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엡 1:3~14, 사 64:1-9, 막13:28-37
오늘은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어느덧 반년이 지나면서, 올해의 후반기에 접어들었고 이제 그 첫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장마철이고 무덥기도 하지만, 이토록 건강하게 생존하며, 가족과 이웃들과 교회들과 백성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창조된 세계와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 맘 그지없다. 이토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
사실 우리네 삶의 정황은 매우 어둡다. 지난 주간에는 경기도 화성의 리튬 배터리 공장인 아리셀에서 대폭발 참사가 발생하여 무려 23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하면서, 우리네 열악한 노동 현장 상황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그 대부분이 코리안 드림을 갖고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 아픔이 더욱 크다. 그런가 하면 서해 북방한계선에서는 9.19 군사합의서가 무효가 되면서, 또다시 화약고가 되어 전쟁 연습장으로 돌변한 상태이다. 무서운 지뢰밭들이다.
이런 중에 우리는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는다. 그리고 세 본문으로 주신 말씀들을 받는다. 이때엔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까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두 영역(긍정과 부정, 사적과 공적)에서 어느 하나만이 아닌 양면 모두를 그의 섭리 속에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한 부분 때문에, 주를 향한 우리의 예배와 경배가 제한되거나 훼손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역시 하나님의 것 아닌가-!
교회의 사도요 세계적인 전도자인 바울 사도는 항상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전도자로서 평생을 헌신한 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현장의 문제점도 보았다. 그것은 언제나 이방인에 대한 우월적이고도 배타적 성향을 간직한 유대인과 그로 인한 수동적 입장을 면치 못하던 이방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현존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임을 깊이 통찰하면서 그 종합적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울의 가장 내세운 대안적(代案的) 선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平和)’로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십자가)로 허무셨다는 점이었다(엡2:14).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 안에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외쳤다(2:19절). 아울러 바울은 예수를 친히 ‘모퉁잇 머릿돌’이 되셨다고 강조하였다(20절).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서 하나라고 했다.
결국 예수를 머리로 하여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으로 연합과 연대를 이루게 될 때, 무엇이 되겠는가? 그곳에는 하늘 아버지의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고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의 능력의 역사가 드러나는 곳이 되기에, 당연히 세상 만물은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되고, 하늘과 땅에는 그의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이 펼쳐지게 된다(17-22절). 그게 주님의 몸인 교회이다(23절).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이의 충만을 맛보고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의 에베소서 본문에서 이런 지상 교회의 역할을 소개하기 전에, 그보다 훨씬 앞선 창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보다 놀랍고도 획기적인 일을 준비하신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에 세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틀-가이드 라인)이기도 한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 몇 가지이다 :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세상과 인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이룰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Through Christ) 이룰 것임을 확정하신 일이었다. 바울은 이 내용을 매우 비중 있게 강조하며 소개한다(3-13절 참조).
둘째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the predestined)이 있음을 전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선택된 자들(the elected)이 있음을 증언한 것이다. 이 무리들이 누구인지는 내용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아무튼 바울의 이 증언은 매우 놀랍고 신비롭다. 여기에 참고삼을 만한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아버지 것이며 내게 주신 사람들’로 표현하신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요17:6-10절). 상호 연계된 무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는 저 유명한 칼빈의 예정론(豫定論)의 근거가 된 중요한 내용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울은 배척(排斥)당하게 된 자들(the rejected)에 대하여서는 말이 없다. 구원과 선택 사상만을 뚜렷하게 강조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구원으로, 누군가는 버림으로 예정되었다는 잘못된 이중(二重) 예정론은 거부한다. 하나님은 은총의 선택만을 마련하셨을 뿐이지 특정인을 사전에 저주로 점 찍어 놓으신 분이 절대 아니다. 버림으로 심판당한 자들은 분명히 많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어떤 특정인을 향해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칼 바르트).
셋째는 예정된 자들이 이 지상에서 보여준 모습에 대하여서도 증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베푸신 피의 속량의 잔치에 참여하면서, 거기에서 입은 용서받은 자의 삶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신분으로 산다(4-7절). 하늘의 삶을 땅에서부터 산다. 그리스도가 그의 머리 되시기에, 그의 지체가 되어 산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기업들이다. 그들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인침으로 보증해 주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며 살도록 이끄신다(8-14절).
이사야서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대(善待)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알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한 자들이 계속 범죄를 저지르면서 하나님의 선의를 훼손시키고 있음을 통탄해 한다. 그리고 그 죄악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그들이 소멸당할 정도가 되었음을 선지자는 탄식한다. 그러면서도 선지자는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을 빚으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런 백성들을 그 모양 그 꼴로 살다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점이다(5-9절).
복음서는 바로 그러한 선지자의 기대와 믿음에 부응한 여호와의 응대가 올라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최후의 구원자요 결정적인 구세주로 보내주셔서, 죄인들을 심판에 대비하도록 독려하셨기 때문이다. ’깨어 있으라‘(Watch, Be alert)고 간곡히 당부하셨다(33-37절). 마치 집 지키는 종에게 주인이 당부하신 그 말씀을, 우리 믿는 자에게도 주셨다!
