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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8-24 (화) 19:50 2년전 378  

본문) 약 5:13-20, 왕하 5:1-14, 막 5:1-12 


강림 후 열 넷째 주일이다. 이번 성령강림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하지만, 그래도 우리 지구촌에 백신을 개발하고 보급하게 해주셔서, 치명적인 위기를 넘어가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직 넘어가야할 고갯길은 높고 험하지만, 그래도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 날씨는 확실히 여름을 넘긴 듯하지만, 올라오는 가을 태풍(오마이스)이나 장마 소식도 있기에, 여전히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이게 곧 우리의 인생살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아프카니스탄 소식에 가슴이 아프다. 미군의 전격적인 철수로, 그간 쫓기던 무장 테러조직인 탈레반이 기세를 회복해서, 수도 카불까지 무혈점령하여 나라를 접수하는 진풍경이 발생한 것이다. 워낙 잔인하게 사람들을 총살하고 학살하는 집단의 집권이라서, 그곳을 벗어나려는 수많은 아프칸 난민들로 인한 대혼란은 이제 세계인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여성과 아이, 그 중에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존문제가 큰 걱정거리가 됐다. 


이런 일을 겪다보니, 오랜 세월 미국의 보호망에서 지내온 우리나라의 처지를 두고, 우려하는 시선들도 많은 듯하다. 미군이 떠나면 한반도는 어찌 될 것인가라는 염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기우(杞憂)라 본다. 우리는 지금 미국 없이도 충분히 자립. 자급, 자족할 국가로 성장했고, 특히 우리는 더 힘겨운 나라들을 지원하고 협력할 정도로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제일 과제인 북한과도 우리는 함께 하나 되어 살아갈 역량을 발휘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와 민족이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영세중립국가로 나가면 좋은 곳이다. 세계 4대 강대국들(미일중러) 틈새에서 그 어디에도 의지하고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6.25민족 전쟁을 치루면서, 미국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가 운명처럼 엮어져 있다. 그러면서 지난 70여년 우리의 미숙한 역량 때문에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체, 대미(對美) 의존사상에 기울어져 지내왔다. 특히 극우세력들은 늘 성조기를 휘달릴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적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안겨주셨다. 바로 코로나19란 판데믹으로 인하여, 세계 최강대국들이 휘청거리며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 준 동안에, 우리 대한민국은 K-방역 모범국가로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인 우월한 국가의 수준을 드높이는 계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개발국가들의 추천과 함께 미국을 비롯한 G-7국가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선진국(先進國) 대열에 공히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개발도상 국가들의 우리를 향한 요청이 주목할 만하다. 


한국이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서, 자기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교량 역할을 잘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야말로 이곳과 저곳의 형편을 잘 살펴서, 세계를 하나 되고 균형 있는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의 변방(邊方)의 하나가 아니라, 내용상에서 중심(中心)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듯, 요즘 대통령의 외국 정상들과 나누는 인사 속에는 그 넓은 가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의 기술을 선진국들과 나눌 것이며, 동시에 그들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약소국들을 지원하는 일에도 앞장서겠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같은 위기에, 자기들만 살기에도 힘들어하는 시대에-, 힘들고 고통하는 이웃(국가)들에게도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과연 누가하겠는가? 유일하게 우리 대한민국이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지금 예상 밖의 하늘의 축복들을 누리고 산다. 하나님의 기뻐하실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난과 시련을 잊지 않고, 그 시기를 벗어난 일을 감사함과 동시에, 아직도 그런 빈곤에서 탄식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도우려고 하는 태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자세이다. 조금 형편이 좋아지고 부자가 되었다고 옛적의 때를 망각하고 교만해져서 약자를 무시하는 부류가 아닌 것이 엄청 자랑스럽다. 그러기에 이때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 예수님을 다시 본다. 성서의 모든 기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구세주(救世主)란 공식적인 호칭 이외에도, ‘모통이 머릿돌’이라고도 입을 모은다.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서로 갈라져서 도저히 인간적으로 화합하고 하나 될 수 없는 두 계층의 틈새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십자가의 몸으로 그 공간을 채우셔서, 서로가 교통하고, 왕래하게 하며, 하나 되게 하는 디딤돌이요 다리가 되셨기 때문이었다. 신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높은 담을 허무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 대한민국 한민족의 설 자리도 보인다. 변방이 아닌 세계의 중심 민족으로 존재하려면,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그들을 위하여 제사장적 위치를 공고히 하며 살아가려는 자세와 마음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축복할 자 축복하고 격려할 자 격려하며, 저들 모두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가는 따뜻한 가슴과 품을 키워가는 민족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BTS와 같은 지혜를 발산하면 된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은 매우 유익한 메시지를 준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게 세상과 이웃에 ‘공감(共感)하는 능력을 가진 공동체’를 요구하신 것이다. 무엇으로 공감하나? 기도(祈禱)와 찬송(讚頌)으로 한다. 서신서 첫 절을 보자. -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13절).  

