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 13:1~7, 신 8:1-20, 마 22:15-22
오늘은 강림 후 여덟째 주일이다. 본격적인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고, 후덥지근한 무더위와 씨름하면서 번지기 쉬운 질병들에도 대비하는 등의 건강 관리에도 유의해야 할 때이다. 이런 중에 나라는 권력자인 대통령 부부의 무분별한 범죄적 행태들로 인한 국회의 국정조사 건으로, 정치계의 대립이 갈수록 첨예화되고 있다. 국민의 분노의 지수도 급증했다. 부디 이 땅에 성숙한 정치가 자리하여, 국민이 보다 편안히 살게 되는 시절이 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하겠다.
성령강림절기가 깊어진 이 주일에 주신 세 본문 말씀은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어디로 이끄시는가? 먼저 우리에게 있는 두 개의 힘의 봉우리들을 보게 하면서, 그 양쪽에서 이들과 피할 수 없이 관계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과 거기에 필요하고 지혜로운 대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세 본문들은 매우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길잡이를 해준다. 복음서는 총론적 양측(兩側) 면을 먼저 보게 하고, 서신서는 그 중 세속 권력의 축을 맡아서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고, 신명기는 나머지 하나님의 축을 맡아서 대응 방안을 제시해 준다.
이 두 권력, 곧 세상의 정치(政治)권력과 인간의 영혼을 심판하실 하나님 통치(統治) 권력은 진정 우리 인간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다만 세상 권력은 보이는 구조상의 법적인 것이라서 온 백성에게는 피할 수 없다. 집단적으로 부여된 의무와 권리를 바탕으로 책임과 함께 보호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 권력은 성격이 아주 다르다. 불신자들에게는 거절하고 외면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의 내면적 관계에서 형성된-, 그것도 믿음과 양심의 영적 차원에서 계약 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믿는 자에게는 말씀으로 제시된 하나님 섬김의 계명들은 여전히 존재를 걸고 지켜야 할 질서이다.
이러한 두 권력에 대한 섬김을 제시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참조)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17절)라며 질문한 끝에 나온 예수님의 답변에서 드러난 바침의 원칙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가이샤(황제)에게 납세 여부를 놓고 예수를 시험하려 들었으나, 예수님은 거기에다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에게까지 바치라는 것도 추가시킨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보인다. 예수님은 세속 권력자의 정당성 내지 합법성 여부를 불문하고, 세속 사회에서 존재하는 권력의 실체에 대하여서는 일단 인정하셨다는 점이다(삼상8:22). 그 기능에 대하여서는 바울이 서신서 내용을 통해서 보완 설명하겠지만, 예수님은 세속 권력을 수용하셨다. 비록 당신을 불의로 심판하고 처형까지 집행했던 권력이었지만, 그 권력 자체는 인정하셨다. 이는 평소 로마 권력에 저항 내지 비판적 경향을 보이면서 납세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던 바리새인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인 모습이어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예수에 놀랐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납세(십일조 등 헌금)의무를 게을리하는 모습에도 묵과하지 아니하셨다.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 시험에 나섰던 권력 집단인 헤롯 당원들의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한 태도에 침묵하지 아니하신 이유였다. 곧 그들에게 부여된 두 권력들, 로마 황제를 향한 납세의무와 함께 온 세상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헌금 의무도 온전히 감당하여서, 백성으로서의 의무 수행에 소홀함이 없어야 함을 일깨우셨다.
우리는 오늘 이 양대 축(軸), 곧 하나님 통치와 국가 권력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대응 방안을 배운다.
먼저 하나님 통치를 향한 백성의 섬김의 내용은 모세의 신명기 가르침을 통하여 다시 배우게 된다. 사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의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이어서 왕 등의 인간 우두머리가 없었다. 그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 통치자였고 그의 계명이 백성의 삶을 규제하는 유일한 법규였다. 그래서 우리는 신명기를 통하여 하나님 섬김의 부분을 충분히 배우게 된다.
