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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3-13 (수) 10:17 1개월전 169  

본문) 요 11:47~57, 레16:1-10, 20-22, 히9:11-1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이 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入城)이 있었던 종려주일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시점에서의 우리는 예수를 맞이할 도성 예루살렘과 유대 사회가 오시는 메시아 예수에 대하여 어떤 대비(對備)를 하고 있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예수의 입성이 이 세상 전체에 커다란 대변혁(變革)을 몰고 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견하진 못했으나, 그렇다고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지는 아니하였다. 그 해당 지역은 자신도 모르게, 예수로 인해 시작될 대변화의 기운(氣運)에 직간접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그곳에는 예수로 인한 두 가지 긴박한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는 예루살렘 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병들었다가 죽었는데, 죽은 지 나흘 된 날 예수께서 그 나사로의 무덤으로 찾아가셔서 돌무덤 문을 열게 하신 후, 큰 소리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살려내신 크고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요11:1-44 참조). 이 일은 마침 목격자들이 많아서 금방 온 유대에 퍼졌고, 이에 따라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45절). 


이 일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사로 부활에 앞서 예수님은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며, 당신이 부활(復活)의 주(主)이심 밝히셨는데, 그러려면 예수님은 진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해야 하고, 나중에는 당신 자신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모습을 보여야만 그 주장을 온전히 입증하게 된다. 곧 살리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를 진정한 부활의 주로 믿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신 사건은 당신이 진정한 부활의 주이심을 확증해 가시는 과정에서, 전반(前半)의 과제를 해결해 주신 일이었다. 물론 이 정도만의 사건으로도, 온 유대가 놀라서 술렁일 정도로 충격은 컸다. 그 일로 많은 유대인이 믿을 정도였기 때문이다(45절). 하지만 예수께는 당신이 ’부활의 주‘이심을 입증하기에는 아직도 후반(後半)이 남아있었다. 바로 당신 자신이 죽음에서 완전히 다시 살아나시는 일이었다. 


그러면 누가 그 의로운 예수를 죽이는 악역(惡役)을 맡아야 하는가? 또 무슨 중죄를 씌어서, 죄 없는 예수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이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 기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권력자들이 그 일을 떠맡았기 때문이다. 곧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열고, 백성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예수 문제를 놓고 대응 방안을 논의한 끝에, 결국 국가나 백성들이나 자신들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예수를 죽이자’는 모의를 한 것이다(47-53절). 그래서 예수에 대한 체포령까지 내렸다(57절). 


참으로 기가 막힌 국면이었다. 죽었던 자를 살린 후에, 그 살리신 당사자인 자신은 죽임을 당하게 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국가의 공권력이 총동원되어 그런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한 명의 의인이 수많은 악인이 던지는 돌맹이를 맞으며 죽임을 당하게 되는 어이없는 처지에 떨어진 셈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인간적인 수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실 바로 이런 현상을 예견하듯, 세례요한이 일찍이 나사렛 예수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보라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羊)이로다’(요1:29). 


성경은 인간의 죄를 푸는 일을 설명하면서, 대속(代贖)이나 속죄(贖罪)란 표현을 많이 올린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양이나 염소 등의 짐승들을 자신을 대속할 희생 제물로 삼아, 그 짐승에게 자신의 죄 짐을 지워서 대신 죽게 함으로써, 자신은 죄의 형벌을 면케 되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 제도로 애꿎은 짐승들이 많이 죽었다. 이는 마치 옛적의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대리 곤장(棍杖)’ 행태와 유사하다. 곧 죄인이 곤장 맞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할 때, 대리로 맞게 될 자를 돈 주고 사서, 자신의 형벌 문제를 해결했던 제도 말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당시 그를 경계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제거되기를 원하던 모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들을 온몸에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희생되는 어린 양처럼 죽임을 당할 자로 선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수 제거를 제안했던 가야바 대제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께서 걸머진 멍에는 훨씬 더 무거웠다.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고‘ 그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50-52절).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제사 제도에는 일찍이 대속 제물인 ’아사셀 염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 해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머리와 몸에 걸머지고 돌아올 수 없는 광야 깊은 곳에 보냄을 받아, 광야 짐승의 먹이로 죽임을 당하는 그 희생 염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아사셀 예수이시다. 그 바람에 인간 예수가 그 대속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면서, 더 이상의 짐승 제물을 마감하게 하셨다. 그러면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서, 누구든 그의 피와 이름으로 속량을 받을 수 있게 하셨고, 영원한 기업까지 상속할 수 있게 하셨다. 


