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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5-06-10 (화) 23:43 2일전 26  

본문) 갈 5:16~26, 신30:15-20, 막4:1-20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다. 지구촌에 내려오신 성령의 역사가 이때부터 어떻게 역사하시면서,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기 시작하셨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시절에 접어들었다. 우선은 인간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시작하였지만, 그 행보는 가정과 집단을 포함하고 있고, 나중에는 모든 인간공동체와 삶의 모든 현장과 온 나라들과 만물과 온 우주까지도 포함한 인간 삶과 생명의 전 영역까지도 품으셨다. 이는 이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리고자 하신 일이었고, 그에 대한 믿음 없이는 구원도 없음도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지난 주간에도 소개하였지만, 만민에게 임하신 성령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온 세상 만민의 구세주이심을 공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를 소개하고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며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되고(욜2:32, 요1:12), 삶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그것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변화를 받게 되었다.     


동시에 주의 성령은 개인 변화의 차원을 넘어, 변화된 인간들의 모임체인 교회(에클레시아)의 출현도 일구셨다.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써 받아들인 자들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세계 처처에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오대양 육대주 곳곳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서로가 하나님의 가족(家族)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섬김의 일들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그래서 온 세계를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가득한 곳으로 세워갔다. 이렇게 등장한 새 인류(人類)가 바로 성령의 사람이요 영적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오직 육체의 욕심을 쫓아 살아온 기존의 인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기존의 인류는 죄와 탐욕 아래 사는 육체를 쫓아 사는 자들로서, 저들은 자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 존재를 거부하고 미워하며, 핍박과 탄압은 물론 그 존재를 제거하려는 일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바로 창세기에서부터 나온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이다. 


자기중심의 인물, 가인이 하나님 중심의 인물인 아벨을 용납하지 못하고 제거(除去)한 것이다. 얼마 전 윤석열 정부가 시도하려다가 실패했던, 그 정적 ‘수거(收去)’를 해버린 것이다. ‘저 인물만 없으면 내가 편하고 잘될 것이다’는 오판(誤判)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가 친(親)형제인데도 그렇게 했다. 이, 얼마나 무섭고도 잔인한 행태인가!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다! 아무리 친형제라도 영이 다르면, 육체는 그 종노릇하게 된다. 마치, 에서와 야곱이 맞서는 꼴처럼 말이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결국 그 첨예(尖銳)한 갈등의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결의 자리요, 선택의 자리요, 맞섬의 자리인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의 자리 중에 하나인 영적 인간의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대단한 결단(決斷)의 자리이기도 하다. 세상 대신에 하나님을 택하고, 죄 대신에 선을 택하고, 죽음 대신에 생명을 택하고, 자기 대신에 우리를 택한 것이며, 저주 대신에 복을 택한 것이다. 이때의 문제는 그런 선택한 나에게, 상대인 세상과 악의 세력은 공격과 미움으로 나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게 내가 깨어 있어야 할 결정적 이유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떠나실 때, 당신의 남은 제자들이 당할 시련과 고난을 예상하면서 하늘 아버지께 뜨거운 기도를 올리셨었다. 바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자기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인하여 미움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여 숱한 시련과 각종 불이익이라는 고난을 당하게 될 제자들을 생각하며, 하늘 아버지께서 제자들이 잘 견디어 내면서 승리하도록, 그들을 온전히 보전해 주시도록 간구하신 바가 있었다(요17:11-16 참조).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우리가 성령 받아서 그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어떤 존재로의 변화와 시작인지를 본격적으로 알게 해주신 말씀들이다. 그것은 존재의 변화요, 실존의 변화이며, 삶 전체의 변화요, 결국은 영생과 구원을 위하여 생명과 복을 견인하는 복의 일이다. 그러면서 그 길에 확실히 들어서기 위하여서 우리가 깊이 유의할 대목이 무엇인지도 안내해 주신다. 


1. 서신서 / 갈 5:16-26 /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본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세운 성령공동체이다. 그래서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의 말씀과 뜻을 받아 그의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도록 이끌어가신다. 교회의 주요 핵심 일꾼들은 당연히 성령을 받아 그의 이끄심에 따라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돌본다. 그때의 결정적인 도구는 모세가 전한 율법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전해 준 복음이다. 그래서 유대교를 전하고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세우려 한다.


그런데 이런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있었다. 바로 예수 복음만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구원의 조건임을 교묘하게 전하면서, 그것을 이루려면 모든 교인은 반드시 할례(割禮)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이방인에게까지도 육체의 멍에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의 핵심을 오도하고 흐리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행태였다(갈2:16-17, 3:11 참조). 진정 육체를 내세우는 것이 진리라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 아닌가(2:21)! 


1) 이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을 확연히 구별하며 설명한다. 이 둘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거스른다. 그러면서 서로를 대적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16-17절). 그러면 육체를 쫓게 되면 어떤 모습을 나타내는가? 그 내용은 너무도 분명하다. 음행-더러움-호색(방탕)-우상 숭배-주술(마술)-원수맺음-분쟁(다툼)-시기-분노-당 짓는 것(이기심)-분열함-이단(분파)-투기(질투)-술취함-흥청거림 등등이다.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의 모습들이다. 


2) 성령을 좇으면 그 열매는 무엇인가? 21-22절이 그 답이다. 곧 사랑-희락(기쁨)-화평(평화)-오래 참음-자비(친절)-양선(선함)-충성(신실)-온유-절제(節制)인데,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세상엔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일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온다(25절). 


