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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할까

관리자 2026-06-24 (수) 00:07 2시간전 5  

본문) 행17:16-34, 욥28:12-28, 요8:31-38 


오늘은 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요즈음은 미국-이스라엘 전쟁이 끝나갈 것 같아, 그래도 다행스러움을 느끼는 때이다.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엇을 얻을 것이 있다고 그토록 무모한 전쟁을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기 그지없다. 그 바람에, 미국이 가진 대제국의 위상은 이미 훌쩍 날아가 버렸고, 이스라엘 역시 깡패 국가란 이미지도 씻어낼 수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지(聖地)로서의 위상이 확고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동경심에 대한 손상을 한동안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듯하다. 특히 순수한 성서의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품고 살아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동안 씻을 수 없는 영적인 상처를 준 것 같아 가슴이 쓰리다. 마치 세상의 빛과 소금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겨주는 바람에, 세상 사람들의 교회 가기를 막아버린 것과 흡사한 느낌이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 하시겠는가?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슴앓이 역시 크시리라고 본다. 성령 하나님의 탄식 소리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장애물과 시련 앞에서도, 그저 분노와 원망만 토하고 끝낼 수는 없다. 그것은 다시 살려내야 할 백성들이 여전히 많고, 무너진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곳들 역시 그의 종된 우리가 감당해 내야만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런 파괴자들에 대한 심판은 하늘 아버지께 맡기고, 우리는 무너진 곳의 회복된 참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나서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다시 복음으로, 다시 사랑으로, 다시 하나님 선교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다시 참 진리의 힘을 가지고, 거짓과 위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진리의 새 도성을 재건해 내는 충성된 일꾼들로 재출발해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우리를 더욱 새롭게 일깨워 준다. 


특히 사도 바울이 당시 헬라의 철학과 학문과 예술과 문화와 종교의 최대요 최고의 도시인 아덴(아테네) 한복판에 들어가, 온갖 그들을 밑받침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우상들과 이원론의 기반 위에 선 숱한 거짓 신화들과의 대전(對戰)을 치르면서, 예수 구원의 복음 전선을 구축해 내려는 치열한 증언자의 모습을 보여준 일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큰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 아덴은 그야말로 거짓과 허위의 우상 세력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살던 위선의 도시였다. 겉치레는 세계 최고의 위용과 위상을 뽐내고 있는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지만, 내실에서는 진정한 주인이 없는 나그네들만 북적이는 빈집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기에 그곳 아덴은 진정한 참 주인을 고대하는 영혼들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주의 성령은 바울을 그곳으로 인도하면서, 당시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래서 예수의 종들은 그런 세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지를 직시하고 대응할 방안까지도 찾아내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들이 모르고 섬기는 거짓 주인을 대신할 참 주인이요 참 신을 소개하면서 그 신과의 관계를 맺으라고 힘을 다해 증언하였다. 이는 온 세상 만물과 인간은 공히 그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속에 있음을 소개하는 것과 함께(25-26절),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서 그의 자녀가 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도 전하며(29절), 그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확실히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신 부활의 주 예수까지도 소개하며(31절), 그를 믿고 그 앞에 나오도록 설득하였다. 


이런 바울의 증언 역시,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에 길든 그들에게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었으나, 바울은 물러서지 않고 그 부활하신 예수를 향한 믿음이 자기를 구원받게 할 유일한 대안임을 외쳤다. 그 결과는 초라할 정도였다(34절).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증언으로 남긴 그의 메시지는 다수의 위선적인 세상 종교에 빠진 이들과 거짓된 이단 종교에 붙잡힌 이들에게 우리 교회가 어떤 내용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기독교는 결코 맹신 종교가 아니라, 이성과 상식, 그리고 지혜와 명철의 풍부함을 보유한 지극히 상식적인 종교임을 알리는 메시지도 제공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본문인 욥기는 더욱 우리의 신앙과 영성의 내면적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12, 20절 참조). 동시에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의 말씀이 주는 선물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선사하는 내용을 통하여, 기독교가 실제로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안겨주는 유일한 진리(眞理)의 통로임도 입증해 주었다. 


