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종려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 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종려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 할까

관리자 2024-03-19 (화) 16:42 1개월전 162  

본문) 막 11:1~10, 삼하 6:12-19, 히12:18-24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다. 절기의 끝 주일이면서, 부활절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차원이 아주 다른 두 절기를 잇달아 접하게 되는 때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 우리 인류는 전 인생살이에서 맛볼 수 없는 가장 극적인 반전(反轉)도 경험한다. 통절한 고통과 가슴 벅찬 환희를 잇달아 경험하게 된다. 다만 이 둘 모두가 예수라는 분 때문에 맛보는 일들이다. 


곧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참혹하게 죽임당하심을 보면서, 우리는 가장 슬프고 억울하며 가장 가슴 아픈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예수의 다시 사심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스스로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이겨내고 넘어선 삶의 새로운 실체인 부활까지도 접해보면서, 삶의 환희와 감동과 희망과 꿈을 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생애에서 가장 막장인 죽음과 그 한계를 넘어서 오는 부활이란 새 지평이 모두 다, 예수란 그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세계란 점이 놀랍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종려주일이 주는 의미와 무게는 특별하다. 특히 금주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생애를 보내시는 중,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는 배신까지 당하시고, 당신은 홀로 십자가에 참혹하게 처형당하셔서 종래는 무덤에까지 안장되는 모습을 잇달아 보여주신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일 직후에 맞이하게 될 그의 다시 살아나심까지를 생각한다면, 금주의 메시지는 남다를 것이다. 대체 어떤 마음가짐이 이 주간에는 필요한 걸까? 


다행히도 여기에 관련된 답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 본문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답은 무엇인가? 바로 ’간절(懇切)하고도 절실(切實)한 마음‘이다! ’주면 좋고, 안 주어도 괜찮다‘라는 마음이 아니라, ’꼭 주세요‘ ’아니, 절대로 주세요. 오 주여, 안 주시면 저는 죽습니다‘라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란 것을 일깨워 준다. 이런 절실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오늘 본문에 가득 차 있기에, 우리는 바로 이 부분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내용을 세 본문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복음서에서는 나귀 새끼 위에 올라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향하여, 그를 뜨겁게 영접하던 백성들의 ’호산나‘란 외침과 함성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8-10절).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모시고 오면서, 즐거이 환호하며 춤까지 추는 다윗 왕과 그의 백성의 충만한 마음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예수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뿌리며 순교한 무리들의 모임에서 읽게 된다. 


결국 오늘의 세 본문은 구원과 생명의 새 역사는 진정 누구에게 열리는지를 알려주고자 한다. 본문만이 아니라도 우리는 충분히 동의한다. 즉 새 시대, 새 역사는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하고도 절실한 마음으로, 씨를 뿌리고 땀을 쏟으며, 피를 흘리며 싸워낸 이들이 취하게 되고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극적이거나 태만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새 시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오늘의 말씀도 그렇고, 역사의 진실로 그러하다. 


마침 지금 우리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중요하기에 잠시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시선을 정리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곧 있을 4월 10일의 제22대 총선거를 앞두고, 여야(與野)가 생사를 건 치열한 선거전에 돌입했다. 그동안 여야는 선거에 내놓을 자당의 후보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힘겨운 공천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탈락과 공천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자당이 내놓은 300명의 새 국회의원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한 치열한 선거전에 들어섰다. 


여러분은 저들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국민과 유권자들에게 목소리 높혀 호소하는 소리들을 들으신다. 과연 무슨 소리를 들으시는가? 공통적인 내용이 있다. ’이번에 상대를 심판(審判)해 달라는 호소들이다‘ 본래 호소는 원한과 연계된 내용이라서, 그 울림이 큰 법이다. 그러기에 그 호소의 내용은 그 진정성에 따라서, 이번 총선의 판가름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들에게서 무엇을 듣고 계시는가? 누가 더 진정성 있는 호소를 하고 있는가? 


