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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04-26 (수) 00:10 10개월전 260  

본문) 요 21:1~14, 사63:7-14, 행 13:26-35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부활절기도 어느 덧 한 달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부활 신앙도 그만큼 자라고 있는가? 봄을 맞이한 모든 생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무성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도 성장하거나 성숙해져야 할 터인데, 우리의 영적 상태인 속사람은 어떠한 지 궁금하다. 사실 모든 생명체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라고 성장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게 정체될 때, 그는 이미 낡은 존재가 된 것이다. 세칭 ‘꼰대’로 전락하게 된다. 


마침 오늘 말씀은 부활 신앙이 안겨 줄 삶의 유익과 풍요에 대하여 집중해서 말해준다. 만일 우리가 건강하고도 참된 부활 신앙을 보유(保有)하고 살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정말 크고 깊고 넓고 장구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서가 전한 복음 증거의 핵심(核心)이다. 이것은 그만큼 부활신앙에는 우리의 영원한 삶을 결정지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 담겨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왜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절대 중요하고, 또 반드시 보유하고 살아야 되는 지를 알아야 하겠다. 성경 속에는 대략 15종류의 성격을 가진 신앙 유형들이 있다. 내가 연구한 바로서는, 창조신앙, 언약신앙, 선택신앙, 해방신앙, 섭리신앙, 구속신앙, 첫 열매신앙, 화육신앙, 고난신앙, 부활신앙, 승천신앙, 재림신앙, 종말신앙, 은총신앙, 그리고 영생신앙들이 있다. 이런 신앙들은 모두 큰 집을 받쳐줄 기둥들이다. 


이 중에서 부활신앙의 위치는 어떠할까? 생명을 열어준 신앙이요, 죽음-어둠-불의-거짓은 빛과 진리와 정의를 이길 수 없음을 확증해준 승리의 신앙이요, 특히 인간에게 최악의 위협 세력인 사망의 한계를 폭로시킨 신앙이요, 그 승리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님과 마찬가지로 다시 살게 될 것을 믿게 한 신앙이다. 그러기에 이 신앙은 모든 신앙들 중에 최고봉(最高峰)이랄 수 있다. 성경 전체도 바로 이 부활의 빛으로 쓰여졌다. 

  

그런데 이 신앙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선언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부활신앙에 들어서면, 우리는 곧 승천신앙을 만나게 된다. 그 다음은 재림 신앙에 이르게 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종말 신앙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리고 하늘 시민권자가 되어 삶을 긍정하며 감사하며 사는 은총 신앙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생 너머에 있는 새 하늘 새 땅을 나의 본향으로 알고 그곳을 대비하는 영생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해준다. 

 

부활신앙은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로운 영적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에, 우리는 반드시 제대로 된 부활신앙관을 갖추고 살아가야 된다. 명심하자. 부활신앙의 기초가 든든한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을 이긴다. 그 어떤 환란과 시련에도 극복해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계속해서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들의 영혼에다 부활신앙을 든든히 세우려하시기 위함이다. 이 부활 신앙 없이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확고하고도 분명한 부활신앙인들이 되도록 집중하심을 보여준다. 그를 위해 어떤 지점에서 주의 백성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루는 지도 전한다. 아울러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러기에 그런 죽임당한 아들을 살리셔야 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통하여, 그의 부활신앙을 공유한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보상이 주어질 것인지도 말씀해 준다. 


복음서에서는 무엇에서 제자들이 뒷걸음질 쳤는지, 그리고 그들을 찾으신 주님은 무엇으로 그들을 다시 세우셨는지를 보여준다.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무한히 받고서도 타락하여 큰 홍역을 치루게 된 연유와 함께, 그 질곡을 어떻게 극복해 냈는지도 찾아보게 한다. 서신서에서는 선지자의 말을 알지 못한 체 갖게 된 잘못된 메시야관과 부활관이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음을 말해주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고하신대로 아들을 살리셨음을 말한다.  


이제 이 말씀들에 담긴 인간의 불신과 무지로 인한 퇴행적 행태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긍휼로 그들의 신음과 탄식에 귀 기우리셔서, 끝내 찾아와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만나보자.