1. 복음서 / 요11:47-57 /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가 ---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


본문은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公會)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다가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만나게 될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 좋을지를 의논하는 내용이다. 공회는 당시 유대 공동체의 최고 관청으로서, 그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거기에는 유력한 제사장들과 지도적인 서기관들과 명망 있는 평신도들 71명의 남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로마 정권은 공회의 세속적 전권은 제한하였으나 그들의 종교적인 결정권은 인정하고 있었다. 


1) 이번 긴급 안건이 나사렛 예수에 관한 건이 된 까닭은 얼마 전 베다니에서 죽은 자 나사로를 이 예수가 무덤에까지 찾아가서 살려낸 일로 인하여, 온 백성이 예수를 믿고 좇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의 유월절은 이 예수를 온 백성이 자신들의 왕이나 메시아로 옹립할 움직임이 발생하리라고 보았다. 문제는 그게 현실화하면 로마 권력과의 충돌이 예견되면서, 그로 인한 온 나라의 폐해가 심대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47-49절). 


이들의 이러한 염려는 우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애족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신들의 존재도 사라질 수 있다는 깊은 우려와 염려를 담고 있었다.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자기들, 반면에 백성의 희망으로 치솟아 오른 나사렛 예수와 그의 무리들에 대한 깊은 시기와 경계(警戒)적 견제 심리가 컸다. 이래저래 위기감에 휩싸인 그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난감한 상황 타개를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2) 결국 결정적인 대안 제시는 그 해의 책임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입에서 나왔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50절). 그 한 사람이 누군가? 바로 예수이시다! 예수가 모두를 위하여 죽는 것이 대안이다고 선언한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그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고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결국 이 놀라운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은, 마침내 본의 아니게 하늘 섭리를 담은 예언적 성격의 말을 하게 되었다(1:29, 6:33, 10:11,15, 15:13, 17:19참조). 특히 이방 민족들로부터 생겨나는 성도들까지도 담아내고 있었다(52절). 


3) 이날부터 예수에 대한 처형 모의(謀議)는 본격화되었다(53절). 동시에 공개 체포령까지 나왔다(57절). 이런 움직임을 알아차린 예수님은 잠시 빈 들 가까운 에브라임 동네로 들어가셔서 제자들과 머물고 계셨다(54절). 도피가 아니라 때를 맞추시려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공회의 그런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숱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을 성결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집결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절대 관심은 역시 예수였다! 그들은 예수를 찾았고, 그가 과연 ’명절에 그곳으로 오지 아니하겠느냐‘라는 초미의 관심사를 나누고 있었다(54-56절). 


2. 구약 / 레16:1-10, 20-22 / “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 


이스라엘에는 일 년에 한 번 지키는 대(大) 속죄일(히, 욤 키푸르)이 있다. 일곱째 달 열흘날이 그날이다(레23:26-32 참조). 이날은 안식일 가운데 어느 하루가 아니라, 금식하며 일을 쉰다는 점에서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는 특별한 성격을 띤 날이다. 이날은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속죄하기 위하여 일손을 놓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 제물로 화제(火祭)를 드린다. 


1) 이날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34절)만의 특별한 준비 절차를 거친 다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거역하면 죽게 된다(1-2절). 속죄 예식을 거행할 때 대제사장은 평상시의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출28장 참조), 검소한 세마포 옷을 새로 빨아서 입는데, 이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면서 자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는 표현이다(3-4절). 


