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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남신도회주일-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1-09-14 (화) 19:59 2년전 570  

본문) 사 55:6~13, 마 6:5-15, 벧전 1:13-21


O 교단제정주일 – 남신도회주일 / 한가위감사주일


O 세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당신의 세계에로의 초대(招待)의 내용들이다. 다만 그 초대하시는 대상들이 다르고, 대접하는 방법들도 다양하다. 그 주요 내용을 본다. 


1) 이사야서에서는 뭔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자기의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하나님과의 거리 두기를 유지하는 자들을 향한 ‘돌아오라’는 권고(勸告)성 초대로 보인다(6-9절). 마치 복음서에 나타난 집나간 둘째 아들과 같은 자를 향한 권고성 초대와 같은 성격이다(눅15:11이하 참조). 울 안이 아니라 울 밖에서 방황하는 양들이 그 대상으로 보인다. 


2) 복음서는 주님이 외화내빈(外華內貧)형 신자, 곧 하나님을 향한 진실성은 빈곤하나 오직 인간들의 시선만을 의식하면서 기도하고 행동하는 데 열심인 외식주의(外飾主義)자들을 비판하신다. 이들은 울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로서, 과도한 열심을 내고는 있으나 내용은 빈곤한 그런 신자들이다(5-8절). 경계 대상이기도 하다. 그에 비하여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오직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9-15절). 


3) 서신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으로 불신 세계에서 믿음의 생활 속에 영입된 새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믿기 이전의 세속 사회에서의 사욕(私慾)의 흔적들과 그 유혹의 굴레에서 벋어나는 일이 중요했다(13-14절). 그리고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자녀답게 행실에서도 거룩함의 옷을 입는 일에 중요함을 일깨운다(17절) 그리고 그의 대속을 위한 주의 고귀한 피와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를 일깨운다(18-21절). 


1. 이사야 55:6-13 / 울 밖의 양들을 부르시는 목자 하나님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형성된 정신적 문화적 엇갈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부모에 대한 자식의 트라우마(trauma)도 있을 수 있다. 부실한 부모들을 향한 자식들의 아픔과 분노와 의심은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로 인한 자녀들의 아픔과 탄식의 소리가 이 시대에도 얼마나 가득한가-? 


그런데 더 심각한 현상은, 이러한 현상이 자신이 믿는 신(神)과 그의 신자들 사이에도 형성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궁금증 차원이 아니다. 어쩌면 훨씬 더 깊이 믿고 있는 신앙인의 가슴 속에도 그런 기류가 형성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구체적 사안을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바랐으나, 결과가 전혀 자기의 생각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사람은 그 신을 향한 내상(內傷)을 입게 된다. 일종에 불신과 의심 같은 먹구름이 그의 가슴에 형성된 것이다. 그걸 그대로 두면 어찌 될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초청의 대상 중에 바로 이런 당신을 향한 트라우마에 빠진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으로서도, 매우 딱하게 간주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생각해보면, 괘심하기도 할 수 있다. 감히 전능자인 하나님 여호와를 의심하고 머뭇거리며 그의 품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께 저항의 태도를 보이는 그들은 불경죄로 물을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분문을 보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가 아쉬워하지는 모를 지경이다.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책하려는 입장이 아니라, ‘진짜 잘해 줄 터이니, 내 잔치에 오라’고 달래며 끌어않으려는 입장이시다. 어떻게 해서든 타일러서 데리고 함께 가려는 뜻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런 요청을 받고 있는 그 대상은 누구며, 무슨 까닭인가? 


바로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유대인들이다. 곧 있으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의 복역(服役)을 마치고 귀환할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이 안 보인다. 여건상 여호와를 떠날 수는 없으나, 따르기엔 왠지 힘든 분이란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그 때 자기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외로워 울 때, 여호와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라는 의문의 트라우마가 그들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못한 까닭이었다(사40:27,49:14,시137:1-4 참조). 


이 유대 백성들의 아픔과 슬픔을 왜 여호와가 모르셨겠는가! 그 때의 그들 조상들의 범죄와 악행은, 당연히 부모 되신 여호와로 하여금 가슴 아픈 매를 들게 했다. 그 때 그 순간은 자식은 맞아서 아프고, 부모는 때려서 아픈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징벌 기간이 후손 2-3세대에 이어지고 그것이 마치 연좌제(連坐制)처럼 이해가 되면서, 그 부담은 서서히 여호와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혼내고 벌주는 여호와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전혀 다른 새롭고도 긍정적인 모습들을 알려주셔야만 했다. 


특히 하나님으로서는 바로 거듭난 유대인들을 앞세워 당신의 긍휼과 자비의 은혜와 구원을 온 세상에 펼치시려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이 유대인들의 대변화가 절실했기에 더욱 그러하셨다. 그러기에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열린 마음을 적극 소개하는 일에 집중하셨다. 


1) 여호와가 그들과 가까이 계시면서 찾고 만나려고 하실 때에 어서 돌아오라고 요청하신다(6절). 

2) 조건(條件)이 하나 있다! 그들이 가던 길을 버리는 것이요 그들이 품던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 길은 악인의 것이고, 그 생각은 불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다. 

☞ 이 요구의 배경에는 그들이 여호와를 바벨론 시절의 하나님처럼 생각하지는 말라는 데에 있다. 항상 매를 드신 여호와가 아니라, 오히려 항상 복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랬다-!  


3) 여호와의 생각이나 길을 자신들의 것에 맞추려고 들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신 것이다. 주의 것은 차원과 수준과 시야에 있어서 인간들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8-9절). 