1. 복음서 / 요21:1-14 /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신 모습이 세 번째로 올라와 있다. 장소는 디베랴 호수가 인데, 이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이 갈릴리 방문은 이미 무덤 입구에서 천사들을 만났던 여인들을 통하여 전달된 것이었지만(마28:10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이 전하는 이곳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예고를 받았던 흔적은 거의 없다. 특히 제자들은 이미 두 번의 직간접 주와의 만남의 경험들이 있었어도 그랬다(요20:1-10, 20:19-31참조). 


두 번째 때에는 제자들 전체가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도 있었고, 평화와 기쁨도 맛보았으며, 파송의 분부도 받고 친히 전하신 성령도 접했다(요20장). 그런데도 지금의 이곳 분위기는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의 모습과도 흡사했다(눅24:13이하).. 그것은 그들 7명이 예전의 갈릴리 생업 현장에로 되돌아갔고, 거기에서의 활동 모습에서도 예수님과의 만남이나 기다림 역시 보여주지 않았다. 실로 제자들 모습도 퇴행적이었고, 설렘이나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이 긴가민가한 수준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하다는 인간 상식논리에서 제자들이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 상식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을 통한 세상 복음화와 구원사역은 절대로 추진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 부활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증인들인데-, 그런 그들이 무기력에 머무는 한, 어떠한 창조적 새 역사도 절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 수준의 제자들에게는 반드시 더 강하고 확실한 부활신앙이 보강되어야만 했다. 보다 강력한 믿음의 동력(動力)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 문제 해결은 제자들 스스로의 힘이나 의지로서는 될 수 없었다. 오직 부활의 당사자이신 예수께서 주도적으로 그 사태 해결을 이끌어 해주셔야만 했다. 본문은 그런 점을 잘 살피신 예수께서, 직접 그들 삶의 현장을 친히 찾아 주셔서, 문제해결을 이끌어 주신 상황을 전한 곳이다.   


1) 그곳에는 7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2절). 시몬 베드로-도마-나다나엘-야고보와 요한-또 다른 제자 2인이 그들이었다. 대부분 그곳 갈릴리 출신들인 점에 인상적이다. 나머지 제자들의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서학자들은 그들 7명이라는 숫자가 지닌 완전성을 평가하면서, 초대교회 7교회들을 대표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한다(계1:11-참조). 그 모임의 주도자는 베드로였다. 그가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나서자, 모두가 따라나섰기 때문이다(3절).  


2) 그곳에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셨다. 제자들은 그 누구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은 밤샘하면서 물고기 잡기에 실패하고 지친 그런 제자들과의 만남을 주도하셨다. 그 때 주님이 당신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취하신 방법들은 두 가지였다. 그 내용은 제자들 모두가 예전의 기억들을 쉽사리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5-13절 참조). 

 

첫째는, 제자들 대부분을 부르셨던 방법의 재현(再現)이었다. ‘제자들이 밤새토록 고기를 못 잡은 모습을 보시면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지시하셔서, 순종할 때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게 한 일이었다. 이는 시몬 베드로 형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주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이었다. 그 일로 제자들을 얻어내신 주님이었다(눅5장). 


그러자 그 중에 영적 감각이 아주 빠른 제자 요한이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일깨워 주었다. 그러자 뒤늦게 알아 챈 베드로가 겉옷을 찾아 입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7절). 이 장면은 마치 저 무덤 앞에서의 그 두 제자가 반응했던 모습들이 갈릴리 그곳 현장에서도 지금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상황 파악에 빠른 요한, 행동에 빠른 베드로의 모습 말이다. 그 바람에 배의 제자들과 육지의 주님의 거리인 약 90m(50칸)가 급속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둘째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방법을 재현하셨다. 당신이 떡과 생 선을 준비하셔서 피곤에 지친 무리들을 먹이시던 방법이었다(9-10,13절). 그 일은 주님이 온 유대 전국에서 왕으로 추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한 기폭제가 되기도 한 사건이었고, 당신이 이 세상에 생명의 떡과 양식으로 오신 분임을 알리신 사건이기도 했다(6:1-15,47-48 참조). 이런 기억과 회상을 통하여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신 일은 다음의 중요한 의미들을 품고 있었다. 


부활 이전의 당신과 부활 이후의 당신은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심과 함께, 그러기에 부활하신 당신은 이전에 보여주셨던 보내시고 먹이시는 메시야의 사역들 그대로를 앞으로도 계속하실 것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 몫은 이제 당신이 보내실 보혜사 성령과 함께, 당신의 양육을 받았던 제자들이 맡아서 감당해 갈 것을 고지하는 뜻도 담고 있었다.  


