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13~23, 호11:1-4, 8-9, 고전1:26-31
을사년(乙巳年-뱀) 한 해가 지난다. 대신 병오년(丙午年-말) 새해를 앞두고 있다.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하려는 주간이다. 그렇다면 잠시 마음을 추슬러 보자.
여러분은 올해를 어떻게 보내셨는가? 어떤 보람을 누리셨고 어떤 아쉬움을 남기셨는가? 혹 계획한 것들이나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면 그중에 얼마나 무엇을 이루었나, 그것이 안 되고 말았다면 그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나? 그리고 내 생애 전반적 흐름을 회고해 본다면, 나의 생은 과연 계획대로인가 아니면 주어지거나 밀려온 흐름에 따라온 것이었나?
그중에서 특별히 점검해 볼 부분도 있다. 나의 미래와 생애에 대한 계획들은 대체 어떻게 해서 얻어낸 것인가, 내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에서 얻어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서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그 열매나 결과는 어떤 것들이었고 어떤 차이가 있나? 문제는, 이런 내 삶의 흐름이 계속되다가 내 생이 이렇게 끝나도 괜찮은가 하는 부분이다.
최근 나는 원로 목사들 모임에 참석하면서, 선배 김상근 목사께서 유튜브 <조근조근 TV>를 설립하게 된 당신의 마음을 고백하시는 말씀을 기억한다. 그는 머잖아 하나님 앞에 설 일이 아주 두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요즈음 한국교회와 그들의 저급한 행태들을 보면서, 명색 교회 지도자로 평생을 살아온 자들이 대체 어떻게 지도해 왔기에 이렇게 엉망이 되었느냐고 책망을 들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대안을 찾다가, 뜻을 같이하는 동료 목사들이 마음과 뜻을 모아서,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유튜브를 창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묵상해 볼 이야기가 있다. 삶이란 것이 본래부터 내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생을 말할 때, B에서 시작하여 D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B는 탄생과 시작을 말하는 Birth이고, D는 죽음과 마지막을 말하는 Death이다. 그런데, B에서 D로 끝나는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은 그 둘 사이에 들어있는 C에 의하여, 판가름 난다. 이때의 C는 무엇일까? 바로 ‘선택(選擇)’을 말하는 Choice이다. 그렇다. 우리의 주어진 인생(人生)은 삶이 마감될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기회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B와 D는 확실히 내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곧 신(神)의 영역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이 세상(이 나라, 이 집안, 이곳, 이 시대)에 와서 살게 된 모든 것도, 내 선택이나 뜻에 의하지 않았다. 또한 머잖아 내 삶을 마감하는 그 최후도 그럴 것이다. 내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날 이곳으로 보내신 이가 결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전능자가 시키는 대로 쫓아만 사는 기계적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주어진 삶의 내용과 방향을 선택하고 결단하며 사는 일은, 전적으로 인간인 내 몫이다. 그 누구도 내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 절대 유의할 것이 있다. 그 선택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 문제는, 오로지 내 자신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책임을 묻겠다고 하신 것은, 그만큼 내 삶은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우리는 성탄절 첫 주일이며 한 해 마감인 송년(送年)주일을 맞이한다. 여러분은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이 무슨 말씀으로 보이는가? 전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린다’이다.