2) 이때에는 백성들이 속죄 제물로 삼기 위하여 가져가는 숫염소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가 있다(5절). 대제사장(아론)은 이 두 마리 염소를 놓고 제비를 뽑는다. 한 마리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속죄 염소‘(20-22절)로 삼아 광야(廣野)로 보낸다(9-10절). 여기서 아사셀(the scapegoat)은 광야 귀신의 이름으로 보이는데, 아사셀은 제물을 받지 않고 단순히 광야 자체를 대신하는 이름일 뿐이다(요1:29, 롬3:24-25 참조). 


3) 특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제비로 뽑힌 아사셀 염소(살아 있는 염소)를 광야로 보내기 전에 취한 행동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통 때는 피 뿌린 것만으로 사람들을 위한 속죄가 되었다고 보았다(4장). 하지만 속죄일에는 그보다 훨씬 상징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죄를 없애는 예식을 거행한다. 곧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그 염소를 광야 속으로 내몰아서 거기에서 죽게 하면서 자신들의 죄 멍에까지도 처리하였기 때문이다(20-22절). 


4) 이를 위하여 대제사장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按手)한다. 이 안수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범한 죄를 고하면서 죄 짐을 염소 머리에 전가(轉嫁)시킨 후에,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그 염소를 아사셀 광야로 보낸다. 그때의 염소는 인간들의 모든 불의와 죄를 지고 죽음의 땅으로 끌려간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는다. 소위 세상 죄를 끌어안고 가서, 죽음으로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대속(代贖)한 것이다. 


5)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속죄 행위, 곧 피 뿌리는 제사 행위와 무죄한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서 그 죄를 없애게 하는 행위가, 바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암시한다고 본다(요1:29, 롬3:24-25 참조). 아사셀 예수상(像)을 본 것이다. 특히 히9-1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심으로써, 사람이 바치는 율법적 제사 행위에 종지부를 찍게 하여 참 속죄 행위를 이루셨다고 선포한다. 


3. 서신서 / 히9:11-15 / “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良心)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본문에서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시고,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실 분으로 증언하면서, 레위기에서 소개된 인간 대제사장과의 사역과의 뚜렷한 차이도 소개한다(11,15절).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 대제사장은 사람에게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려고 염소와 송아지 같은 짐승을 잡고 그 피와 재를 활용한다. 그 바람에 그 예식에 참여한 자들은 불완전하지만 그 대속적 행위를 통하여 심적 용서와 해방을 얻는다. 이때의 그 속죄의 효능은 물론 일시적이고 그 때 뿐이다. 하지만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가축이 아닌 자신의 피와 몸을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다. 여기에서 오는 차이는 무엇일까? 


그 십자가와 예수를 마음을 접하고 믿게 된 자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 변화를 경험한다. 일시적인 속죄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 곧 모든 시대에 유효한 속죄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흠 없는 자기를 부정한 자신들을 위한 대속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접하면서, 탐욕과 거짓으로 살아온 자신의 부끄러움을 양심 깊은 곳에서부터 자각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게 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변화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12-14절). 실로 피의 놀라운 공로 체험이다. 


O 오늘날에도 우리 기독교 안에는 저 유대교 지도자들만양 희생 양을 찾아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라는 공식을 찾아 헤매는 무리가 많다. 대부분 그들은 자신의 거짓된 모습에 대한 양심적 가책에 쫓기면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상대를 ’좌파, 빨갱이, 종북세력‘이라는 등의 폭력적 누명을 씌워서 상대를 꺽어들려고 한다.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행태이다. 


우리는 첫 계약인 율법 시대의 신앙인이 아니다. 둘째 언약인 복음 시대의 신앙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을 정죄하여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고, 모두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종이 되고 희생의 제물이 되려는 입장을 취하는 일이다. 이게 예수의 사람들의 참모습이다. 거기에서 진정한 구원의 대의가 생성되고 확산된다. 이제 우리가 그 길을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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