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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10-11 (금) 20:26 2개월전 168  

본문) 창 9:1-7, 마25:14-30, 벧전 4:1-11


오늘은 절기 일곱 번째 주일이다. 가을의 정취를 한껏 호흡할 수 있는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드높은 창공의 대기 흐름이 그동안 무겁게 짓눌렸던 우리의 가슴을 한껏 트여주어서 기쁘다. 그런 중에 너무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우리의 여류소설가 한 강씨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과 자부심을 온 세계에 드높여 준 일이 발생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 두 번째 수상자가 나타난 것이다. 정말 꿈같은 일이다. 최근엔 나라 생각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우울했는데, 이번 한강씨의 수상은 분명 치료제가 되리라. 


오늘의 세 본문 주제는 노아 홍수 심판 후에 다시 시작하는 새 인류인 노아 가족들을 향해 내려주신 말씀은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7절)는 내용이다. 분명히 이 말씀은 그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대홍수 후의 그들 여덟 가족은 모든 것을 무(無)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제 빈  공간에 필요한 생명들을 채워가야 하는 사명과 책임을 감당해야만 되는 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또 다른 아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인류의 새 역사를 열어가야 할 무대에 올랐다. 


그러면서도, 수천년이 지난 시점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기에는 편치만은 아니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려할 정도로 인구절벽 시대에 직면해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결혼도 기피하고, 결혼해도 아이 낳기를 거부 내지 외면하고, 낳아도 한 명 정도로 생각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우리나라는 아이가 부족하여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빈 곳들이 많아졌고, 노인들은 급증하면서 그들을 수용하고자 하는 요양원 시설이 번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매우 난감한 일이다.


이런 중에 받게 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떻게 받아야만 좋을까?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옹호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오히려 정신차려 이 말씀의 내용에 담긴 뜻을 잘 분별하여 받아서, 다시 이 말씀 내용의 축복을 받으라고 명하신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무리가 세상의 풍조에 한통속에 되어서, 아이 생산을 중단하고 인류의 역사와 전통을 차단하려 하는 일에는 결코 하나님의 용납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요즈음은 인공지능을 비롯해서 각종 로봇이 인간 기능을 대체하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존재를 기계나 동물들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순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을 갖고 그 축복의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세 본문 속에 담긴 전체적인 여호와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는 생명의 생산과 양육과 번성의 과정을 통해서 지속되어 왔음을 시인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그게 인간에서 거룩한 멍에요 책무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창조 과정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이란 거룩한 에너지를 부여해 주셨다. 이는 자동차를 움직이고 기계가 작동하기 위하여 소비할 에너지가 공급되는 것이 마땅한 것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번영의 축복사에는 그것들을 제대로 소모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1. 구약 / 창9:1-7 /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다”


사실 땀과 피와 눈물을 외면하고 인간이 축복을 생각하고 말하려는 일 자체가 기만이요 거짓이다. 그런 점에서 노아 가족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기 위하여, 편한 생활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은 최고의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수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얻어낸 열매로 보람과 긍지를 위안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감당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매우 특별한 지시를 받는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는 축복은 그들이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로 응답을 받게 될 터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은 매우 특별한 금지 명령 하나를 부여하셨다. 곧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라’(4절). 만일 먹으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죽인 자의 생명의 피를 찾겠다면서, 피째 먹는 것을 엄히 금(禁)하신 것이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모든 먹거리를 주시되, 선악과만은 금지하신 것과 흡사하다. 그러면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할까?  


피는 생명 자체를 담고 있는 신비한 액체이다.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따라서 생명을 담지한 피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면서, 여호와는 인간들에게 이웃들, 특히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그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인권(人權) 존중심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이 인권 존중의 부분이 무시된 현실에서의 생명 번성과 양육은 심각한 갈등과 저항을 유발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왜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이토록 아이 낳기와 양육을 꺼리는 것일까? 정말 결혼하기 싫어서거나 양육하기 싫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낳고 키워낼 사회 환경이 너무 어렵고 각박하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의 사회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고 살기 때문이다. 생명들의 경쟁심이 너무 격하고, 거기에 좇아가려니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도시일수록 더욱 심하다. 경쟁과 탐욕과 배제와 굴욕을 경험할 일들이 자기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이 인권 사각지대라서, 더욱 그렇게 기피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그들이 시골이나 어촌과 같은 친자연적이고 친환경적인 곳을 선호하고, 그래서 결단하여 그리고 가서 산다면, 그래도 아기 낳기를 지금처럼 기피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쟁이 아니라 상호 보호하고 협력하며 생명 하나가 귀한 곳인 친자연, 친환경적인 곳, 나가면 먹거리가 언제나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대지와 땅과 바다를 품고 산다면, 그때는 오히려 자기 자식을 하나라도 더 낳고자 열린 마음과 태도를 택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2. 복음서 / 마25:14-30 / “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내용 속에,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올라와 있다. 무슨 의미일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다음의 내용에 주목해야 하겠다. 


1) 이 달란트 비유는 절대 공정(公定)이나 정의의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는 점이다. 만일 공정의 차원을 말하려면, 하나님의 공정은 인간의 것과는 아주 차원이 다름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수치와 규모와 덩치에 따른 차이만을 놓고 공정을 말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 사람의 역량과 수용할 그릇의 폭을 감안하셔서 그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분량의 은사만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창조주에게는 그 사람 자체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과 수용할 그릇의 폭을 감안하셔서, 감당할 만한 복을 안겨 주신다. 마치 아버지 부모처럼-! 