 

사실 코로나 이후의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떤 시련과 역경이 와도, 여전히 일어나 빛을 발할 교회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대체 어떤 교회가 생존하게 될까? 바로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공감 능력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들이다. 오늘 본문들은 그런 측면에서, 생존 가능한 교회 공동체와 불가능한 교회 공동체를 함께 소개한다. 


o 기도(祈禱)의 힘을 보유한 공동체

먼저 야고보서 본문 13-18절까지를 주목해 달라. 어떤 용어(用語)가 가장 빈번하게 나오나? 바로 ‘기도하라’는 말이다! 무려 8번이나 강조되고 있다. 본문은 특히 고난당하는 자(13절), 병든 자(14절), 불의로 고통 하는 세상(17-18절)들이 중보의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강조점은 기도의 힘은 크다는 점이며, 특히 교회 공동체인 의인들이 간구하는 힘은 크다고 역설한다(17절). 심지어 3년 6개월간의 자연재해를 좌우(左右)할 정도의 영향을 기도가 준다고 한다(18절)


그 중, <병든 자를 위한 기도> 요구는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평소 제자들에게 ‘병자들을 고치라’고 위탁하셨다(마10:1,8 막6:13, 눅10:9). 사도 바울은 치유활동이야말로 교회에 부여된 은사 중 하나로 안내하였다(고전12:9,28절). 본문에서도 야고보는 병자들이 건강을 회복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교회 장로(長老)의 과업이라고도 일깨워 주었다(14절).


☞ 요즈음은 의술이 발달하여, 병원을 집중 이용하는데, 그럼에도 병자를 위한 교회의 기도는 여전히 교회 목양에서의 드높은 과제이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병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가장 집중된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고, 가장 나약한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기가 쉽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의 능력과 체험들이 잘 축적(蓄積)된 교회와 성도들의 결코 무너지지 아니한다. 


o 좋은 사례 – 나아만 공동체 (나아만 교회)

아람(시리아)의 국방장관인 나아만은 나라의 대단한 용장으로서, 여호와의 은혜를 입어 전쟁에서 나라를 건지기도 했던 인물이었다(1절,상). 하지만 그는 나병(癩病)환자였다(1절,하). 학자들은 그의 상태가 전염시킬 정도가 아니라, 악성 피부병인 마른버짐으로 본다. 그 이유는, 그가 직접 왕을 찾아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래 나병환자는 외출이나 사람 만남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나아만이 왕을 찾아가 외출을 허락을 받는 모습은, 그 정도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그 더러운 병을 치유 받는다(14절).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아만 자신보다도, 나아만 주위의 인물들의 적극적인 협력들, 곧 나아만의 아픔과 그 치유받기를 원하는 주변의 공감대가 살아 결집되면서, 얻어낸 쾌거였다, 적어도 다음의 세 사람들이 그의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1) 나아만 아내의 수종을 들던 어린 여종이다(2-3절). 그가 그의 치유에 결정적인 정보(情報)를 주었다(3절). 이 여종의 정보가 나아만에게는 그를 살리는 복음이 되었다! 그런데, 이 여종은 누군가? 자기 부하들이 이스라엘 침공 시에 포로로 잡아온 소녀였다. 그 바람에 그 소녀는 강제로 이산가족이 되고, 그 집의 몸종이 되었다. 가슴에 한(恨)을 품고 살고 있었던 자였다. 그런 그가 자기의 원수일 수 있는 집 주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소식을 전한 것이다. 


2) 왕(王)의 협력이다(5절). 왕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나아만의 고통에 깊이 공감(共感)하면서, 그의 치유의 방안을 듣자마자 크게 기뻐하면서, 적극 협력하고 나왔다.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親書) 한 통과, 필요한 재물(예물)들을(은 10달란트/금 6,000개/의복 열 벌)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긴장 속에 이스라엘로 떠나는 병든 신하를 왕이 기꺼이 응원한 것이다. 


