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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4-10-15 (화) 22:18 2일전 84  

본문) 출 20:1-21, 막12:28-34, 빌4:8-9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가을도 깊어 가면서, 산천엔 어느덧 단풍철이 완연히 임했음을 알려준다. 여행의 기쁨을 누리려는 이들에게는 가슴 설레는 때가 왔음이 분명하다. 때마침 우리나라는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하여, 모처럼 놀람과 자부심의 마음들이 가득하다. 저자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여태까지 번역본만 대했던 노벨 수상자의 작품을 자국어인 한글 원어로 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이토록 엄청남을 놀랍게 발견한다. 부디 그의 선한 영향력이 우리 민족의 긍지를 회복하고, 더 나은 성숙의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한다.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인의 노벨 수상자들이 배출되기도 기대한다. 


마침 월요일인 14일에는 본 말씀목회연구원의 제6회 전국대회가 한신대학원 컨벤션홀에서 있었다. 삼위일체력에서 본 성자 예수의 세계 중에서 <역사에 대변혁을 주신 예수(2)>란 주제로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한 주제는 작년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사역이 너무 크고 광대하여서, 한 번의 강연만으로 정리하기엔 벅찼기 때문이었다. 유튜브 생중계 되었고, 전국 동역자들이 의지를 갖고 먼 길까지 찾은 의미가 큰 모임이었다. 


이 대회의 핵심 내용은 삼위일체력에서 본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었다. 그 정체성 위에서 현재의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떠냐는 점을 점검하고자 하였다. 구약에서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子孫)이었다. 복음서에서는 우리는 예수의 제자(弟子)이었다. 신약 서신서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해 줄 증인(證人)이며 전해 줄 선교인(宣敎人)이었다.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 안에서는 모두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의 실체를 주목했다. 그의 복은 받은 복이기도 했지만(창12:2) 동시에 주는 복이기도 했다(12:3). 그런데 이 복들의 특징은 너무도 선명하다. 놀랍게도 이 받고 주는 복들은 패키지로 얽혀진 것이고 옵션으로 묶인 복이었다. 그러기에, 절대 편하게만 받을 수 없는 복이었다. 감사로 받지만, 책임과 의무로도 받아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우리 조상은 아멘(Amen) 하였다. 하나님은 그 모습에 깊이 감동하셨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내용은, 이 복들이 제대로 우리 안에서 성사되기 위해서는 사랑 없이는 안된다는 점이다. 곧 주실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사랑이 형성되어야만 받을 수 있고, 또 나에게서 받게 될 이웃과도 관계에서도 사랑의 마음이 소통되어야만 성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 두 복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적이고도 양 날개 관계의 밑받침에서만 이루어질 복이었다. 이것을 창조주는 생명 살리는 근간으로 세우셨다. 


창조주의 이 생명 살리기 위한 새 계명은 그때부터 양 날개를 펴서 온 세상에 날기 시작했다. 

그 날갯짓이 정상이면 구원과 번영이 창출되고, 비정상이면 저주와 몰락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 실험의 표본이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를 전한다. 예수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은 그 실패한 구원의 구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좁게는 이스라엘에게, 넓게는 온 세상과 온 만물에게 그 사랑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세계교회와 우리의 교회들은 바로 그 삼위 하나님의 원대하고도 확고한 꿈을 온 세상에 펼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려고 세상 곳곳에 세우신 주의 몸체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들은 믿음의 조상 이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계약의 자리인 이 사랑의 자리에 굳게 서 있는가? 그 점에서 깊은 재점검이 필요하다. 이런 시점에서, 오늘 우리는 창조절 여덟째 주일 맞이를 위해 창조주께서 주신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그것도 대표적 말씀이 바로 모세가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받은 십계명(十誡命)이다. 이는 ‘네가 서 있는 자리를 그 계명의 빛에서 점검하라’는 분부이기도 하다. 


