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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4)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3-06-20 (화) 23:43 1년전 880  

본문) 행 16:6~15, 마28:16-20, 욘3:1-10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이다. 오늘은 마침 6.25 민족화해(和解)주일로도 지킨다. 민족 전쟁의 후유증은 7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우리 내부에서 이런 분단의 아픔과 장벽을 악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챙기며 살려는 인사들도 제법 많다. 게 중에는 교회의 인사들까지도 그런 흐름에 편승하여, 동족을 원수시하며,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언행을 일삼는다. 평화의 주역이어야 할 자들이 분열과 분쟁의 주역으로 타락한 모습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온 세상 만민을 품으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주이시다. 이런 흐름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구원은 오직 율법을 받은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고, 그런 율법과 할례를 받지 못한 외국인들은 개나 돼지 같은 짐승처럼 간주하였으며(행11:6참조), 그런 차별들을 무시하는 듯한 하나님의 내뻗는 손길에는 매우 저항감마저 품을 정도였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제한과 한계의 벽을 깨는 장면을 지난 주일에서 우리가 확인하였다.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로마 장교 백부장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들이면서, 주의 성령 안에서 그들이 서로 하나 되는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 넷째 주일 말씀 내용은 무엇인가? 여전히 성령이 우리의 시선을 지구촌 전체로 더 나아가게 하신다.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라는 분부의 영역에 직접 동참케 하시려고 하신다. 


서신서에서는 선교사 바울의 활동을 아시아의 영역에서 유럽에로 확장시키고 계심을 보여준다. 새 대륙으로 예수의 복음을 펼치게 하신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백성들이 되게 하는 임무를 부여하신다. 특히 요나서는 가히 혁명적이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적성국가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번째 명령이었다. 이는 원수까지도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신 일이라 새롭다.


결국 서신서는 선교의 영역을 제시하였다면, 복음서는 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예언서에서는 그 선교의 대상의 범위와 폭을 밝혔다. 특히 요나가 받은 지역은 우리가 보면 북한의 평양과 같은 곳이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항상 적개심과 공포심과 미움과 배제할 마음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기에, 선지자 요나는 처음엔 아예 멀리 도망하려고 다시스(스페인)으로 가는 외항선을 타면서, 온갖 시련을 당하기도 하지 아니하였던가? (욘1-2장 참조).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선교의 활동들의 주역은 전적으로 성령이시다는 점이다. 언제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도 성령께서 정해 주시고, 가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도 성령께서 채워주신다(20절,하). 인물 선정과 과제 부여, 그리고 그가 그 일을 감당하는 모든 제반 일까지도 성령이 직접 인도하신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믿음과 순종이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다 그 분의 손아래에 있다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선교인은 세상 만민과 만물의 주인은 우상들이나 권력자들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시다는 점을 선포해야 하고, 그의 백성의 자리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전해야 하며, 그의 백성들이 되어서 그들에게 제공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의 복을 받아 누리도록 안내해야 한다. 우리 남북한 모두도 이런 성령의 부르심에서 응답할 때, 하나 될 수 있다. 확인하자. 우리는 과연 이런 성령의 부르심에 어떤 태도로 응답하며 살아가는가?   


1. 서신서 / 행 16:6-15 / “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본문은 아시아에서 열린 복음의 문이 어떻게 새 대륙인 유럽의 땅 그리스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선교자 바울에게 두 개의 외부의 청원(요청)들이 있었다. 


하나는 환상(幻想)을 통하여 만난 그리스 북부지역의 마게도냐 사람의 청원이다. 그는 갈 선교지를 찾고 있던 바울 일행을 향하여,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했다(9절). 그 바람에 바울의 선교 행보는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들어가게 된다. 유럽 대륙의 선교에 들어선 것이었다. 


또 하나의 요청이 있었다. 마게도냐의 북부인 빌립보에 들어갔을 때, 안식일에 강가에서 만난 여성 루디아의 간곡한 요청이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15절)라며, 자기 집안을 선교의 장으로 개방하는 바람에, 빌립보 교회의 터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터어키의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주 장사로서, 빌립보와의 무역업을 하면서 자색 옷감 장사를 했는데,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 일행의 선교를 밑받침하게 한 것이다.  


1) 터어키 내 아시아 지역에서의 바울 일행의 당시 선교 여정은 순탄치 못했다. 부르기아-갈라디아-비두니아 등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가려고 했으나, 주의 영이신 성령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6-7절). 이는 무슨 말인가? 그곳에서의 모든 선교 일정이 순탄치 못하여 힘 들었음을 말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들어갔다(8절). 거기에서 밤에 바울은 환상을 보았는데, 한 마게도냐인의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을 들었다(9절). 


2) 바울은 그 요청이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을 도우라’고 지시한 명령으로 간주하면서, 마게도냐 행을 결심한다(11절). 선편을 이용하여 이튿날 유럽의 땅 네압볼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곧장 빌립보에 들어갔다. 그곳은 마게도냐의 첫 성이자 로마 식민지 땅이었다(11-12절).  


3) 몇 일 후 안식일이 되자 기도처를 찾는 도중에 바울 일행은 문 밖 강가에 모인 여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데, 그 중에 자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를 만난다.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시면서 그가 바울의 말을 따르게 된다(13-14절). 결국 루디아의 요청으로 그녀의 집을 찾은 바울은 그와 그의 집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동시에 ‘자기의 집에 머물라’는 강권을 하면서, 바울 일행의 빌립보 선교를 도왔다. 이는 빌립보 선교의 거점이 마련된 것이며, 교회의 기반까지도 구축된 것이다. 아니 유럽을 향한 성령의 선교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었다. 