3) 그와 동행하였던 보좌관들이었다(13절). 그들은 선지자 엘리사가 멀리서 찾아온 나아만을 나와서 맞이하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7번 씻으라’라는 말만 전하는 등의 문전박대(薄待)를 하자, 거기에 격분한 나아만이 ‘다시 뒤돌아가겠다’며 강경대응을 하자(11-12절)-, 그런 주인을 적극 만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대로 해보시고, 퇴각을 결정하시라’고 강권하였다. 만일 그들의 저지가 그때 없었다면, 나아만의 회복이나 행복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 결국 나아만은 고집을 꺾고, 요단강에서 선지자의 지시대로 7번을 씻고 나면서, 그 피부가 깨끗해졌다(17절). 나아만을 사례(謝禮)도 못하고, 선지자 대면도 못한 체, 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기로 맹세한 인물이 되어 귀국했다. 진정한 복은 이렇게 주변의 공감자-협력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있다. 우리 교회도 이런 마음과 마음이 엮어진 공동체들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 나아만의 믿음을 칭송하셨던 바를 함께 기억해 두자(눅4:27절). 


o 나쁜 사례 – 거라사 공동체 (거라사교회)

거라사(일명-데가볼리/마8:23)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서 갈릴리 호수가 동남쪽 60km 에 위치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더러운 귀신 들려서, 밤낮 무덤이나 산에서 살던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 사람 안에 들었던 귀신은 그를 묶어둔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초강력하여,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4절). 그러면서 자신의 몸은 돌로 해치며 자해(自害)하던 괴인(怪人)이었다. 실로 온 마을에 골칫거리요 정말 부담되고 두려운 존재였다. 


1) 그런 그가 마침 그곳을 찾으신 예수를 만난다(2절). 예수를 알아본 그는 이미 떨고 있었다. 예수께 엎드려 자기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빌었다(6-7절).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귀신의 종노릇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즉시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셨다. 주님이 그 귀신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명령하셨다(8절). 알고 보니, 그 귀신은 ‘군대(軍隊-레기온)’이란 이름을 보유한 로마군 약 6,000명의 병력의 수준의 힘을 가진 귀신이었다(9절). 


2) 군대 귀신은 예수께 간청했다. 처음엔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했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자기들을 방목 중인 돼지 떼(약2,000마리)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결국 쫓겨난 귀신은 그 돼지 떼에 들어갔고, 그 바람에 미쳐 날뛰기 시작한 돼지 떼가 바다에 뛰어 들어가 몰살(沒殺)되었다(11-13절). 문제는 그 소식을 접한 여러 읍내 사람들의 반응이다  


3) 그들은 정신이 온전해 진 자와 그를 그 잔인한 귀신에게서 살려낸 예수를 축하하거나 환영하지를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에 휩싸여서, 예수께 찾아와 이렇게 간청(懇請)하였다 -‘우리 마을을 떠나 주십시오’(14-17절 참조). 그곳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좇고 싶어한 자는 치유 받았던 바로 그 한 사람뿐이었다(18절). 


4) 그들 거라사 공동체는 고통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공감(共感)능력이 없었다. 모든 것이 물질 중심적으로 손익(損益)계산만 하며 살았다. 그러기에 생명의 구원자 예수가 자기 마을에 오셔서, 최대의 숙원인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보이셨는데도, 그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게 바로 거라사 공동체의 현실이었다. 그런 모습은 앞서서 우리가 확인한 나아만 공동체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런 공동체에 어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겠는가? 


o 교훈이 정말 크다. 우리는 지금 온갖 질병들과 싸우며 살아간다. 개인-가정-국가 모두가 그렇다. 그 싸움에서 누구는 이겨내고, 누구는 패망한다. 어떻게 극복해낼까? 공동체적인 대용에 눈이 떠야만 하겠다. 개인만 잘한다고 공동체가 다 사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나야 한다. 공감력을 결집할 리더십을 갖춘 이들이 필요하다

 

여종과 왕과 측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구원하려는 공감대가 살아있던 나아만 공동체가 우리의 모델이다. 명심하자. 물질이나 탐욕이 지배한 거라사 공동체로는 백전백패다. 그 대신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라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우분트(Ubuntu) 정신으로 살면 된다. 이게 우리 민족과 교회와 가족과 개인들이 살고 승리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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