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5~8, 마 1:18-25, 요일 4:13-21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절기 마지막 주일이면서, 성탄 직전주일이기도 하다. 오실 그 분을 간절히 고대하면서, 우리 교회들은 그를 환영하는 네게의 촛불을 밝힌다. 우리 교회의 선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외쳤던 마음의 고백을 함께 외치자. ‘마라나타,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사실 오실 분은 우리 모두가 잘 안다. 우리의 왕(王)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는 편협하고 치우쳐서 오직 자기 사람들만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왕이 아니시다. 패거리 두목이나 골목대장 노릇이라 하려고 오셨던 분이 아니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앞장 선 인간들까지도 불쌍히 여기면서, ‘그가 몰라서 그러하오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죽으신 그런 왕이시었다.
그러기에 그는 인류(人類) 모두의 왕이 되신 것이다. 그러기에 힘없고 미련한 사람들은 그런 왕을 고대하고 사모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들의 미련함과 어리석음도 용납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왕들은 그를 생각하면, 많이 불편할 것이다. 자신들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큰 품과 사랑이 오신 왕인 예수에게는 넘치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갈 수 없음을 알면서, 그러기에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신에 대한 심판자인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 인류의 참된 왕을 우리나라 대통령이 조금만이라도 본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지는 계절이다. 특히 그는 선거 때부터 손바닥에 왕(王)이란 글자를 새기고 다닌 인물이었다. 정말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전제 국가의 왕이 자신에게는 더욱 맞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는 왕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이나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요즈음의 그의 처신을 보면, 참된 왕이신 예수를 배워도 많이 배워야 될 같다.
요즈음의 우리나라는 중심을 잃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에 그렇다. 한쪽으로만 배를 몰아가는 선장을 보았는가? 그 배와 거기에 탄 승선자들의 운명은 어찌될까? 우리 대한민국이란 배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선장의 자리에 앉은 그 동안의 대통령의 행보가 그 대답을 해준다. 한쪽 손만 쓴다. 양쪽의 균형 정치를 잃고, 자기 장기 자랑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노동자들을 대하는 언행은 적을 대하듯 한다. 완전히 부자와 기업가 중심으로 옮겨 갔다. 158명의 이태원 참사 유족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정말 왕이나 대통령답지 못하다. 야당이나 정치적 반대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정치는 공의와 정의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기와 다르면 모두가 적이고 고발 대상으로 몰고 간다. 게다가 자기들 내부 비리에는 완전 모르쇠이다. 이건 대통령의 품격이 아니라, 여전히 수사관인 검찰총장의 모습뿐이다. 이런 어긋난 행보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지금 또 다시 후진국의 나락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우리에게는 제도권의 대통령은 있으나, 진정한 왕 같은 대통령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간절하게 기도해야할 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배우는 우리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만일 그런 길을 거부하면, 그런 참된 왕 예수의 길을 좇아갈 새 대통령을 우리에게 세워달라고 기도해야할 계절이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왕, 민의를 제대로 대변해 줄 지도자가 꼭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금년의 대림절과 성탄절은 참 왕되신 주님이 더욱 기다려지는 때이다.
구약의 예레미야서는 오실 메시야의 보다 구체적인 인물 소개를 담고 있다. 다윗의 자손으로 왕으로 오시며, 세상엔 정의와 공의를 펼치실 것이고, 무너진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를 통하여 구원과 평안을 회복할 것을 예고해 준다. 복음서에서는 그 예고대로 아기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후손으로 오시는 장면을 전한다. 다만, 그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것이어서, 그 아기의 구원의 역사가 임마누엘이라는 특별한 역사로 펼쳐질 것을 예고하였다.
서신서는 아기 예수를 잉태케 하셨던 성령이 그의 새 백성들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하시면서 새롭게 형성된 성도들 모습을 증언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데, 하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시인을 하는 일이며(15절), 또 하나는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는 일이다(16절). 이 성령에 의한 변화를 받으면, 그의 마음이 열린 마음이 되면서, 형제자매까지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 나아가게 됨을 전한다(20-21절).
1. 구약 / 렘 23:5-8 / “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 ”
이 말씀은 유대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여호와는 우리의 공의) 때에 나온 예언이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으로 몰아넣은 불행한 왕의 시대를 보내면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뜻밖의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물론 유대와 온 백성은 혹독하고 잔인한 70여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수형(受刑) 생활처럼 감내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너머의 시대를 선하게 이끄시겠다는 계획을 이렇게 표명하신 것이다.
1) 여기에서 여호와는 당신이 보내실 인물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물론 그 오실 때는 여호와께서 정하시지만, 그 출신(出身)은 이스라엘의 유대지파의 다윗 왕 후손의 몸으로 보내시겠음을 분명히 하셨다. 여기에서 ‘가지’란 히브리말은 ‘싹’을 말한다(슥3:8, 6:12). 후손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오실 분의 신분(身分)에 관하여서도 예고하셨다. 바로 왕(王)이셨다(5절). 그의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정의(正義)와 공의(公義)의 정치를 펼치실 분이셨다.
2) 이런 예고 속에는 그를 사모하며 고대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이고 희망이지만, 그러나 그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에게는 가장 미워하고 시기할 대상의 출현이 된다. 세상과 나라에서 왕은 오직 자기뿐이라는 좁은 생각을 고집하는 자들도 이런 왕의 오심을 환영할 리가 없다. 헤롯처럼 죽이려 들게 된다. 뿐만 아니다. 불의와 거짓과 탐욕으로 자기 자리와 영역을 구축하고, 사욕을 챙기며 살아온 자들에게도 그런 왕의 오심은 큰 부담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오실 메시아는 세상 현장에서는 수난(受難)의 종(從)의 삶을 피할 수 없다(사53장 참조).
