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5:1~12, 신11:26-32, 고전13:1-13
오늘은 교회력에 따른 주현절(主顯節) 시작 주일이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기의 시작 부분인데, 여기에서는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사셨고, 제자들을 택하셨으며, 어떤 말씀으로 당신의 양무리들을 먹여 살리셨는지를 폭넓게 배우고 익히며 훈련하게 되는 절기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인간 됨을 가장 진하게 맛보고 배울 수 있는 시기이다. 이때 교회는 제자 훈련 및 말씀 교육에 더욱 힘쓰게 된다.
올해는 이 절기가 3월 초까지 계속됨으로써, 무려 여덟 주간이나 계속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매우 폭넓게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오늘 절기 첫 주일에 주시는 말씀은 어떤 것인가? 바로 복(福)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복 받으라고 덕담을 하듯이, 오늘의 세 본문 말씀도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님이 주실 복을 받으라’고 문을 열어주신다. 그러면서 그 복이 어떤 복인지를 전하고자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설교로 선포하신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을 앞세우신다.
이런 흐름을 보면, 우리 예수님도 인간들은 복 문제 해결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심이 분명하다. 곧 복부터 받고 인생을 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져 주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인식은 하늘 아버지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곧 성부께서 그의 백성을 형성하시고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이어가게 하실 때에도, 그 첫 출발이 바로 복이었기 때문이다(창12:1-3 참조). 곧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복의 앞잡이로 세우시고, 그 후손들은 그 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 복을 전하고 나누면서 사는 선한 무리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먼저 복을 받아야 하고, 받은 복을 나누어 주며 살아야 한다. 그런 흐름을 예수께서는 본 산상수훈을 통하여 보다 섬세히 하고 구체화(具體化)하셨다.
그렇다. 복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이요 기초적인 해결 과제이다. 복은 잘되는 것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행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은혜에서 얻게 될 선물로 보아야 한다. 사실 사람이라면 복 받고 싶지 않은 자가 누가 있으랴? 그럼에도 복이 아니라 저주나 불행에 빠져 허덕이며 평생을 지내는 자들이 훨씬 더 허다한 것은 웬일일까?
요즈음 국가내란의 주범으로 보이는 윤석열 부부를 비롯한 그의 참모들이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들 거의 대부분이 주술(呪術)신앙인이라는 점이다. 점쟁이-굿-무당-사주팔자-신접살이 등등 소위 우리의 민속신앙을 빙자한 사이비 종교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모든 행동거지를 보면, 대부분 점집에서 잡아 준 택일을 받아서 활동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국가 경영의 대부분이 그런 무속신앙의 지휘하에서 집행된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불행한 일인가? 게다가 그런 무속 정권과 우리 기독교 극우세력들이 한통속을 이룬 현상이니, 이거야말로 최악의 저주스럽고 부끄러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다!
그러기에 새해에는 정말 무엇이 복인지를 더욱 제대로 배우고 알아야 할 때이다. 자칫하면 저주가 될 위험이기에 우리는 더욱 복을 제대로 배워야 하겠다. 이 복은 자식 잘되고, 돈 많이 버는 것이 복이란 식의 맹목적이고 육체적인 복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는 너가 죽어야 한다는 식의 복도 아니다. 그보다는 하늘에서 알아줄 수 있어서 상으로 이어지는 복이어야 한다(12절). 공을 위하여 사를 버릴 줄 아는 복이며, 전체를 살리고자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복이다. 곧 사랑 때문에 일하고 사랑 때문에 울고 웃으며, 사랑 때문에 견디어내서 얻게 되는 복이다.
1. 복음서 / 마5:1-12 / “ 화평(和平)하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컬음을 받을 것이요 ”
예수님의 세상과 그의 백성들을 향한 설교 말씀이 본격적으로 나왔다. 마5-7장은 그 말씀군이기도 하다. 그 중에 첫 부분인 행복 선언, 곧 팔복 선언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도입부를 이룬다. 이 설교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를 상대하신 것이지만(7:28), 전체 이스라엘에게도 하신 말씀이며(4:25),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를 겨냥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어둠에 살던 무리들이요 길 잃은 어린 양에 불과한 자들인 그들에게 예수는 그야말로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였다. 그러기에 그들의 예수님의 도전적 말씀과 주신 계명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여전히 버림당한 자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주님의 복의 선포는 매우 도전적이며 강렬했다.
소위 팔 복의 주제들 모두는 바로 예수와 그의 존재를 대변하는 성격을 드러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자. 예수님이야말로, 가난한 심령을 소유자였고, 애통(哀痛)하는 마음을 가진 분이었으며, 온유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특히 연약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신 분이었고, 마음 또한 청결하셨으며, 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박해까지 홀로 감당하신 분이셨다.
그런 당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당신을 복된 자로 긍정하셨으며, 당신을 닮아 살아가는 모든 자들까지를 주님은 복되다고 판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받고자 하는 복은 모두 예수와 그의 인격을 닮아가는 데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목적으로 하면 처음부터 하나도 얻어낼 수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적이고 마음에서 얻어낼 복을 목적으로 해가면, 이것저것 모두를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지 아니한 것일지라도,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지내는 지를 미리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일찍이 주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바도 있으셨다(마6:33 참조).