복음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성탄 하신 당신의 아들을 향하여 집중하신다. 아기 예수를 헤롯의 잔혹한 학살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보호의 손길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학살자 헤롯에게는 헛발질하게 하시고, 아들 예수에게는 애굽을 보호망으로 삼게 하시면서, 후에는 ‘나사렛 사람 예수’로 자리매김하게 하시고, 때가 되자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를 배신하고 우상 종교에 빠진 타락한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그들의 행보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기에 충분하지만, 정작 그 진노를 막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울 수 없는 영원한 긍휼과 자비였다. 마치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 사랑이 그들의 멸망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것이었다.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취약한 세상을 되살아나게 하심을 보여 준다. 곧 하나님께서는 세상 다수의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과 천한 자들을 당신의 자비의 품으로 끌어안으셔서, 소수의 기득권자들인 지혜로운 자와 강한 자들과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이는 세상의 힘의 균형 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약한 자들의 집결된 힘을 통하여, 소수의 귄력자나 영웅이나 특권 세력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다. 인간에게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
1. 복음서 / 마 2:13,20,22 / “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하나님의 아들 사랑은, 아기 예수로 세상에 가신 당신의 아들을 폭군인 헤롯왕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어, 무사히 예고된 땅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인생을 출발하게 하시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천사를 보내셔서, 의로운 종이었던 요셉(1:19)으로 하여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대피하게 하셨다. 세 번의 지시들이 있었는데, 처음은 애굽으로 피하도록 하셨고, 다음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게 하셨으며, 세 번째는 탄생지였던 베들레헴이 아닌 북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아주 한적한 동네로 들어가 살게 하신 일이었다. 그곳에서 그 메시아 가족은 마치 유배 생활을 하듯 살아가시게 된다.
1) 동방 박사들이 헤롯을 피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후,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하자, 아기와 어머니는 급히 애굽으로 피신한다(13절). 뜻밖에 아기 예수 가족들은 애굽 피난살이를 하신다. 그래서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머무셨다. 사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묘한 이웃이다. 여러 가지 곤경과 위험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큰 피난처가 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조상 아브라함이 초기에 기근으로 인한 애굽 생활을 통하여 곤경과 함께 재물도 얻어서 가나안 생활을 하게 된 일도 있고(창12:10-20참조), 야곱과 요셉 가족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번영과 곤경을 함께 안겨 준 곳이기도 했다(창42:1-3,46:28, 왕상11:40, 왕하25:26, 렘26:21 참조). 그러다가 이번에는 하나님 아드님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호11:1).
아기 예수의 이 애굽 피난 사건은 후에 이집트에 예수 피난 교회를 거점으로 탄생한 곱틱 교회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 교단은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회 공동체이다. 숱한 박해 속에서도 지난 2,000년간을 묵묵히 믿음을 지켜온 신앙공동체로서, 이집트 국민의 약 10-15%에 이르기도 한다. 그들의 신앙은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기도 한다.
2) 그 부작용으로,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미만의 아기들이 헤롯에 의하여 대학살을 당했다(16-19절). 예수 탄생 이후, 예수 때문에 발생한 첫 번째 아기 순교자들이었다. 이 점은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 이미 예고된 바였다. ‘라마에서 자식 잃은 어미들의 통곡과 애곡에 어떤 위로 받기도 거절되었다’(렘31:15)
또한 이 일은 모세에게 닥친 일과도 다르지 않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도 그의 목숨을 노려서, 애굽에서 어린이 살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출1:15-22 참조). 아기 메시야 탄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곤경과 죽음을 몰아온 일은, 모세 때나 예수 때나 모두, 메시아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악의 세력들의 반격들도 그만큼 강력했었음을 말해 준다.
