 그 바람에 그들은 날자를 특정하고 그의 집에서 다시 모였는데, 그때의 바울은 전력을 다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講論)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근거로 삼아, 나사렛 예수가 왜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인지를 입증하고자 전력을 다했다(23절). 그 반응은 양분(兩分)으로 나타났다. 믿는 자도 있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24절).
➃ 믿음을 거부한 자들은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고되었던 바로 그 답답한 상태였다(사6:9-10 참조). 곧 듣기는 들어도 모두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당시 유대인들의 완고함과 고집스러움이 깊었던 상황임을 그렇게 본 것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나무의 베임 후에 그 뿌리 곁에서 자라 나올 미래의 그루터기요와 거룩한 씨앗인 ’남은 자‘였을 뿐이다(사6:13절 참조)
➄ 동시에 이러한 유대인의 절망적 모습은, 새로운 희망의 역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예수의 복음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닌 새로운 생명체들인 이방인(외국인)로 찾아 향할 수밖에 없음을 확증해 준 까닭이었다. 물은 결코 가두어 둘 수 없음과 같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언제나 찾아 들어가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명의 복음인 예수의 복음은 처음부터 특정 족속만을 겨냥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 자신을 낮춘 곳, 곧 복음을 갈망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쉼 없이 찾아간다(28절). 이것이 예수와 복음이 세계화에 성공한 이유이다.
2. 복음서 / 막16:15-20 /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본문은 마가가 전한 예수님의 최후 분부이다.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만드신 온 천하를 그들의 품에 안기시면서 주신 파송 명령이었다. 상대할 대상은 유대인을 포함한, 온 천하 만민들이다. 순종하면 큰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을 담고 있다. 전할 것은 복음인데, 이 복음은 예수가 온 만민의 구세주이심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이 분부를 받들었던 것이다.
결과는 양분되는 것으로 예측했다. 먼저 믿는 자가 나타날 것인데, 그들은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도 나타날 터인데, 그들은 정죄(定罪)를 받는다(15-16절). 이런 모습은 바울의 로마에서의 전도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행28:24 참조).
1) 다만 믿는 자들에게는 다양한 표적(表迹)이 나타나기도 한다(17절),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행8:7,16:18 참조). 새 방언도 말하게 된다(행2:4,10:46, 19:6 참조). 무서운 뱀을 집어 올리기도 하며(행28:3-6 참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났기도 한다(행4:30, 8;7, 약5:14-15 참조).
2) 이런 말씀 후에 주님은 하늘에 오르셨는데(승천), 제자들은 그 분부를 받들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자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셨고, 그들의 사역에 앞서 예고하셨던 다양한 표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그들의 선포 사역들은 더욱 힘을 받았다(19-20절).
3. 구약 / 욘3:10-4:11 /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본문은 하나님의 선교에 임하는 주의 종들, 곧 선교 사역자들이 선교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 하는 지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게 하는 모델 현장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옛날 요나 이야기의 한 장면만을 소개한 곳이 아니다. 겉보기에 선교는 당신의 세상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앞장서 행하시는 일에, 그의 사역자로서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선교에 임하는 주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그곳의 대상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시는 지를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요나의 꼴이 되기가 십상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o 본문에서 보면, 파송하시는 하나님과 파송 받는 요나의 마음이 전혀 달랐던 것이 확인된다.
1) 먼저 하나님은 니느웨가 악한 죄악의 도시로 멸망과 정죄를 면치 못한 상황임을 직시하시고 그에 대한 무거운 심판을 계획하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전에 아무런 경고나 통보도 없이 갑짝스런 징벌로 모든 현상을 끝내게 하시는 일은 절대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죄인들일지라도, 그들과 그곳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당신의 창조물이요 피조물로서, 당신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받아야 할 대상들이란 생각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와 통보하는 절차와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판단하셨다. 곧 엄중한 통보를 해서 그것으로 회개하면 기꺼이 용서하고, 거부하면 예고대로 심판하시고자 하셨다(3:10, 4:11 참조). 그래서 그것을 감당할 만한 인물로 선지자 요나가 선택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그 엄중한 경고를 통보하라는 임무를 연이어 맡기셨다(1:2, 3:1-2 참조).
2) 그러자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나?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은혜가 있음도 잘 알고는 있었다(4:2). 하나님이 니느웨에게 기회를 부여하시려는 마음도 헤아렸다. 하지만 요나는 근본적으로 저 적성 국가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힘입게 되는 일에 대하여서는 찬성도 못 했고 동의도 못 했다. 그들은 오직 죗값으로 멸망하는 것만이 당연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처음엔 다시스로 도망하려다가 실패했다(1장). 물고기 뱃속에서까지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음을 체험하자 회개했다(2장). 두 번째 명령이 떨어지자, 이번에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들의 완악함과 회개할 리가 없어서 결국 그로 인한 심판을 받을 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그곳을 찾아가서, 하룻동안 다니면 40일 후의 멸망이 임할 것만을 외쳤다(3:3-4 참조).
3) 요나의 억지 선교(?)의 결과는 어떠했나? 완전한 하나님의 승리와 철저한 요나의 패배였다. 그것은 요나의 기대와는 달리, 니느웨 전체의 회개 운동이 일어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계획했던 심판의 손길을 거두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3:5-10 참조). 그리고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누구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음을 입증하여 주었다. 반면에 요나는 마음으로 학수고대하던 심판은 없었고, 하나님 본연의 자비와 용서의 세상만 펼쳐진 모습을 보면서, 성질만 격하게 상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습니다‘라며(3,9절) 몽니를 부리기도 했다. 하나님이 박넝쿨 교훈을 주셨어도 그 성질은 여전했다.
o 오늘은 감사주일이다. 내 의지에 의한 감사 중심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시인하는데서 나온 감사인가? 승리는 하나님이 취하시면 족하다. 종은 자기의 것은 실패하고 주의 것만이 성취되면 된다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의 일관된 충성의 모습은 우리의 본보기이다. 요나도 결국 하나님께 승리의 영광을 드렸다. 다만 자기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한 자기 실패자일 뿐이다. 내 안의 요나의 거스름을 뽑아내자. 그게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