십계명이 왜 그리 중요한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 숫자는 총 613개이다. 십계명은 그 전체를 십계명 안에 압축 요약한 내용으로 보면 되기에, 이 계명이 그렇게 중요하다. 특히 이 계명 준수는 곧 구원의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임도 예수께서 인정하셨을 정도이다(눅10:25-28 참조). 그것은 십계명 안에는 아브라함이 받은 두 가지 복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주 절묘하게 계명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1. 구약 / 출 20:1-21 /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를 당신의 산, 시내산에 부르셔서, 직접 글 판으로 전해 주신 십계명 내용이다. ‘하라’와 ‘하지 마라’라는 계명들이 어울러져 있지만, 내용에 의미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삶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여호와의 특별한 선물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 역사의 시초가 되는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그런 특별한 관계 속에 맺어진 관계가 이런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후손들로 인하여, 더욱 공고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십계명은 두 개의 ‘사랑하라’는 명령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적인 복의 구체적 대상과 내용이 담겼다. 하나님 사랑은 제1-제4계명으로 집약해 주셨고, 이웃(인간) 사랑은 제5-제10계명에 집약해 주셨다. 하나님 사랑은 3절-11절까지이고, 이웃 사랑은 12-17절까지 배치가 되었다. 


1) 첫 계명은 당신 앞에 다른 신(神)들을 두는 일을 금하셨다(3절). 여기서는 물론 주변 민족들이 섬기던 숱한 우상 신들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보다도 더 자신이 신뢰하고 마음을 빼앗은 모든 것들이 그들의 신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주관하셔야 하는데, 다른 것이 내 마음과 관심과 의식을 주관하고 의지하게 한다면, 그것 역시 ‘다른 신’일 뿐이다(루터 교리문답). 


2) 어떤 형상의 우상(偶像)들을 만들거나 거기에 절하거나 섬기면 안 된다(4-6절). 그것들은 하나님의 질투(嫉妬)를 유발하게 되어, 그 죗값이 무려 3-4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켜서, 그 복과 은혜를 자손 천 대에까지 받으라 하신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안 된다(7절). 특히 자신의 거짓과 악행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내세워 악용하는 일은 죄악이다(출22:28, 레19:12). 고귀하신 여호와의 인격과 존재를 대변하는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농담이나 이용의 대상일 수 없고 그 자체만으로도 존귀히 여김을 받을 대상이기 때문이다. 


4) 안식일(安息日)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11절, 출16:25,29 참조). 기독교가 주일(主日)로 간주하는 이날은 엿새 동안의 모든 세상 육체의 일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여호와의 날로 간주하여 모든 생명체가 함께 휴식을 하는 날이다. 여호와가 이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 


5) 이웃 사랑의 첫 계명인 제5 계명은,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는 일이다(12절). 이 계명 준수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준 땅에서 그의 생명이 장수(長壽)하게 하는 복을 보너스로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낳아 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이웃 사랑의 제1 계명의 위치로 자리해 주셨는데, 이는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는 이웃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곧 건강한 부모 공경이 이웃 사랑의 문도 됨을 알려주신 것이다. 


6) 살인하면 안 된다(13절). 살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상대의 목숨을 끊는 일만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특히 예수님의 살인 금지 명령을 참고해야만 한다(마5:21-26절). 상대를 무시하는 인격 살인도 우리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알고, 경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7) 간음(姦淫)하면 안 된다(14절). 이 부분은 현대인들이 매우 쉽게 넘어가는 범죄가 되었다. 이는 이웃의 가정을 파괴하는 남의 배우자와 부정한 짓으로서 당연히 엄히 금하는 일 이외에도, 예수께서는 마음의 음욕을 품는 행위 자체를 크게 경계하셨다(마5:27-32 참조). 


8) 도둑질하면 안 된다(15절). 남의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 훔치는 행위는 큰 죄악(罪惡)이다. 