2) 만일, 공정 때문에 모두에게 역량을 감안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똑같이 달란트를 준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매우 불행한 일들이 범람할 것이다. 역량이 큰 자는 허덕이게 될 것이고, 역량이 부족한 자에게는 너무 과분하고 감당할 수 없고 주체할 수 없어서, 가진 것 때문에 타락하고 그 삶이 엉망으로 망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가장 은혜로운 말씀은 그 주인(하나님)이 ‘각각 그 재능대로 주고 떠났다’는 15절 말씀이다. 그게 곧 평화요 공정이었다.


3)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앞의 두 종들인 5달란트, 2달란트의 종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이 자신들에게 기대하신 마음도 헤아렸다. 그래서 주어진 몫에 많다 적다 불평 불만할 것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하여 주신 달란트를 밑천 삼아 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그 결과물로 갑절의 소득을 획득했다(16-23절). 그래서 돌아온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포상까지 받게 되었다. 


4) 문제는 1달란트 받았던 종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주인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고, 그것을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원액 그대로 가져와서 주인에게 내어놓은 바람에 벼락을 맞게 되고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24-30절). 그는 주인을 ‘엄격한 사람이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분’으로 말하면서, 그러기에 자기의 수고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해서 이렇게 원액 자체를 가져왔다고 변명한 것이다. 종의 기본적 삶인 땀과 눈물과 피를 외면하고 안일한 태도만을 보이려고 했다. 


5) 여기서 우리는 큰 메시지를 받게 된다. 주인인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는다. 곧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그분의 뜻과 의도를 좇아서 살아가는 삶이 축복받게 되는 길이요 구원에까지 이르는 길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주인에게 종은 누군가? 대접하기 위한 자가 아니다. 주인의 뜻을 받들어 주인의 일을 하도록 선택받은 자이다. 그 몫을 잘 감당하면 그 종은 복을 받는다. 하지만 그 주인의 마음을 오해하고 엉뚱한 짓을 하면, 그 종은 저주받게 된다. 


6) 특히 성경에 소개된 달란트는 그 화폐 단위가 무겁다. 1달란트가 현재의 우리 돈 가치로 보면, 약 20억원 정도로 평가되는 액수이다. 이 점을 보면, 당신의 1달란트 받은 종은 사업을 통하여 소득을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자(利資)나 사채놀이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주인이 맡긴 일들을 간단히 처리하려고 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땀과 눈물과 피를 요구하는 순수한 헌신자의 모습이 아닌, 기회주의적인 얄팍한 태도로 자기의 소임을 대신하려 했다고 보인다. 


7) 혹 앞에서 말한 잘못된 공정 논리에서 불만을 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곧 왜 자기만 세 중에 제일 적게 주느냐는 불평불만을 하면서, 그 결과로 그런 무책임한 대응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는 더욱 주인의 판단을 곡해한 것이다. 주인은 세 종들의 재능을 고려하여 그렇게 분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1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도 모르고, 자신의 처지와 분수도 모르는 정말 멍청이였다고 보인다. 


이런 모습은 우리 중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분 나쁘고 감정이 상해서 모든 당연한 일을 그르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일 1달란트 받은 자가 자기 분수를 헤아리고, 그렇게라도 몫을 분배하여 기회를 주신 주인을 고마워하며 열심을 내었다면, 그는 분명히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 되어, 그다음의 기회를 기대할 수 있는 자가 됐을 것이다. 


8) 이런 점을 헤아린 주인이 그 세 명의 종들에게 내린 최종 평가와 심판은 의미심장하다. 곧 5달란트와 2달란트 맡았던 종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평가와 함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그 무기력한 1달란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요 무익한 종’이란 평가와 함께, 그가 받은 1달란트까지 빼앗기면서 10달란트 받은 자에게 넘겨주게 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살게 되는 저주에 떨어진 것이다. 


3. 서신서 / 벧전 4:1-11 / “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지니 —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교회의 사도인 베드로는 주의 거룩한 공동체는 언제나 그 마음가짐의 기본을 우리 위해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에게 두기를 당부하였다(1절). 그 마음을 바탕삼아, 우리는 종말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온전히 서기 위하여,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가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생활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인격이자 품격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 역시 우리의 영적 생존과 번영과 축복을 향유 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기도 하다. 


1)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8절). 서로가 소중한 영원한 나라의 가족들임을 명심하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해야만 한다. 먼저 사랑부터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좌우명이요 기본 행동 지침이다. 이렇게 사랑부터 하게 되면, 그 사이에 끼어든 각가지 허물과 과오들 모두가 녹아 없어진다. 


2) 서로 대접하는 일이다(9절). 아브라함은 대접을 잘하여 복을 받으신 분이시다(창18장 참조). 

그것도 아들 이삭을 받게 되어 생육, 번성의 복된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인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도 우리의 주도적 이웃 선대를 명하신 말씀이다. 하늘의 복은 여기에 있다. 


3) 서로 봉사하는 일이다(10절). 교회는 여러 은사들을 받은 이들의 집합체이다. 하지만 똑같은 은사는 거의 없고, 모두가 차이 나게 다르다. 그래서 자기 은사가 적고 소량이라고 무시하기 쉽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아무리 적어도 그것을 모두를 위하여 내어놓으려 할 때, 하늘의 역사는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병이어가 이웃을 위해 내어놓았을 때,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자료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은사는 헌신과 섬김의 도구가 될 때 빛을 발한다. 1달란트의 소유자도 전체를 감동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o 지금은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주의 축복이 나에게 어떻게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를 성찰하면서 감사도 드리고, 반성도 하는 계절이다. 다만 번성(蕃盛)은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신 내용들을 성실히 좇아 살아올 때, 거두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존귀함을 인식하고 사랑으로 접근할 때 가능하다. 내자신의 형편과 역량을 헤아려 주신 창조주께 감사하며 그 뜻을 받들어 충성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며 서로 봉사할 때 가능하다. 부디 이 말씀 위에 서서, 위기의 미래를 극복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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