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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23-06-28 (수) 00:12 1년전 880  

본문) 행 17:16~34, 요8:31-38, 욥28::12-28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월력에 따르면, 금년도 이제는 하반부에 접어들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학기말 고사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들어가는 때이다. 기후도 대 격변을 맞는다. 바로 장마의 내습이다. 제주 지역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는 이미 장마권에 접어들었다. 이곳 서울도 그 영향권에 접어 들어서, 더위와 함께 습하다. 건강과 음식 관리에도 신경써야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중에 우리는 한 해의 절반을 무사히 넘어가게 된 일에도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교회 절기도 한 해의 첫 감사절인 맥추감사절을 맞이한다. 이는 구약에서의 칠칠절 전통에서 나온 것인데, 한 해의 첫 농사에 대한 추수에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이때는 먹거리를 안겨주신 창조주에게 감사드리면서도,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배려하는 이웃 사랑의 절기도 병행하는 때이기도 했다. 고아-과부-나그네들을 돌아보고, 경제적 약자인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배려하는 손길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고 또 훈련시키는 절기이기도 하다(신16:10-12참조). 


누군가는 우리가 보리농사를 안 하기에, 이 절기를 꼭 지켜야하는 지 궁금하다고 하는 데-, 그런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보리든 쌀이든 무슨 추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생존할 수 있도록 대지를 주시고, 양식을 주시며, 농사를 지어서 우리에게 먹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도록 절기(節期)라는 시스템을 통하여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 중요하다.   


감사는 기억할 때 나오며, 그 기억에 따른 감사를 실행할 때, 서로의 관계는 증진된다. 주시는 분과 받는 자의 인격적 관계도 함께 발전한다. 절기가 소중한 것은, 절기는 잊고 사는 우리에게 기회와 동기를 되살리는 일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감사함으로 받아서, 우리의 감사의 영성을 다시 살려내도록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이 되면 될수록, 복이 되고 그 삶이 풍요롭게 된다. 거기에 참 지혜와 명철이 있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은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샘물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마실 것이냐’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그 샘물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욥에서는 창조주 안에서만 제공되고 마실 수 있는 지혜(智慧)와 명철(明哲)을 말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살리며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의 제자가 될 때 얻게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신분(身分)과 거기에서 누리게 되는 자유(自由)를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신 부활의 증거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안겨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Faith)을 말한다. 


문제는 이런 구원의 샘물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는 점이다. 그 점에서는 본문들은 아주 다른 접근들을 한다. 욥기에서는 창조주의 작품들이나 자연물에게서 시도하고, 서신서에서는 인간들의 지혜나 철학들이나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들에게서 찾으려하며, 복음서에서는 유대교에서처럼 혈통에게서나 율법에 의한 자기 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런 본체와 본질이 아닌, 변두리에 불과한 객체나 피조물들에 매달리는 일은 인간의 수고를 헛되게 할 뿐이다. 그보다는 우리의 시선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말씀에 집중해야 좋다.  


1. 서신서 / 행 17:16-34 /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


성령은 사도 바울을 아덴(=아테네)으로 이끄셨다. 아덴은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인본주의의 메카였고, 지성과 의학과 각종 철학 및 인문학을 뽐내는 도시였다. 그 뿐 아니다. 종교학과 우상들도 집합된 도시였다. 그러기에 세계에서 이름 있는 신들과 그의 추종자들도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바울은 그런 도시의 형언할 수 없는 다채로운 풍상들을 들여다보다가, 놀랍게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신전까지도 발견하기도 했다. 종교 박람회랄 수 있음을 본 것이다.