우리는 지금 이런 말씀의 안내가 더욱 필요한 시대에 산다. 그 까닭은 지금의 한국교회가 진리 위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세속의 이념과 풍속, 특히 정치적 바람과 인간의 탐욕, 그리고 비진리성을 가진 교회주의 및 교파주의의 물결, 그리고 진정한 이웃 사랑과 용서가 없는 전통적인 인과응보론적 정죄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교회의 증언들이 참 생명력인 예수와 그의 진리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에서, 현저히 약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희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끼리 집단의 하나로 치부 당하고 있다. 이웃을 품을 사랑의 품이 너무 협소하면서,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 배타적인 성향의 집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세속화와 비이성적이며, 극우주의에도 편향되어서, 세상으로부터도 신뢰를 잃어버렸고, 심지어는 신뢰도에서는 다른 종교에도 밀리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심히 안타깝다. 어서 이 수치들을 씻어내야 하겠다. 


1. 서신서 / 행17:16-34 /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전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


국제도시 아덴을 찾아 그 속살을 들여다본 사도 바울은, 그 외형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감탄하지 못하고, 오히려 본질을 상실하고 우상(偶像)으로 가득 찬 비(非)본질로 가득한 도시가 되어 있는 모습에 격분(激忿)했다. 그곳은 분명히 매우 종교성이 대단한 곳이었다(22절). 특히 그곳에 율법 종교인인 동족 유대인도 있었지만, 주변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이 없었다(17절). 전혀 대안(代案)세력이 되질 못한 것이다. 그들 헬라인들도 자신의 종교심을 채우려는 욕구는 뜨겁고 그 방법도 다양했지만, 그 방식은 미신 위주의 종교여서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21-23절). 


결국 바울은 뜨거운 심정으로 유대인과 그곳의 철학자들과 현지인들 모두를 상대로 쉬지 않고 토론하며, 그가 품고 있는 대안인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영육 분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란 자체가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논리이였기에, 바울의 그런 주장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이방 신을 전하는 말장이’의 주장이라고 간주 될 정도였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본다. 


1) 그곳 아덴에는 유독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 말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을 비롯하여, 이렇게 새로운 정보나 주장에 유독 관심하는 외국인 무리도 있었다(18, 21절). 그리고 그런 이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무대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레오바고(Areopagus)였다(19, 22절). 바울은 그런 여건을 적극 활용하여 그 무대에 올라서, 그들의 신들 중에 하나인 ‘어떤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란 신명(神名)을 빌미 삼아서, 자기가 이제 그 신이 누군지를 모두에게 알게 해 주겠다는 논지로 입을 열어 증언하기 시작했다(23절). 


2) 바울이 소개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서, 천지의 주재(主宰-중심)시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고, 또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에게서 섬김을 받으려는 분도 아니다(24-25,상). 이런 바울의 신론은 그곳 우상 숭배자들에게는 완전 정 반대적 입장이 될 신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신은 자신의 손길로 결정해 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3)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값없이 선사하신 은혜와 자비의 주님이시다. 그가 만민에게 생명(生命)과 호흡(呼吸)과 만물(萬物)을 차별 없이 내려주시고 안겨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전 인간에게 기본소득(基本所得)으로 생존에 필요한 좋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안겨주시는 분이심을 역설하였다(25절). 동시에 인류를 한 혈통(血統)으로 지으시면서, 온 땅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하셨다(26절).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절대적 이유이기도 하다. 


4) 하지만 그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제한선(制限線)도 부여하셨다(26절). 바로 연령의 한계를 정해 주셨고, 거주의 경계도 한정하셨다. 한없이 살고, 아무 데서나 살다가는 인생이 아니라, 지정된 영역과 기한 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누리며 살다 가도록 틀을 잡아 주셨다. 이것은 자유를 억압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런 제한된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오히려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은혜의 조치였다. 