내가 듣기에는 이렇다. 여당인 국힘당은 국민에게 ’586 운동권 세력들을 청산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요즈음에는 ’다수의 야당 국회‘를 청산해달라고 요구한다. 분명한 것은 그런 여당 대표의 요구에 국민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대부분 그들은 한국 민주주의 설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로서, 그나마 물러난 상태이고, 다수 야당은 안건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체, 대통령과 대치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당인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의 국민을 향한 요구는 매우 뜨겁다. ’검사 독재로 인하여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저 왕처럼 행세하는 소수 권력자들에게 소중한 주권 행사를 빼앗겼으니, 이번 선거를 통하여 이 정권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들의 불의와 위선은 물론 가족 범죄 수사는 아예 외면하면서, 정적이나 상대방에 대하여서는 잔인하게 짓밟고 괴롭히고 있으니, 이번에 공정사회 회복을 위해서도 국민들이 투표로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3년의 남은 기간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더 참담한 나라가 될지도 모르니, 부디 이번에 확실히 심판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다. 야당 대표들의 그런 호소에 전국의 많은 국민이 몰려와서 경청하는데, 그 울림이 매우 크다. 새 역사의 문이 열림을 느낀다. 여(與)는 절실함이 없고 자기방어에 급급하다. 하지만 야(野)는 가슴에 맺힌 한과 아픔이 너무 강하다. 국민의 아픔도 잘 대변하고 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응답을 해야 하겠는가? 마냥 구경꾼일 순 없다. 당연히 가슴에서 나온 호소에 응답해야 한다. 이런 모습이 오늘의 복음서에서도 나온다. 주님의 나귀 타심은 그 응답의 일환이었다! 


1. 복음서 / 막11:1-10 / “ 예수께서 타시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 우리 조상 나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분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에 읽게 되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나귀 새끼 타시고 입성하신 행동에서 몇 가지 의미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외침에는 자신들의 오랜 염원을 풀어달라는 절박한 외침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당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신 일이다. 그동안 백성들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과 권위를 접하면서,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럴수록 그 현장을 피하셨다. 그리고 시종일관 목자와 돕는 자로 일관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감추려 하지 않으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시작으로, 당신이 선지자들의 오랫동안 예고하였던 바로 그 오실 분인 메시아요 왕이심을 확실히 노정(露呈)해 보이셨다. 그것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3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신 ‘주(主)께서’라는 표현이 자신을 다윗이 약속하신 분으로 소개한 구체적인 내용이다(시89:3-4 참조). 


둘째는 당신의 입성을 위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사용하신 내용도 주목될 부분이다. 이 내용 역시 스가랴 예언자의 성취로서 소개된 본문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것이다. 곧 왕은 왕이되, 이 왕은 세상 일반적인 왕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왕이시다는 점이다. 자신을 공의와 구원과 겸손을 겸비한 왕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슥9:9,마11:28 참조). 


여기에서 겸손(謙遜)이란 말은 ‘가난하다’(히)라는 뜻이 있어서, 이 왕은 근본 가난하고 낮아진 백성들에게 훨씬 어울리는 그런 왕이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면서 당신 자신도 그런 신분으로 사셨고, 또 메시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온통 가난한 민중들의 벗으로 지내시면서, 그 예언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시면서 사셨다. 


셋째는 왕의 신분을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시면서 드러내신 이유이다. 일반 왕들은 통상 병거(兵車)와 말을 타고 전쟁에서 입성하며 자신을 과시하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사렛 예수는 왕이심을 드러내시는 순간에도 한번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다. 이는 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平和)의 왕이 당신의 본래적 신분임을 밝히고자 하신 것이다. 칼과 창으로 싸워서 승리한 왕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섬김으로 세상의 왕이심을 밝히고자 하심이었다. 


넷째는 백성들의 오랜 기다림과 열망에, 이제는 응답하셔야 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유대 백성들의 메시아 열망은 수백 년의 숙원(宿願)이었다. 유대의 모든 경건한 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에게 평화의 세상인 샬롬(shalom)을 안겨 주실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백성 시야(視野)에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이시다’라고 보였던 것이다. 나귀 타심은 실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현실에 당신이 응답해야 함을 인정하신 행위였다. 곧 민중의 열망과 예수의 응답이 함께 어우러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대에 진입하는 순간이다! 


백성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혀 놓고, 수많은 이들도 겉옷도 깔아놓으며, 종려나무 가지들을 펴고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시118:25-26 참조)를 외치기 시작했다. 호산나란 무슨 소리인가? 히브리어로 ‘호 쉬안나’란 말인데, 그 내용은 아주 절박한 외침에서 나오는 ‘꼭 건져 주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꼭 구원해 주소서’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민중들의 한 맺힌 외침에 자비와 긍휼이 크신 주님이 결국 응답하신 일이, 바로 예수께서 나귀 새끼 등에 타시고 당신의 마지막 장정에 오르신 일이었다. 