3)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임을 명심하고(24절), 어떤 경우에도 헛된 영광을 구하여서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아야 한다(26절).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거스리고 육체를 쫓으려 하는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2. 구약 / 신30:15-20 / “ 보라 내가 오늘 생명(生命)과 복(福)과 사망(死亡)과 화(禍)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분명히 결단해야만 했다.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두 갈래의 길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취하여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하나는 생명(生命)과 복(福)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死亡)과 화(禍)(주저)의 길이다. 곧 하나는 사는 길이지만 다른 하나는 죽는 길이다. 이 확연히 다른 차원의 길이 자신들 앞에 놓여 있으니,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을 살리기 위하여서라도, 절대적으로 ‘생명(生命)을 택하라’ 하셨다. 이게 바로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복음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흔들리는 인간들을 믿지 못하신다. 그렇기에 보다 친절히 어리석은 선택이 될, 사망과 저주의 길이 아닌 생명과 복의 길이 어떤 자들에게 열리는 것인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을 일깨우신다(16절). 그 길은 어떤 자들이 들어가게 되는가? 


먼저는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모든 길로 행(行)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삶이다(16절). 좀 더 세심하게 부연(敷衍)하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가 명하신 말씀을 깊이 청종(聽從)하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삶이다(20절). 그렇다면 그런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어떤 것인가? 본문에서는 그 복이 일단은 땅에서 받게 될 복들에 집중해서 약속하신다. 


우선은 생존하는 삶에서 번성(繁盛)할 것을 약속하신다(16절). 궁핍과 빈곤으로 시달리지 아니하고 범사가 잘되는 복을 향유하게 되리라는 복이다(요삼1:2). 그것도 들어가서 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복된 생활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생명(生命)도 보전되고, 특히 장수(長壽)의 은혜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20절). 결국 인간이 창조주와 조물주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받들면, 그의 생의 필요한 것 모두는 여호와께서 철저히 보장해 주신다는 공식을 재(再)천명(闡明)하신 것이다. 곧 ‘순천(順天)자는 흥한다’


사정이 이런 데에도, 역천(逆天) 하는 자들이 있다. 곧 사망과 저주의 길을 택하고 마는 자들이다. 사실 그 무서운 결과를 알면, 누군들 이 길을 택할 것인가? 다만 주의하지 않으면, 오만하거나 건방진 입장을 취하면, 누군들 떨어져 버릴 그런 자리이다. 그 모습이 어떤 것인가? 

놀랍게도 말씀과 명령에 청종하지 못할 때가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된다. ‘내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17절,상). 말씀을 가볍게 상대하는 자가 넘어질 수 있는 자들이란 말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취급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은 항해 중인 나침판의 지시를 무시한 항해사의 모습과 같다. 비행기의 항로 길잡이 하는 레이더 기지의 송수신을 무시하는 비행사와 같다. 자동차 운전에서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운전자와 같다. 그 결과는 어떨까? 사고를 피할 수 없다. 비극을 면치 못한다. 그것도 본인은 물론, 함께 탄 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치명상을 준다.


오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 발생할 무서운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전한다. 곧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게 된다‘(17절). 그래서, ’반드시 망(亡)한다‘ 약속의 땅에서도 결코 장수하지 못한다(18절). 그 책임은 오로지 자신이다. 이는 아무리 좋은 땅과 환경을 부여해 주셔도, 이토록 허술하게 주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부주의하게 살게 되면, 그 결과는 헛수고요 패망이며 저주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전하신 것이다. 


실제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광야 문화에 젖어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정말 천금과 같은 풍요와 보배로운 땅이었다. 자신들이 전혀 수고를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갖추어졌고 채워졌으며 공급되어 주어진 은혜의 땅이었다. 역천(逆天)자의 길만 밟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마6:33참조)의 풍성한 사랑을 받아 누리며 사는 무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 모두가 그렇게 살았는가-? 문제는 듣는 귀요, 마음이다!


3. 복음서 / 막4:1-20 / “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씨 뿌림의 비유(比喩)를 통하여, 뜻밖에도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 자들이 많지 아니함을 안타까이 지적하신다. 그 비유의 틀에 나타난 구성 분포로 보면, 대략 1/4 정도만이 정상이었다(8절). 나머지 다수인 3/4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이었다(12절). 대다수가 듣고 깨닫는 데 장애가 있었다. 그럼에도 바로 그 소수의 듣는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과 역사가 온 세상 만민에게 펼쳐질 것도 선포하신다. 


씨는 말씀을 가리킨다. 모두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이다. 씨는 육체를 살리고,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말씀을 듣는 이들은 농부가 씨 뿌림과 돌봄에 전력을 다하듯, 말씀을 듣고 청종하며 그 말씀을 좇아 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말씀 듣기와 살기에 부실하면, 영혼 농사도 부실해져서 결국 그 인생을 망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길 잃게 되어 우상에 매달리게 된다. 


정신 차리자. 실패한 세 종류 모두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까지 왔던 자들이었다. 말씀을 듣자마자 곧바로, 사탄에게 그 마음에 떨어진 말씀을 빼앗긴 ’길 가‘의 마음은 최악이다(15절). 말씀에 즐거움의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 뿌리가 얕아서 금방 환란이나 박해 앞에 넘어지고 마는 ’돌밭‘의 마음도 안된다(16-17절). 또한 말씀은 들으면서도, 세상이 주는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탐심을 뿌리치지 못해서 그 마음이 ’가시떨기‘로 덮여있는 처지라면, 결국은 믿음의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되기에 그것 또한 비극이다(19절). 


o 길은 오직 하나이다! 우리의 심령이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옥토(沃土)‘를 이루는 일이다! 진정한 순수한 마음 밭을 이룬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는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잘 받아들여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마음과 삶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일이다. 우리가 어서 성령의 사람으로서, 그런 옥토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역사의 소중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복은 물론, 주변에 삶이 무너진 모든 이들에게까지도 도움과 유익을 공급해 줄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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