바울에게서의 아덴은 실로 특별한 선교 체험장이기도 했다. 대도시와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 그리고 최고의 인문학적 현장에서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시도할 수 있는 무대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전도 방식도 새로웠다. 곧 예수 부활의 종교 소개보다는, 그들에게 익숙한 자연신론(自然神論)적 접목으로 창조주를 소개하면서, 자기 생활현장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과 그들의 소생인 인간들의 관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사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심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어서, 다양한 종교에 관심하였으나 특정종교에 매어 있지 않았다(22절). 하나님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당시 그들은 네 종류의 인물들로, 자신들의 목마른 영성을 해소하려고 매달려 살고 있었다.


첫째는 유대교도들인 디아스포라들이 있었다(17절). 그들은 율법은 알고 있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모른 자들이었다. 둘째는 유명한 철학들이었다. 바울이 맞서서 토론한 철학들은 헬라 철학의 대표론자들인 유물론의 에피쿠로스와 운명론의 스토아 철학이었다(18절). 셋째는 여호와와는 상관없는 각종 우상종교들이었다(18절). 넷째는 아레오바고 현장의 사람들이었다(22-23절). 이들은 늘 새로운 지식과 정보에 매달려서 아레오바고를 무대로, 항상 새로운 소식을 즐겨듣고 사는 무리들이었다.  


아덴에서의 바울은 이런 다양한 무리들과 거침없이 접촉하고 토론하였는데(23절), 오늘 본문은 최종적으로 아레오바고에 초빙된 연사로서 그 무대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이 올라와 있다. 여기에서도 바울의 결론은 예수의 부활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소식이었다. 설교의 반응은 조롱도 있었고, 등진 자들도 있었으며, 소수이지만 믿는 자들도 있었다(32-34절). 이제 그곳 현장을 좀 더 들여다보자. 


1) 바울이 본 아덴의 영적 상황은 숱한 종교와 철학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는 있으나, 그 대부분은 우상 종교들이었고, 미신과 신화에 치우친 면모를 안고 있었다. 그중에 여호와의 종교인 모세의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교도 디아스포라 중심으로 자리하고는 있었으나, 구원의 생명력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교의 열정이 충만했던 바울의 마음은 바빴다(16-17절 참조). 그러면서도 당대의 유력한 철학자들이 바울이 증언하는 예수와 부활에 관하여 관심을 표명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고 싶어 하기도 했다(18절 참조).    


2) 결국 바울은 그 아덴의 아레오바고란 역사적인 연설 무대 위에 서서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그곳은 당시의 국내외 유명 인사나 새로운 주장을 하는 이들을 불러내서, 그들의 새로운 가르침과 그 뜻을 청취하는 이들의 모임터(바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존재한다(19-21절). 


3) 이곳에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인간론을 전파하면서도(23-28절), 물질론자들인 에피쿠로스파 사람들을 겨냥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우연이 아닌 목적을 보유한 존재로 만드셨음을 전하였다(28-29절). 반면에 운명론자들인 스토아 사람들을 겨냥해서는 지음 받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예수를 회개하여 믿게 됨으로서 그가 심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와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4) 이 과정에서 바울은 특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선언하면서도, 그 모든 인간에게 가해질 치명적인 심판까지도 면하게 해 주실 은혜의 선물도 하나님께서 사전에 마련해 주셨음을 소개하였다. 그 심판을 면케 할 안전장치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사흘 후의 부활을 믿는 일이었다(31-32절). 즉 여호와는 죽은 자의 부활 사건 수용 여부를 당신의 심판 조건으로 세상에 내어 놓으신 것이다. 


5) 왜 이렇게 바울은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 여하(如何)가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최종적 조건이다’고 강조하였을까? 죽음을 넘어선 부활이야말로 인간이 바라는 최종적인 희망과 꿈의 영역인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문이기 때문이었다(고전15:12-19참조). 구원은 선행과 착함이나 고상한 도덕적 삶의 내용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인간적인 차원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죽음과 영생을 결정할 현실은, 오직 예수의 부활과 그 믿음 안에서만 열린다. 이게 우리가 예수와 그의 부활을 굳게 믿어야할 이유이다.  