2. 구약 / 삼하6:12-19 / “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열정적 반응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다윗 도성인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법궤(언약궤)를 모시면서, 왕 다윗과 모든 백성이 열광하며 환영하는 모습이다. 그 영접과 환영식은 가히 국가적(國家的)이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6보(步)를 내디딜 때마다 왕 다윗은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고, 베 에봇을 입은 왕은 그 앞에서 힘을 다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때마다 온 이스라엘 족속들은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의 궤가 준비된 성소 중앙에 자리하시도록 정성을 다했다. 궤가 제자리 하신 후에는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며 마쳤다(13-15, 17절). 실로 목숨과 정성을 다한 대축제였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이렇게까지 했는가? 바로 왕 다윗의 신실한 믿음과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다. 곧 여호와의 언약판인 십계명 돌판을 담은 법궤가 오랫동안 이방 땅인 블레셋 지방에서 떠돌이 하는 일에 대한 죄송함과 안타까움이 다윗 가슴에 숙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얼마 전 그 궤를 모셨던 에벧에돔의 집이 그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큰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이 기회에 법궤 모시는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절박한 결단으로, 전 국민을 총동원해서 이 법궤를 국민적 행사로 승화시켜서 예루살렘 장막 성소 중앙에 모시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법궤를 국가와 민족의 한복판에다 모시는 일을 이룬 데에는 다윗의 다음과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첫째는 그의 목자이신 여호와를 향한 충성심과 믿음에 따른 것이다(시23:1). 둘째는 그의 말씀인 법궤는 국가의 심장과 민족의 가슴 중앙에 모셔져서, 온 나라가 여호와의 통치하에서 살아가야만 복을 받게 된다는 뚜렷한 확신 때문이었다. 셋째는 여호와의 궤를 제 곳에 모심으로써, 국가의 모든 영역이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다고 보았던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다윗이었기에,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하였다(행13:22 참조). 

그가 법궤를 모실 때, 왕이면서도 백성 앞에서 그토록 체통에 연연하지 않고 춤을 추며 기쁨을 드러냈던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매달려서, 나라나 백성의 축복도 여호와 없이는 안된다는 믿음을 분명히 보여준 행동이었다(21절). 


이에 대조적인 것은 그의 아내 미갈이었다. 남편이 바지까지 내려가도록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그런 남편을 얕잡아본 것이다(16절). 그 심판은 하나님이 하셨다. 남편의 가슴과 영혼에 불타는 열정과 충성심을 못 본 미갈은 결국 죽는 날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다(23절). 오늘날도 행동하는 다윗형 인간과 비판만 하는 미갈형 인간이 존재한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3. 서신서 / 히12:18-24 / “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 기자는 우리가 이를 곳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흑암과 두려움과 폭풍이 일어나서 두려움을 안겨 준 시내산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도시인 시온산임을 일깨운다. 이곳은 수많은 천사와 하늘에 등록된 장자(長者)들과 완전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아벨의 보복의 피보다 더 훌륭한 피, 곧 대속으로 화해와 평화를 안겨 준 예수의 피 앞에서, 축하하며 환희와 기쁨을 나누려고 모인 거룩한 무리의 성이다(21-24절). 


이곳은 심판과 보복을 일삼은 율법 신자들이 아닌, 예수님이 보여주신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로 복음의 의를 이루려고 전 생애를 순교하면서까지 예수께 일심으로 헌신한 의인들이 살아가게 될 하늘의 도성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는 곳이다. 예수가 꿈꾸셨던 사랑과 섬김의 아름다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불태우며 살아온 사람들의 궁극적인 꿈이 실제화된 영생의 나라이다. 


o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우리의 외침과 절박한 간구에 귀를 기우리시고, 응답을 주시려고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왕인 예수님을 환영하는 주일이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의 호산나를 외칠 것인가? 간절한 마음, 절박한 마음, 꼭 해결 받고 싶은 소원의 마음을 담아, 나귀 타신 평화의 왕인 예수께 부르짖어 보자. 그리고 이 기회에 우리 민족에게 이번 선거를 통하여 새 시대와 새 역사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도 간구해 보자. 오늘은 이렇게 호산나를 외치는 자들의 날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내일도 안겨주실 것이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