1) 가난은 분명히 삶이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부(富)보다는 훨씬 덜 불편하다. 까닭은 가진 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3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진 자의 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매우 무겁게 부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는 물질로 인한 부족과 빈곤에 따른 고통을 하나님이 맡기고 친히 감당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2) 애통하는 자는 누구일까?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일 것이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에 아파하는 자이다. 악인의 득세에 대한 거부에서 나온 애통이 복된 것이다(4절). 온유한 자는 그 마음이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여서 복되다(5절). 강팎한 상대까지도 품을 수 있어서 그는 영역이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열린 심령이고 온전한 것에 대한 탐구 때문에, 찾아 얻어낼 것이 많을 것이기에 복되다(6절).
긍휼히 여기는 자 역시 복되다. 그가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터이니까(7절). 마음이 깨끗한 자로서 죄악의 그늘을 벗어나 사는 자는 복이 있다(8절). 하나님을 뵙게 되는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짓는 사람은 복이 있다(9절). 분열과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갈라진 양쪽을 하나로 묶어낼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그에게는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10-11절).
그러면 이 복들이 왜 진정한 복인가? 바로 여기에서 받게 되는 위로와 상급이 땅의 보상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늘 영원한 곳의 상(賞-reward in heaven)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12절).
2. 구약 / 신11:26-32 / “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노니 ”
본문은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福)과 저주(咀呪)를 그들 앞에 두셨다면서,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신 내용이다(26절). 이는 복과 저주가 우연이나 행운에 의한 것이 아니요, 인간이 만든 어떤 우상같은 다른 신이 주는 것도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하나님의 지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 곧 선택은 인간이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른 복과 저주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점이다.
1) 복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취하는 제비뽑기 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의 말씀과 명령을 선택하고 그 앞에 복종하는 일이다(27절).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가 주신 말씀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일을 취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다. 안전의 복이요 평안의 복이며 형통의 복이다.
2) 물론 저주도 선택이 가능하다(28절). 다만 저주 선택은 인간이 여호와를 택하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도 무시하며, 그의 명령도 듣지 않고, 본래 알지도 못하던 다른 신들 곧 가나안과 그 주변에 자리하던 바알과 같은 토속신 내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신들을 따를 때 주어진다.
그 이유는 그런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요 나무나 돌로서, 전혀 거짓과 허위에 불과한 조각들에 불과한데, 그런 우상들을 감히 세상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여호와보다 우선하여, 거기에 경배하고 절하며 빠져든 것에 대한 여호와의 불같은 질투(嫉妬)에 따라 당하게 된 저주이다. 그 점에서 여호와는 아주 강력하게 자신의 심정을 자주 밝히셨다.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신이다’(출20:5, 신6:15, 수24:19, 출34:14, 신5:9참조).
이번 우리나라 정치계에 몰아닥친 내란과 정변의 주원인 요인도 이 우상숭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저들 무속신앙인들 역시 복을 받고자 하는 열망에 붙잡혀 살아온 자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방향이나 방법에 있어서, 복이 아니었고 저주를 택한 것이었다(신11:28 참조).
그들이 매달린 것은 참신이자 진리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토록 저주하고 미워하신 우상들과 무속 잡신들을 숭배한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저주와 죽음과 패망의 길을 선택 했다. 그토록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겁 없이 내란을 일으켜 무자비한 정권을 만들어 수많은 백성의 희생 위에 군림하려다, 저토록 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여호와께서, 통쾌하게 보여주신 저주의 채찍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번 일에서 영적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참 신 되신 여호와와 그의 명령을 확실히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복을 받는다. 어떤 경우에도 우상숭배나 거짓 신에 빠져 들면 안 된다. 거기에 휘말리면 저주를 당한다. 이번 태극기부대와 같은 정치 아류들, 곧 한국 교회의 극우세력들, 그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그들은 거짓 예언자인 전광훈의 유혹에 휘말려 들어서, 무속 신자들과 한통속이 되었고, 윤석열 탄핵도 반대한다며 시위에도 합류하고 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저주를 택한 무리가 되고자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떨지 무척 두렵다.
3. 서신서 / 고전13:1-13 /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의 존재하는 힘과 근원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있어서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어서 가족과 가정도 있다. 사랑이 있어서 교회도 있고, 민족도 있고 나라도 있다. 그는 사랑의 찬미자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나 지혜나 지식에 의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그곳에 사랑이 빠지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반면에 사랑이 들어가면, 모든 것은 정상화되고 온전해지며 가속화된다고 보았다.
사랑의 왜 그렇게 대단한가? 사랑이 주는 힘과 에너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4-8절 참조).
사랑은 오래 참게 한다. 견디는 힘을 주는 것이다. 온유하다.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품게 하기에 주변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시기하지 않는다. 질투나 투기심을 잡아 준다.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다. 자랑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생각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다.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기꺼이 감당한다. 악한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불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진리를 기뻐한다.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사랑은 이렇듯 알파와 오매가이다!
이래서 그런가?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를 강조한다. 하지만 유독 이 표현도 스스럼없이 통한다. 곧 ‘사랑은 하나님이시다’(Love is God). 이는 사랑은 곧 만능(萬能)임을 말한 것이다.
o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바라는 것들이 많을 것이고 받고 싶은 복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바램은 분명히 차원이 달라야 한다. 어떻게 달라야 할까?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본질적인 것에 승부하는 것이다. 복의 본질,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팔복도 사랑하면 다 가능한 영역이다. 종합하면, 나의 사랑의 지수(指數)를 높이는 일을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역시 복 받은 사람이요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