6) 청중들은 세 가지로 반응했다. 반발자와 유보자와 믿는 자이었다. 판단을 자신이 하려고 드는 자들은 이 낯설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수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 몇 명은 주님께 돌아왔다. 그곳 동산의 관리 책임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오란 여성과 몇몇 사람들이 예수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32-34절). 아덴 선교의 소중한 첫 열매들이었다.  


2. 성문서 / 욥28:12-28 / “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 하나님은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아서 누려 보았고, 또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겨서 자신도 헤아릴 수 없이 가장 깊은 미로(迷路)의 늪 속에 빠져 본 사람인 욥(욥1장-2:10 참조)의 고백이 오늘 본문에 올라와 있다. 


그 원인을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는 남편의 모습에 실망한 그의 아내는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까지 압박하였다(2:9). 또한 그에게는 세 명의 훌륭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은 그의 알려지지 아니한 죄악에서 나온 인과응보의 결과물이라는 예단을 하면서 욥에게 회개하라고 계속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런 세 친구들과의 끝없는 신학적 토론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깊은 신뢰와 희망을 포기하지 아니하였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실 사유와 회복과 치유의 잔을 마시고자 하였다. 세상 피조물들인 만물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의 잔을 마시고자 하였다(12, 20절 참조).  


1) 욥은 이미 답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지혜는 사람이 알 수 없고, 만물들에게도 숨겨졌거나 가려졌지만(10-19절, 21절), 오직 한 분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은 그 길을 아시고, 있는 곳도 아신다고 선언한다(23절).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이미 당신이 가진 그 지혜와 명철로 이 세상 모든 것과 우주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잠8:22-29참조).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의 지혜와 명철이 녹여 들어간 그의 소산(所産)들일 뿐이다. 


2) 이는 자연신학의 근거이기도 했고, 바울이 아덴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창조주 하나님의 특성이었다(행17:24-29참조). 그러기에 길 잃은 양 같은 피조물들은 자신이 고통과 혼란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게 되면, 그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면 된다. 자신들이 모르는 길과 해법이 창조주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창조주의 손길이나 작품에 불과한 피조물 자체에 몰입되어 조물주를 외면하면, 그 자체가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3) 욥은 단호히 고백한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절).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와 명철은 그의 삶을 구원해내는 길이다. 이 지혜는 모든 사건을 꿰뚫고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창조주를 전적으로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좇아 악을 떠난 삶이라야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보유하신 지혜와 명철의 구체적인 실체를 당신이 세상에 파송하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다.  


3. 복음서 / 요 8:31-38 /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드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아주 맹렬히 맞서서 당신의 역할과 영역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주신 내용이다. 예수께서 유대교도들과 대립하신 주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自由)는 과연 누가 누릴 것인가’였다. 이 자유는 참 해방과 기쁨을 안겨 주는 자유로서 구원의 실체였다. 


그 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율법을 쫓고 살기에 자유롭다고 강변했다(33절). 하지만 예수께서는 참 자유란 그런 혈통이나 인간적 명예가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전하신 말씀을 좇아서 진리(眞理)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제자가 되고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게 된다고 강변하셨다. 그 자유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만을 전하고 있는 예수 당신이 친히 그의 사람들에게 주시고 있음을 밝히셨다(36절).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유대인들을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때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예수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고 믿을 것이었으나, 그들은 이미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 죄의 하수인들(從)이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을 그토록 미워하며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4-35, 37절). 구원의 샘물은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좇아 살 때에 마시게 되는 것임을 재확인해 주신 것이다.  


o 우리에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도록 성령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우리를 살리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다만 항상 주 예수를 신실하게 믿고, 그 말씀을 좇아 사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과 자유를 안겨 주심을 확신하며, 그렇게 살도록 전력을 다하자.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을 위한 것임도 믿자. 오직 주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 삶이 지혜요 명철임도 믿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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