2. 복음서 / 마28:16-20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본문은 앞에서 사도 바울이 왜 해외로 선교를 하며, 자신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었는 지 그 원인을 설명하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께서 마지막 분부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온 세계 민족들을 상대한 선교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 확인 증표로서도 물세례를 주도록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주님의 명령을 지상대명(至上大命)이라고 하여,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도 부른다.  


1) 열한 명의 제자들(가룟 유다가 빠진)이 예수께서 지시하신 갈릴리의 모처(산)로 모였다(18절). 거기에서 예수를 뵙게 된 제자들은 주님께 경배를 드렸다. 그 중에는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17절). 하지만 그 자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분부를 내려주시는 현장이었기에,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주님의 말씀을 유훈으로 받아야만 했다.    


2)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는 자신에게 하늘 아버지로부터 부여된 권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절대 필요한 담보(擔保)가 될 수 있는 자원이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큰 재산이아 권력이나 군사력 같은 물리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였다18절). 일종의 하늘과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것이 제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받아서 선교에 나아가라는 뜻이었다.


3) 먼저는 ‘가라’는 파송(派送)이었다. 어디에 누구에게 인가? 그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19절,상). 복음과 예수를 모르는 모든 세계의 민족들이었다.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을 예수의 제자(弟子)로 삼는 일이다. 선교(宣敎)의 일이었다. 먼저 선교를 받았기에, 이제는 선교하러 세계 처처로 나아가라는 지시였다. 물론 인간들이 선교의 우선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인간들만이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몸담고 사는 모든 삶의 영역(領域)이나 환경(環境)도 그 대상들이다.   


4) 그 선교의 방법(方法)도 제시하셨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자 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는 일이다(19절,하). 세례는 그가 죄를 회개하여 씻어내고 예수의 가족이 되었다는 일종의 입교(入敎)의식이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이들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형제자매로 인식하고 영접해야한다. 그들 모두는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의 일원이 된 것이며, 그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요18:37 참조). 


5) 아울러 모든 세례 교인들은 그가 진리의 세계에 입문한 존재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기에(11:27참조) 그때부터 하늘 양식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그의 생활을 이끌어 가도록 말이다(20절). 그 방법은 다섯 가지이다. 듣고, 읽고, 배우고, 암송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이런 과정을 훈련시켜서 그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 

  

6) 그런 거룩한 직임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분명한 최후의 약속을 주셨다. ‘당신이 그런 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20장,후). 바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약속을 부여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현존을 말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은 아무나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제자 사역을 감당할 자들에게 해당한다. 이런 거룩하고 차원 높은 뜻을 받들어, 우리 교단의 한신대학교는 그 배지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내걸고 있기도 하다. 


3. 예언서 / 욘 3:1-10 /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내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도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상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원수 국가에게도 당신의 통치와 지배를 수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시도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특히 본문 욘 3장은 당신의 명령을 거스려 도망하던 요나를 돌려 세우셔서, 두 번째로 요나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신 곳이다. 이런 조치는 성경에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동이다. 당신이 얼마나 죄인들의 회개에 의지를 강하게 갖고 계시는 지를 보여주신 일이었다. 


1)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로 ‘일어나 저 큰 성읍 나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1-2절). 이는 요나가 처음 그 명령을(욘1:1-3참조) 받았을 때, 그 지시를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하면서 겪었던 부끄러운 일들에 대하서 깊이 회개한 바 있었는데(욘2장 참조),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으신 후에 이번에 또 다시 동일한 선교 명령을 요나에게 내리신 것이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었다.  


2) 니느웨는 어떤 곳인가? 당시 세계적인 대제국인 된 앗수르의 수도였다. 나중에 가장 잔인한 제국의 상징이 된 나라였다. 본문의 상황만으로는 그 직전의 니느웨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요나에게 니느웨는 절대 외면하고 싶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니느웨는 사흘 정도 걸을 만큼이 되는 60-80km 정도의 거리로 보였고, 지름길로는 약 5km로서, 인구 밀도도 높았던 대도시였다(3절). 


3)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며 외쳤다(4절). 사흘의 몫을 하루만 감당하였을 뿐이다. 왜 회개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니느웨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회개와 돌아옴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기대가 반영될 것인가?   


4)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 순식간에 발생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운동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의 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 금식을 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악행을 금하며 재위에 앉았다. 심지어 짐승까지도 완전 금식을 시행했다. 그러면서 혹 자기들의 이런 행위를 보신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그치셔서 멸망을 면케 하실 줄 기대하였다. 실로  국민적 회개에 들어간 것이다(5-9절 참조). 그걸 기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된 순간이다.  


5) 이를 보고 기뻐하신 하나님은 즉시 당신의 재앙 심판에 대한 손길을 거두셨다(10절).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이 회개하면, 그것을 기뻐하셔서 즉시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참 모습을 온 세상에 보이신 것이다. 선교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o 성령은 온 세상 만민들이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거기에는 경계란 없다. 인간들이 쳐 논 각가지 장벽들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선교자들 스스로가 가부를 결정하는 일도 용납하지 못하신다. 


우리의 니느웨는 어디일까? 가장 원수 같고 적성국가와 같은 대상은 누군가? 그게 만일 북한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 요나처럼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갈 것인가? 그 분의 명령이라면 가야할 일이다. 주님은 임마누엘로 분명히 거기에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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