3) 하지만 그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오시는 새 왕은 구원과 평화를 안겨 줄 구세주이시다(6절).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오실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지만, 이 예언을 받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자기들에게 귀국을 허용한 바사 제국의 고레스 황제로 볼 수도 있었다. 고레스가 열린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귀국할 것을 허용한 일은 전적으로 신의 선물처럼 간주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사45장 참조). 너무 파격적인 은혜의 선물이어서, 이스라엘은 그 때부터 출애굽을 허락하신 하나님보다는 바벨론의 귀환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 우선하여 고백하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7-8절 참조).
실재가 그랬다. 바벨론 귀환 사건은 이스라엘의 민족 분열의 숙원도 풀어준 사건이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모두 한 때 서로 분열된 형제들이었고, 서로 미워하고 등 돌리었던 형제였으나, 이 고레스 칙령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 되어 구원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들의 고백도 일치를 이룬다. 무슨 고백인가?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Righteousness)이시다’ 이런 놀라운 고백이 우리 분단과 분열의 아픔 속에 있는 남북과 교회들에게서도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2. 복음서 / 마 1:18-25 / “ 다윗의 자손 요셉아 내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
본문은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아기 예수 탄생 사건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특이한 이 탄생 이야기는 오실 왕이 남자의 씨를 받아서 태어난 이가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잉태되어 오셨다는 점이다. 전무후무한 동정녀(童貞女) 탄생으로 오셨다. 그런데 어머니인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이기도한 요셉이라는 젊은이와 약혼 중이었으나, 서로 동거하지는 아니한 시점에서 이렇게 성령으로 잉태된 일이 발생한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모로 선택하신 요셉과 마리아는 이때부터 각자의 위치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기에 오실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리라는 예언을 성취한 인물이 되었다. 오실 분이 왕으로 오시리라는 점도 밑받침 했다(렘23:5). 게다가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인격도 훌륭해서 약혼녀 마리아에게 발생한 일(불미스러운 일)을 조용히 끊고자 했던 인물이었다(19절). 하지만 그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사정 이야기를 전하면서 낳을 아기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까지 듣자, 그는 그 분부를 좇아 순종하면서 아기 예수의 진실한 양부(養父)가 된다(20-25절 참조).
- 어머니 된 마리아의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지만(사7:14),
신학적으로 이 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 되시기에 매우 적합하고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그 까닭은 예수가 동정녀 탄생이어야만 무흠(無欠)한 존재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 그가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대속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자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본래 더러운 죄인은 또 다른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구원자 예수님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란 이름으로 오신 증언은 성경에 오직 이곳뿐이지만, 그러나 8-9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반 행위는 왜 그가 임마누엘이신지를 잘 입증해 준다. 그리고 그의 예수님의 성령 탄생은 성령의 생명 창조의 능력과 함께, 그가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 까지도 들어가 변화를 견인하시고, 그것도 집단적 접촉까지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임마누엘의 주되심을 입증할 충분한 내용이 된다.
오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지난 주일에서 증언됨). 성령만이 인간이 쳐 논 제약과 한계와 차별을 무효화시키고, 그 경계선을 자유롭게 남나들게 하면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는 그 영의 힘이 평생 함께 하였다.
3. 서신서 / 요일 4:13-21 /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하나님의 세계와 세속 인간과의 연결고리는 역시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고 보혜사이신 성령은 결코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에만 전념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성령 세례를 받으면, 그 안에 아버지가 거하시고 아들이 거하는 존재가 된다. 사도들, 곧 예수의 제자들은 그런 모습을 직, 간접으로 목격하고 배우며 전하면서 살아왔다.
1) 자신들도 보혜사 성령을 받게 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하였다. 이는 오직 예수가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목자임을 확인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줄로 알았다(요3:16). 아니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신 줄 확인했다(요일3:16). 따라서 그를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도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주가 되시는 모습도 확인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사랑으로서, 우리 죄인된 인간들에게 먼저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인간에게 사랑을 먼저 받고 고마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죄인인 우리들에게 먼저 베풀어주셔서 나온 사랑이었다(19절). 그러기에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누구나 놀라운 충격과 함께 변화를 받는다. 자신의 마음에 도사려 있는 미움의 감정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자신도 받은 사랑에 응답하려는 새 마음을 품게 된다.
3) 성령은 결국 사랑하게 하시는 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들과 세상도 사랑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담을 쌓고 지내온 삶과도 청산하고 회개하게 되면서, 이웃 사랑을 펼치는 사랑의 전도사로 나아간다. 성령 안에서 맞는 성탄이어야 한다. 대림절은 바로 변화된 우리들의 모습, 즉 원수 된 이웃까지도 사랑하며 살려는 우리의 변화되고 준비된 밝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때여야 하겠다.
o 진리와 평화의 왕이시자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문밖에까지 오셨다. 이 왕은 분명히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들고 힘없는 자들의 왕이시다. 제발 대통령이 저 낮은 곳에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개신교 지도자들과의 모임만 자주 갖는다는데, 보수교단 인사들에만 치우치고, 교회협의회 지도자들은 외면하는 모습은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런 태도로서는 결코 질적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무속 신앙인들과 깊은 관계나 우상 숭배에 빠져든 대통령 부부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 모두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게 되도록 기도하자. 이 성령을 받아야만 우리는 변화를 받아 하나님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이웃 사랑도 함께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미워하고 거짓말하며 차별하는 마음들이 청산되도록 회개하자. 순수한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만 전심하는 성도가 되도록 마음을 모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