4) 여호와의 말씀은 그 확실성과 생산성과 성취성에서도 비교(比較) 불가한 능력을 보유하셨기 때문이다(10-11절). 그의 백성들을 형통으로 인도하며, 그로 인한 모든 생태계까지도 손뼉치며 기뻐하고, 생태 환경의 질적 변화까지도 유발하게 하시기 때문이다(12-13절). 



2. 복음서 / 마 6:5-15 – 외식주의자는 뒤로, 하나님과 공동체 위한 기도자는 앞으로


예수님에게 기도는 아주 중요한 하늘 아버지와의 소통할 통로였다. 그러기에 당신이 기도하시는 일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기도하는 데에도 잘못된 태도를 보이던 무리가 있었다. 바로 외식주의자들(hypocrites)의 기도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5절.상). 그리고 한 말을 되풀이하는 등의 중언부언(重言復言)의 긴 시간의 기도를 했다(7절). 


그들을 향한 주님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평가하셨고(5절,하), 이방인들이 하는 식의 기도여서,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 없다(즉 헛된 기도였음)고 평하셨다(7절,상).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단호히 명하셨다(8절). 로마의 세네칼도 이런 기도는 ‘신들도 지치게 한다’(fatigare Deos)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누군가? 아마도 잘못 배운 일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의 기도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들의 외식(형식)주의는 이미 주님의 책망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 교회들에도 열심 있는 외식주의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매우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기도 한다. 그 마음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각인시키면서, 자신의 신앙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허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따돌림을 받게 된다. 잘못 믿는 모습은 심판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런 이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올바른 기도에 필요한 기초적인 접근 방법과 태도, 그리고 기도의 핵심적인 내용에 대하여 소상히 가르치셨다. 


1) 기도할 때의 장소(위치)는 골방이다. 골방은 자신만의 방(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의 상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가 들으실 터이니까.(6절)


2) 기도의 분량과 시간은 일정하지는 않으나, 꼭 필요한 내용 중심으로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내용의 말씀을 올리면 된다. 결코 횡설수설(橫說竪說)하면서 시간만 끄는 기도는 피해야 한다. 그것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무례(無禮)도 되기 때문이다(7-8절). 


3) 주님은 기도의 모범(模範)을 제시하셨다, 바로 주의 기도문(The Lord’ Prayer)이다. 사실 이 주의 기도는 앞선 주님의 산상설교의 중심이자 핵심의 내용들을 이해하고 실행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기도문이기도 하다, 


① 기도의 첫 호칭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와 그의 이름이 거룩하심을 받는 일이다. (9절). 이런 호칭을 사용하게 하심은, 제자들의 하나님과의 위치를 독특한 관계 안으로 끌어 들이신 것이다. 제자들을 자녀란 새로운 토대위에 세우시고,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과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속에 결속시키려는 의지를 담으신 것이다. 


②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나라가 임하는 사건에서 이루어진다(9-10절, 4:17참조) 

③ 11-13절의 청원(請願)들은 제자들의 공동생활에 관한 것이다. 나날의 생계와 이 세상에서의 생존하기(11절)-, 다가올 심판에서 이겨내기(12절)에 대한 청원이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난국에서 시험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것,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것을 지켜달라고 청원한다(13절, 10:16-25, 24:3-28, 26:41참조). 13절 하반절은 악의 위험에 직면하여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으로 들린다(딤후4:18참조). 


④ 14-15절은 다시금 12절에 돌아가서, 제자들에게는 특별히 더 중요한 점인 사람을 향한 용서(容恕)와 관용(寬容)의 문제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5:23-26참조). . 



3. 서신서의 말씀 / 벧전 1:13-21 – 불신자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자를 향한 초청 


복음의 전파는 숱한 불신자들을 회개하게 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입교하게 하였다. 성령의 역사요 복음전파자들의 헌신의 열매였다. 하지만, 입교한 자들은 이제 영적으로는 신생아(新生兒)에 불과했다. 돌봄과 양육과 육성을 위한 신앙 교육들이 필요했다. 그런 지원이 없으면, 그 생명은 살아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와 목회자들의 목양 사역은 절대적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교한 많은 영적 신생아들을 향하여, 입교에 관련한 큰 지침을 제공했다. 그들의 입교에서 가장 필요로 한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게 된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진 것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다음은 그들 신생아 생명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들이다 :


1) 우선 불신자 시절에 쫓아 살던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사욕(私慾)과 단절해야만 한다(14절). 이기적인 욕망과 방법을 따라 살던 그 시절의 사욕을 완전히 버리라는 것이다. 그 대신 이제 본격적으로 본받아야할 대상이 있다. 자신을 부르신 이(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삶(holy life)을 좇는 일이다(10-16절 참조). 거룩은 불결이나 악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사6:3-5절 참조). 이를 위해 초신자는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배우듯 거룩도 배워가야 한다. 


2) 거기에 필요한 마음가짐은 이렇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께서 자신에게 가져다 줄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한다(13절). 그리고 사람을 행위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됨을 깨닫고, 이 땅의 생활을 나그네처럼 두려움으로 깨어 살아야 한다(17절). 


3) 자신의 구원은 조상의 덕으로 된 것도 아니요 금은보화로 얻어진 것도 아니다. 오직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산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고 말세에 우리 위해 다시 오실 분이신데, 그로 인하여 우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도 하나님께 두고 산다(18-21절). 



o 메시지 

마침 남신도주일이고 한가위감사주일이다. 내 신앙의 현 주소를 세 본문의 경우를 중심으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회 방황하는 영혼이 아니고, 겉치레 신자여서도 안 된다. 항상 신앙의 첫 사랑을 보전하고 유지하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사욕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야 하고, 모든 행실에서의 거룩을 실천하며, 최후에 안겨주실 큰 은혜를 사모하며 살자.  확실히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요, 가까이 계셔서 그를 찾을 때이다. 주께 더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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