반면에 세상 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섬김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로마 황제가 신으로 숭상받는 황제의 절대 권력 시대에 하나님의 종이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며 예수의 주되심을 전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세속 권력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도 잘 알고 살았으며, 그 자신도 그 권력에 의하여 순교까지 당했다. 그것은 그가 세속 권력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최고의 법으로 인식하고 순복하며 살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원칙은 이것이다. 참된 권력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모든 권력은 그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세상 권력은 자신의 한계를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대적은 그게 바로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겸손하며 그의 선하신 뜻을 받들려는 의지로 부여된 권력을 사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편(便) 들어주심을 통하여 세상에 가장 필요한 권세자로 봉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본문들을 통하여 세부 내용을 보자.
1. 복음서 / 마22:15-22 / ”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바리새인들의 치명적인 오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몰고 오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면서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정죄의 수단으로 삼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걸 예수님은 항상 비판하셨다. 본문은 그런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올무에 걸어서 그의 모든 행보를 저지하려고, 또 다른 예수 비판 세력인 헤롯 당원들과 연대하여, 예수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질문을 했다.
‘이거냐 저거냐’라는 양자 선택적 답을 요구한 시험자들에게, 예수께서 제시한 답변은 ‘이것과 저것 모두를 다 하라’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 양측 시험자들은 모두 실패하고 퇴각하게 되었다. 어떤 점에서 그랬나? 바리새인들은 내심 ‘바치라’를 기대했다. 그러면 예수를 반민족적이요 위선적인 인물로 매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헤롯당원들은 ‘바치지 마라’를 기대했다. 그래야 예수를 반국가적 선동자로 고발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가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답변하시자. 그들은 예수가 아닌 자기들부터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납세 의무에서의 반국가적 수준에 있는 자신들 모습을 문제로 보아야 했고, 헤롯당원들은 세속 권력에 부화뇌동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향한 바침의 의무에는 소홀히 하는 탕자들임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죄를 물어야할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자신들임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충격을 받은 모두는 그 자리를 떠나게 되고야 말았다(22절).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속 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의무를 시인하는 선에서 전개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비록 식민지 백성의 굴레임에도, 예수님은 그 부분을 안고 가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하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꾸준히 하셨다. 진리의 왕의 지혜로운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요18:37참조). 하지만 자신들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드릴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겐 매우 엄중히 경고도 하셨다. 하나님께 소홀히 하는 태도는 결국 자신이 맡은 직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소명(영혼)을 잃은 직업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서신서 / 롬13:1-7 / ”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사도 바울의 세계 전도가 어떤 시대(時代)정신을 가지고 펼쳐졌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로마 황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반정부적인 비판적 시각을 앞세워 선교에 임하였다면, 그의 선교가 어떻게 되었을까? 출발도 전에, 이미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일단 체제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의 한계성과 함께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주목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 방향을 수용하였다고 본다(마22:21 참조),
1) 그가 위에 있는 권세(세속 권력)에 성도들이 복종할 것을 지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모든 권세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정해주신 바이기 때문임을 밝혔다(1절). 이런 가르침을 통하여 바울은 국가와 권력이 주신 분인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함께 보게 하였다. 우리가 국가 권력에 복종할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것을 대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절).
2) 그는 다스리는 권세자들의 역할에 대하여서도 말한다. 원칙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4절), 하나님을 대리하여 국가와 국민의 제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사안들을 주도하는 인물들이다. 그러기에 권세자는 선행자에게는 칭찬을 하고, 범법자에게는 칼과 진노를 내리는 일들을 주도한다(3-4절).
단,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대리자인 세속 권력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망각하고 탈선과 잘못된 행태에 대한 경고는 여기에 없다. 이유는 국가 권력과 집행자에 관련된 원칙만을 밝히는 서신의 장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록 세부적으로 밝히지 않았어도, 그러한 하나님의 대리자이면서도, 그 자리를 악용해 자기만족이나 사익 추구로 질서를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더욱 혹독한 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이 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억지가 아닌 자발적이기를 바랐다. 매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양심 때문에 협력하라고 권했다(6절). 그럴 때, 교회는 세속 권력과의 우호적 여건 속에서 복음 전파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분별력이 필요하다. 줄 것은 주고, 바칠 것은 바치며, 두려워할 자는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는 존경하는 분별력이 발휘하라고 했다(6-7절).