9) 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면 안 된다(16절). 거짓과 위증으로 인하여 자칫 상대방에게 무고한 피해나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레19:16, 왕상21:10 참조). 


10) 내 이웃의 소유를 탐(貪)내지 말아야 한다(17절). 탐욕은 각종 범죄의 온상이다. 불순한 동기가 되어, 이웃의 삶의 토대를 빼앗으려는 숨은 음모와 같기 때문이다. 그 대상을 보면, 가정을 이루는 집도 있고, 아내도 있으며, 종들도 있고, 가축과 같은 재물들도 포함된다. 이상의 모든 내용(5-10계명)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일들이다. 이런 잘못을 범하는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겠는가?   


2. 복음서 / 막12:28-34 / “ 서기관이 이르되 —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


본문은 유대 서기관 한 사람이 자기 앞에서 부활 이후의 결혼문제에 관하여 잘 설명하시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평소 자기가 궁금했던 바인 ‘모든 계명 중에 으뜸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의 질문을 예수께 드린 내용이다(막12:18-27 참조). 그러자 주님은 모세의 ‘쉐마 이스라엘’(신6:6-9)을 상기시키시면서,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셨다. 


1) 첫째는 유일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이다(30절).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과 같이(as yourself) 사랑하는 일이다(31절). 아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일이다. 이런 설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준선(guide-line)이기도 하였다. 


2) 그런데 여기에서 이웃 사랑의 대목은 모세의 쉐마 이스라엘의 영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롭고 보완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은 그때 하나님 사랑에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서 최상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면서, 아브라함이 본래 받았던 하나님의 복의 실체인 이중적(二重的)인 복의 원형(原形)을 저들 속에서 복원해 내시려고 하신 것이다(창12:2-3참조). 


3) 예수님의 이런 이웃 사랑에 대한 보완적 설명에 대하여, 서기관은 즉시 호응하고 나왔다. 예수의 이중 사랑 실천이 자기들의 번제와 재물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32-33절). 이는 자신들 유대인들이 이웃 사랑하는 면에서는 절대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했다는 점이기도 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는 번제와 각종 제물을 드리는 일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우선한다는 점까지 솔직히 시인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다른 인물이었다. 


4) 그런 그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매우 반갑고 기뻤다. 진흙 속에 진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시각이라면, 그는 극보수요 인간 사랑의 핵심 측면이 무너져 있는 완고한 유대교를 갱신할 수 있는 개혁적(改革的) 인물을 만나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를 이렇게 축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34절). 


3. 서신서 / 빌 4:8-9 /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교회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 서신에서, 성도들이 주변에 편만해 있는 모든 현상 속에서, 항상 선(善)하고 온전한 것들에 관심하며 살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무엇이든지 참된 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옳은 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 덕(德)이 되는 것- 칭찬할 만한 것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지고 생각하며 살라고 했다(8절). 


그러면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행(行)할 것들을 밝혔다. 곧 그들이 사도인 자기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이다(9절).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문자로 적시하진 않았으나, 바울은 분명히 성도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계명이요 으뜸 되는 주의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람) 사랑을 가르쳤음이 상기시키면서, 그러기에 그들은 반드시 이 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8절의 모든 최상의 온갖 선하고 좋은 것들도, 역시 이 사랑을 실천할 때 넉넉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o 지금 우리 시대는 극도로 대립적이고 공격적이며 거칠어진 때를 보내고 있다. 이런 때 마침 우리 교회는 다음 주에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는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아니, 아브라함의 복의 구도를 우리는 회복해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원에 매달려야만 한다. 사랑의 힘만큼 강한 것은 없다. 사랑만큼 선한 것도 없다. 사랑만큼 옳은 것도 없다. 사랑만큼 큰 것도 없다. 이제 우리는 저 유대 서기관의 각성이 새삼 필요하다. 교회와 가정과 나라의 체질도 서로 사랑하는 일에 결집해야 산다. 그게 순리이고 되살아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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