5) 그 점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게 하시려는 특별한 조치이다, 삶의 불편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서 발견하게 하시려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는 뜻 때문이다(27절). 만일 나이나 삶의 영역에나 아무런 제약이 없이 살게 된다면, 그는 과연 하나님을 찾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림없다. 오히려 그는 오만하고 무례한 존재로, 자기가 신인 듯 행세하며 큰 죄악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편을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더욱 기도하고 간구하여, 더듬어서라도 그를 찾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6) 우리 인간은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소생(자손)이 된다. 최고의 축복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영생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9절). 이런 좋은 구원의 방식은 오로지 그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를 믿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부분은 마침 그곳 헬라 철학자인 아라투스가 주장한 내용이기도 해서, 바울은 그 점을 활용하여, 더욱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길을 믿음으로 택하라고 권하였다. 


7) 바울은 최후로 그들의 결단을 촉구했다(30절). ‘그동안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지냈기에’ 하나님의 대사면(大赦免)의 용서도 받을 수 있었지만(행3:17 참조), 그러나 자기를 통하여 그들 모두가 예수와 그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자세히 듣게 된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거역이나 불신앙의 입장을 취하는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될 죄가 될 터이기에, 그러므로 더 이상 선포 받은 증언에 거역하지 말고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을 것을 매우 강하게 선포하였다(30-31절 참조).

 

8) 대다수는 영혼만의 구원이 아닌 육체의 부활에 의한 구원론 때문에, 조롱하거나 외면하였다. 그래도 몇 사람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와서 그곳 복음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32-34절)


2. 구약 / 욥28:12-28 / ”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


욥기는 기원전 3-4세기 바벨론 포로 후기에 기록된 지혜 문헌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산 인물이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게 숱한 시련과 고난을 온몸으로 당했다. 욥의 친구들은 그 시련이 욥의 범죄로 인해 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인과응보론으로, 욥의 회개를 촉구했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시련에 답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 속에 있음을 고백하면서, 결국 지혜와 명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주목하면서, 이 질문을 던진 것이다(12, 20절).


그가 얻은 답은 이렇다.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세상의 그 어떤 특별한 존재나 능력자도 모른다. 다만 하나님이 그 길과 있는 곳을 아실 뿐이다(23절). 그런데 그 여호와에게 있는 지혜와 명철을 접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몸과 마음이 주를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는 데에 있다(28절). 


3. 복음서 / 요8:31-38 /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


예수님의 말씀에는 욥이 물었던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은 어디에 머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아주 단호히 던진 선포의 말씀에 있다. 이는 우리가 예수의 말씀에 거하는 일이다(31절). 말씀을 꽉 불들고 그 말씀에 불들려 사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의 복을 받는다. 첫째는 주의 제자가 된다. 주님과 삶을 나누며 사는 자가 된다. 둘째는 진리를 알게 된다. 하늘 양식을 취하는 자가 되어, 중심을 잡고, 무엇에도 흔들림 없이 사는 인물이 됨을 말한다.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삶을 누리고,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32-33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곧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처소에서 영생하게 되는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나! 


O 우리는 창조주 하늘 아버지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기본소득인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공여받은 행복한 자들이다. 그러기에 누군가 좀 더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부러워하거나 내게 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속상해할 것도 없다. 남음과 차이는 그만큼 책임도 있고 수고할 일이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부족하고 아쉬움이 있음도 조물주의 배려와 그의 또 다른 채워주심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는 노력에 전념하자. 그렇게 찾아내는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안에 그 분 사랑의 분량이 많아진 것이기에, 그게 가장 축복되고 후회할 것 없는 기쁨과 감사 거리가 될 것이다. 오직 주의 말씀에 거하여 살자.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진리의 사람으로 살자. 그럴 때 나는 참 자유와 영원한 기쁨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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