3. 구약 / 신 8:1-20 /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한 이래 갖게 된 40년간의 광야(廣野) 생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게 되는 매우 유익한 교육 현장’이었다. 실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기들은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임을 뼈저리게 배우고 익히는 훈련장이었다. 낮에는 50-60도를 넘나드는 열사의 땅이었고, 밤에는 사막의 냉기가 흘러서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하는 힘겨운 생존의 터전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신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기둥이 절대 필요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먹거리가 문제였다. 농사나 목축이 불가한 상태였고, 마실 물도 매 순간 위기였다.
이를 위해 여호와께서 매우 특별한 음식으로 식물성 식품인 만나를 매일 아침 새벽에 공급하여 주셨고, 동물성 담백질용(用)으로 메추라기도 공급해 주셨다. 그리고 식수를 위하여 분천과 샘을 수시로 만나 마시게 하시거나 반석을 깨어 용수를 공급하시는 등의 놀라운 손길을 베풀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의복들도 해어지지 않게 살았으며 발도 부르트지 않게 살았다(4절).
그러면서도 그들에게는 또 다른 생명의 양식이 공급되고 있었다.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내려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과 계명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영혼이 취할 생명의 양식이었다. 그들은 회당 중심으로 이 말씀을 취하였고, 가족 중심의 쉐마교육이 병행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젖과 꿀이 약속된 미래의 가나안 생활을 대비하였다. 본문은 모세가 머잖아 그들이 들어갈 가나안에서의 믿음의 생활에 필요한 절대 계명을 제시한 내용이다(1-2절).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기억하고 지켜야 할 절대 필요한 말씀이다.
1) 이들은 광야 40년 생활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진심을 확인하고자 시험(試驗)하신 과정이었기 때문이다(11-16절).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을 향한 마음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싶으셨다. 동시에 당신의 명령을 준행하는 지도 살피고자 하셨다(2절).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줄을 알게 하심이었다(3절, 마4:4, 요4:34 참조).
2) 이 과정에서 그들은 혹독한 징계도 받았다. 그것은 아비가 자식을 징계함으로 받아야 했다. 그래서 어쨌든지 자신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살며 그의 길을 좇아야 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안겨 주실 아름다운 땅(젖과 꿀이 흐르고, 모든 식물이 풍성하며, 지하자원도 풍부한 곳)에 들어가 제대로 상속받은 백성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5-10절).
3) 동시에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보여줄 불신앙적 태도에 대하여, 매우 깊은 우려와 염려, 그리고 경고를 보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활이 풍성하고 안정되면서,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상황에 빠져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11,14절). 그러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財物)을 얻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17절). 이게 왜 그토록 무서운 일인가? 그런 배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 그 신에게 절을 한데서 나온 것으로서, 하나님의 징벌로 멸망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19-20절).
4)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잊지 말고 기억하고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무엇인가?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며 사는 일이다’. 아울러 ‘그가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能力)을 주셨음’을 기억하며 감사드리며 사는 일이다(18절).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며 깨우침이다. 주신 분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일은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기본 윤리(倫理)이다. 망각하면 관계가 깨어지면서,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된다. 이 감사와 기억의 법은 세속에 대한 윤리보다 훨씬 강력하다.
o 우리는 하나님과 국가라는 큰 힘의 두 양극 체제 속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국가의 힘과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뿐이다. 다만 하나님은 지역과 인종을 고려하여, 상당한 권한과 힘을 세속 권력에 이양해 주셨다. 그러기에 세상 권력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받은 힘을 행사하는 일에 겸손해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일 뿐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주권하에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뻐하며 그의 뜻을 받들어 살고,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