2. 예언서 / 사 63:7-14 / “ 백성이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이 한 순간 하나님을 반역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등의 타락의 길에 빠져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고통에 빠져든 일과, 그런 곤경을 어떻게 빠져나와서 다시 위로와 영광의 길로 회복되어 살게 되었는지를 함께 전한 내용이다. 이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의 어둠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10절), 이스라엘이 예전에 누렸던 삶과, 그것을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삶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1) 여기에서 중요한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저버리고 그의 성령을 근심되게 하였느냐에 있다(10절). 이들의 모습은 대체로 평소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데에도, 하나님께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종의 무심중에 타락에 빠져든 것이다. 어찌 그 일들이 가능할까? 이 점을 깨닫는 데에서는 신명기의 가르침이 매우 도움을 준다.   


①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을 계속할 때 온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질투는 사랑 때문에 나온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데, 내가 하나님보다도 세상 것 사랑에 더 빠져들 때,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당신의 경고를 보내시게 된다. 당연하다. 그러기에 성경은 강조한다(6:15).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God First!‘- 이 질서를 지켜야 산다. 


②내 소유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이 시들게 될 때, 타락에 빠져 든다(28:47참조). 우리는 없어서 보다는 너무 가져서 탈선하고 타락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라. 매사에 빈곤하고 필요할 때에는 채우려고 매달려 산다. 하지만 일단 갖추고 살게 되면, 나태와 풍요에 빠져서, 감사-기쁨-찬양에 게을러진다. 있는 것 보수하려고, 더 욕심을 내고 주변의 힘없는 이들을 돌보는 일을 소극적이 된다. 이런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이 된 사람이다. 따라서 항상 깨어 살지 않으면, 가진 것 때문에 망하게 되는 점을 명심하라.  


2) 회복의 방법은 이렇다(11-14절). 예전의 자신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늘 갈망하면서, 회개하고 그런 주님을 계속 찾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은 즉시 징벌의 손길을 멈추시고, 용서와 회복의 새 아침을 안겨 주신다. 본문에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신 하나님이 이제 어디 계시냐?’(11,13절). 그 외침과 그 음성이 여러분에게서 들릴 때, 주님은 회복과 영화를 베푸신다. 


3. 서신서 / 행 13:26-35 / “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관리들이 예수와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여 달라 하였으니 ”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당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던 예루살렘 사람들과 그들 관리들의 예수와 선지자들이 증언한 말씀들에 대한 무지(無知-알지 못해서)에서 나온 것임을 통렬히 지적한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의 어떤 부분에서 그토록 무지했던가? 


첫째는 그들 유대 교도들은 하나님의 인간되심, 즉 성육신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보았다(요10:33). 그러기에 인간되어 오신 하나님 예수를 거짓 선지자로 보면서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활도 당연히 원천적으로 부정하였다. 둘째는 그들의 메시야관이 완전히 정치적 관점에 집중되어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대속적인 사랑과 화해와 용서 차원의 구원의 장으로서의 죽음도 철저히 외면하였다. 그들은 정말 예수가 메시야로 왔다면, 당연히 강한 힘으로 로마제국을 그들의 땅에서 물리치는 힘의 구원자여야만 했다.  


하지만 만일 예수께서 유대인의 그런 메시야관에 따른 인물이었다면, 그는 누구였을까? 유대인의 영웅이었을지 모르나, 세계 만민의 구세주나 평화와 진리의 왕인 메시야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완전히 새롭게 만난 것이다.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죄인으로 매도하면서 십자가에 죽였으나,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무죄하시기에 죽음에 버려두실 수가 없어서 다시 살리신 것을 보았다(33-35절). 예수께서 참 모퉁이 머릿돌이심을 알았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 되심을 외치는 자가 되었다. 


o 나의 현재의 부활신앙은 어떤가? 미지근한가, 아니면 역동적인가? 확실한 것은 나의 부활신앙은 계속 자라야만 한다는 점이다. 부활신앙은 나와 모두를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 말씀을 더욱 배우자. 믿음을 강화시키자. 영생으로 나가가게 하는 부활신앙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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