3) 그런 폭군 헤롯이 죽자, 아기 메시야 가족은 이스라엘로 귀환한다. 하지만 유대에는 헤롯의 아들인 아켈레오가 그의 후계자로 임금이 되자. 두려움을 느낀 가족들이 결국은 북부 지역인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마을로 들어가 사시게 된다(19-23절). 이는 메시야가 당신의 땅에 오셔서도 언제나 주인이 아닌 나그네로 사셨고, 유배 생활하듯 지내셨음을 말한다. 이 거주지 때문에 예수님께 붙여진 ‘나사렛 사람’란 이름 속에는 그가 메시야라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2. 구약 / 호11:1-4, 8-9 / “ 내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다. 그들이 어린 시절인 애굽 시절의 하나님은,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다(출4:22-23, 신32:6 참조). 그때에는 걸음마도 가르치시고 그들을 팔로 안으셨다(3절). 또한 농사꾼이 자기 소를 정성스럽게 돌보듯, 자기 백성을 매우 조심스럽고 넘치는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다(4절).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걸음마나 팔에 안으신 이가 여호와가 아니라 이방의 바알로 알고, 그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다(2절). 은혜를 배신으로 응답한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그런 반항하는 자식은 돌로 쳐 죽여야 마땅했다(신21:18-21). 소돔과 고모라 때에 함께 당했던 아드마와 스보임과 같은 운명을 당해야만 마땅했다(신29:21-22 참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못하셨다. 일반 사람이라면 그처럼 깊은 상처와 배신을 당하였다면, 진노와 저주를 퍼부을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 진노를 억누르셨다(8-9절).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9절)라는 표현은 창18:24-32에 비추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심판은 저주만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을 통하여 자신들의 무서운 죄에 대한 깨달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영속적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렘30:11-17, 46:28 참조). 그렇다. 심판에는 정화(淨化)라는 놀라운 기능이 담겨 있다(14:5). 특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전에 맺었던 관계의 기반을 새롭게 하시려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음도 알아야 한다(2:14-23 참조).
명의(名醫)들은 환자의 환부(患部) 상태를 보면서 어떤 게 그 환자에게 좋을지를 판단한다. 그때는 환자가 원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자의 생명에 도움이 될 방법을 택하여 주저 없이 집도(執刀)한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審判)도 그런 차원이었다. 관계 회복을 위하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수술이라는 심판을 확실히 택하신 후, 밝은 눈으로 그를 다시 보게 하셨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은 바로 하나님의 집도 수술을 받아야 하는 그런 순간에 있었다.
3. 서신서 / 고전 1:26-31 /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당신 교회의 가족으로 부르셨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접근을 배제하셨는가? 그 점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특성을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소수(小數)의 지혜로운 자와 능한 자와 문벌 좋은 자들 보다는, 다수(多數)의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인간의 기만적 자기 신뢰의 토대를 배격하신다(26-29절).
하나님의 다수에 대한 그런 선호(選好)는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약자(弱者)에 대한 배려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라. 세상은 절대 다수가 약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체 능력과 역량이 부족하고 약해서, 자기 몫을 제대로 챙겨 살지 못한 체, 소수의 강자에게 그나마도 가진 몫을 빼앗겨서(?) 살아간다. 그런 점에 눈뜬 이들이 연대하여 노조 활동과 같은 단체를 통하여, 임금 및 권리 투쟁을 하고 있다.
그렇다. 세상에는 탁월하고 우월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압도적인 기능과 힘을 가지고, 다수의 미급한 무리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한다. 그 바람에 세상은 언제나 균형과 형평성을 잃고 강자 중심 세상으로 기울어 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군림하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지낸다. 영웅 중심, 강자 중심의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는 교회의 관심은 이런 흐름과 구도에 동의하지 못한다.
비록 힘이 약하고 부족하고 미급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공동체로 힘을 결집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웅이나 강자 중심의 소수가 이룬 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선한 힘을 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집단적 지성이 개인의 탁월성보다 우위의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 정신이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런 삶의 무대가 바로 교회 현장인 것도 사실이다. 작은 힘들의 결집에 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우수성과 탁월함을 무시하거나 배격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것이 집단적인 것 위에 군림하면, 거기에는 독점, 배제, 교만, 패거리, 인물 추종 등등의 낡은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그 큰 집단을 위험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과 힘은 공동체와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적극 헌신하고 이바지할 때만, 복되고 자랑스럽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예수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음을 본받아(30-31절), 우리 모두도 육체의 자랑을 하지 말고 교회 공동체와 이웃과 국가 사회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주역들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며 살아야겠다.
o 다행히 올해 우리는 패망한 지난 정권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소수의 권력층이 내란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장악함으로써, 다수의 국민 위에 군림하려던 일들이 실패했음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연약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이제 새해를 어떻게 맞이할 건가? 다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무장하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길 만이 우리가 살길 임을 알고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