1. 서신서 / 엡1:3-14 /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신비의 은총(恩寵-Grace)에 대하여 감격하며 증언한다. 우리는 여기에 오른 내용의 영광스러운 증언들을 믿음으로 받아, 감사와 감격 속에 우리에게 성령으로 부여된 하나님의 자녀와 그의 영광스러운 기업이란 위치를 가슴에 담고, 이 세상에서의 부여된 삶을 기쁨으로 묵묵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
1) 우리는 누군가? 만물과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택(擇)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베풀어 주시려고 택함 받은(-기획(企劃) 받은) 대상들이다. 예수는 누구며, 그를 통한 복은 어떤 것이었나? 예수는 새롭게 된 인류의 구원자로 정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택함받은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아들들)가 되는 관계가 된 존재들이다(5절).
그러기에 예수는 오셔서 그가 택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부터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마6:9참조). 그러면서 자녀들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안내하셨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과 신뢰로 모든 것을 주고받는 관계로 격상(格上)시키신 대단히 영광(榮光)스러운 조치이기도 하다. 천한 인간에게는 신분의 대변화이다. 당연히 은혜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6,12, 14절 참조)
2)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공고히 하시기 위하여 그의 선택된 무리들을 위하여 그 누구도 취할 수 없는 선제적(先制的) 조치를 취하셨다. 이 방식은 무엇인가? 부족한 우리의 희생을 먼저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의 죄악을 씻어낼 제물이 될 십자가의 속죄물로 무죄한 당신의 거룩한 피를 쏟아 내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기에 합당한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피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하늘 가족이 되게 하신 것이었다(7-9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할 통일(統一)을 이룰 기반이 구축된 것이다(10절).
3)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요 상속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계획은 오랜 전에 창조주 아버지께서 연약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선택하고 예정하신 조치이기도 하다(11-12절). 이 어찌 그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
4) 이런 사실은 십자가의 체험을 먼저 한 제자들이 온 세상에 복음으로 전파되면서, 온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그 복음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이 임하셔서 인(印)쳐 주시는 은혜에 따라서 이제 명실공히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고, 그의 몸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으로 하나 되어 들어서게 된 것이다(13-14절).
2) 예언서 / 사64:1-9 / “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
선지자는 이런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의 계획을 불신과 의혹으로 받아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그의 백성들의 모습을 통탄(痛歎)해한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주께서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도록 해주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해달라고 탄원한다(1-4절).
1) 주님은 대체 누구를 선대(善待)하여 만나 주시고 교제하여 주시는가? 기쁘게 공의(公義)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들이다(5절). 하지만 그의 백성된 자들(우리)이 불신과 불순종으로 범죄함으로서, 주께서 진노하게 하였고, 그 잘못된 모습을 고치지 못한 체 오래 계속해 옴으로써, 이제는 다 부정(不正)한 자 같게 되었고, 불의한 자 같이 되었으며, 시들어진 잎사귀처럼 되어서, 자신들이 다 소멸(消滅)되게 되었다. 참으로 구원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5-7절).
2) 놀라운 것은 이런 꺼져가는 처지에 몰렸어도, 선지자는 마지막 희망을 전능자 여호와 하나님께 걸고 간구를 올린다. 비록 백성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분발하여 주를 붙잡지 못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를 품고 계신 분이심을 믿기에, 그리고 ’결코 당신의 자녀들이 죄악에 빠져서 그렇게 허망하게 지옥 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못하시리라‘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뜨겁게 간구한다 :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9절).
3. 복음서 / 막 13:28-37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그(집주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 ”
선지자의 그런 간구는 오랜 세월을 경과하면서, 드디어 하나님은 그 간구에 대한 확실한 응답으로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도래를 예고하시면서,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막1:15). 그중에 유독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일깨우시면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주의(注意)하라 깨어 있으라’를 강조하셨다.
1) 임박한 종말 사상의 핵심은 교회를 깨어 있게 하는 데에 있다. 30절의 강조는 현재 살아 있는 세대들이 더욱 긴박히 깨어 종말에 임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날과 그때를 아는 자도 없는데, 당신의 거짓 선지자 중에서는 그날과 그때를 자기만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하게 하여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했고, 개인의 신앙을 불순종과 이해 없이 믿는 맹신앙으로 인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실 뿐임을 기억하자(32절).
2) 유일한 대비책은 자주적으로 깨어 사는 일이다(33-37절). 집주인이 언제 어느 순간에 오실 줄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인으로 사무와 살림을 위탁받아 깨어 사는 청지기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홀연히 돌아온 집주인의 책망을 받지 않게 되도록 깨어 살아야 한다(33-37절).
o 참 감사드릴 맥추절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된 존재로 택함 받은 사실을 확인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그런 예정자의 반열에 나같은 죄인이 일원이 되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血)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아 살게 된 일도 감사드려야 하겠다. 그리고 부족한 존재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열심을 갖게 하셔서 주의 일에 참여하게 하신 성령님께 감사드려야 하겠다. 감사로 살아 있음을 보여 드려야 한다.
부디 이 귀한 은총을 입은 우리가 그분 앞에 설 때까지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게 되도록, 우리 서로 더욱 격려하고 응원하는 귀한 믿음의 공동체로 결속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