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강림후(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강림후(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8-17 (화) 17:29 2년전 383  

본문) 행 21:39~22:16, 사 42:14-16, 막 10:46-52


강림 후 열 셋째 주일이다. 날씨는 입추와 말복을 보낸 후 완연히 열대야가 가시고, 편히 잘 수 있는 밤을 맞이한 느낌이다. 바깥소식들 중에는 미군이 철수한 아프카니스탄이 극우 이슬람 테러조직이었던 탈레반에게 정권이 넘어갔다는 소식과 함께, 중남미 아이티가 대지진으로 인한 참상이 너무 커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얼마 전, 그곳의 대통령이 테러 조직에 의하여 피살되기도 하여 온 세상을 놀라게 했었는데, 이번의 참상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이런 중에 우리나라에는 지난 광복일에, 일제 강점기에 최고의 독립영웅이셨던 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遺骸)가 76년 만에 카자흐스탄에서 환국(還國)하는 기쁜 일도 있었다. 고 홍 장군은 1920년 봉우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의 의병 투쟁에서 기념비적 승리를 안겨준 어른으로서, 일본군으로부터도 ‘하늘을 나는 장군’으로, 우리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로도 추앙되었다. 

☞ 그 바람에 이번 도쿄올림픽에 우리 한국 선수 팀 숙소에 이순신 장군을 상징하는 현수막에 이어, ‘범(호랑이)이 내려온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그게 바로 홍장군의 위상과 기상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선수단임을 표명한 것이어서, 일본 측의 견제를 크게 받기도 했었다.  


사실 여러 차례 이곳에서, 최근 코로나 이후 세계 속에서의 우리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과 역할에 대하여 언급해 온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하나님(하늘)의 은혜를 크게 받고 있음이 분명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상대적이지만, 일본의 퇴락이 회자되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국운이 상승하고, 온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와 백성으로 웅비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놀라운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믿는 성서의 세계는 인간이나 집단(나라)의 부침(浮沈)에 대한 증거들이 대단히 많다. 부침이란 위로 뜨고 아래로 가라 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나고 주저앉게 됨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개인이든 국가든 인간 세상에서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승리와 패배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뜨고 어떤 사람이 몰락하는 사람인가? 이를 극명하게 알려주는 내용이 성경에서 나온다. 잠언서을 비롯한 지혜문학서에서는 이런 류(類)의 증언들이 태산을 이룬다. 


여러분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삼상18:7-8)라는 구호가 있었음을 기억하시는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환영식장에서, 터져 나온 여인들의 이 말은 결국 사울왕과 다윗의 공존을 무너뜨리고 대립과 경쟁 구도로 그 둘을 몰고 가게 한 결과로 이어졌다. 사울의 시기심과 열등감 촉발로 다윗은 그 때부터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가인이냐 아벨이냐‘, ‘에서냐 야곱이냐’들도 있었다.  


아무튼 누구든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 이런 부침을 불러오는 경쟁(競爭)구도에 내몰리면, 대단히 피곤해 지는 것은 사실이다. 요즈음의 정치판에서는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인간관계에서는 최대한 이러한 비교 논리로 양측을 갈라 치는 언사를 자제하고 피하는 것이 좋겠다. 특히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칫하면 씻을 수 없는 장벽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유익과 승리를 취하려는 방법은 절대 피해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혜와 축복을 통한 승리의 방법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 방법에는 어떠한 후유증이 아닌 온전한 기쁨만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주어진 삶의 질곡(桎梏)과 왜곡된 삶의 늪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참 해방과 기쁨을 누린 경우들을 소개해 준다. 


서신서의 주인공 바울은 완고한 율법주의에 빠져 살고, 또 생명을 살리는 복음에는 맹인(盲人)이었음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예수와 그의 믿음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며 괴롭히는 범죄자가 되고 있었다. 그 잘못을 몰랐기에 그는 더 완고한 박해자도 치달았다(3-5절). 그 점을 헤아리신 부활의 주님이 직접 그를 만나주신다(6-8절). 


그래서 그가 박해한 예수를 직접 만나 뵙고 그 뜻을 알게 하시며 그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 들은 모든 것을 온 세상에 말하게 하셨다(13-15절). 그러면서 아무도 강압할 수 없는 그를 오직 하나님의 의의 빛으로 그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돌려 세우셨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한 인간의 회심이 아니었다. 지구촌의 역사와 운명을 되돌리는 방향 전환을 가져오는 대 역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스피커’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의 내용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기의 참혹했던 시기를 종료(終了)하게 되면서, 이제는 다시 정상으로 복귀하게 되는 유대 백성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그들이 환국하여 정상적 생활에 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채워주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만 하면, 새 세계를 맞게 된다


복음서의 여리고의 거지요 맹인이었던 바디매오에게 그 날, 곧 다윗의 자손인 예수를 만난 날은 천하를 얻는 지상 최고의 날이었다.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날이었다. 장애로 인한 개인적 원한의 질곡과 사회적 소외의 높은 장벽과 종교적 저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赦免)적 해방과 자유를 취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를 찾고 만나서, 그의 은혜를 입어서 ‘눈이 활짝 뜬 날’이었고, 그 예수를 좇게 된 구원의 날이었기 때문이다(52절). 


o 당신의 박해자를 택하여 당신의 증언자로 돌려쓰시는 그리스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行)은, 결국 그곳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바람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 되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체포와 테러를 당하자, 그를 지켜내려고 성내의 치안관인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군 영내로 이끌고 데려 간다(21장). 본문은 그 막간(幕間)에 증언할 기회를 얻어서, 그를 지켜보던 유대인들과 모든 로마 군사들 앞에서 자신의 변화와 소명의 경위를 소상히 증언한다. 


1)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서 층대(層臺) 위에 서서 백성을 조용하게 한 후, 히브리말(아람어)로 먼저 자기 신상소개부터 한다(21:39-40, 22:1-2 참조). 바울의 자기소개 내역이다. 

☞ 그는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해외교포였다. 하지만 자라기는 본국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석학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조상들의 엄한 율법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도 열심을 가진 자였다. 그때 그는 예수의 도(道)를 듣고 박해하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는 일도 하였다. 그 점에서는 지금의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증인들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가 다메섹에 간 것도 그곳의 예수를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형벌을 받게 하고자 함이었다(3-5절). 


2)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인 오정쯤에, 그는 예상치 않은 돌발성 경험을 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치는 바람에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그러면서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십니까’로 묻자 그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6-8절). 결국 그는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와 대면을 했던 것이다. 


3) 이런 대화는 주변 동행자들에게는 빛만 보고 말씀은 듣지 못한 상태 속에서 계속되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9-10절). 결국 그는 그 빛의 광채로 잠시 시력을 잃게 되면서,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을 지낸다. 그곳은 직가의 유다의 집이었다(행9:9,11참조). 


4) 그를 찾아온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다(12절). 그가 사울에게 오자, 못 보던 눈이 다시 보게 되면서(13절) 사울을 향한 주님의 소명(召命)을 이렇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예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너는 (이제)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14-15절). 박해자가 아닌 선포자를 전했다! 


5) 이런 예수의 부르심을 전한 아나니아는 사울이 즉각 소명에 응답하도록 재촉하는 권면을 했다.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어라’(16절). 

☞ 이 아나니아의 지시는 예수의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주이심을 입술로 시인하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가 이제부터는 ‘완전한 예수의 사람’이 되었음을 공인(共認)받는 절차에 들어가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의 지적은 주의 일꾼 등장의 공식이 되었다!


☞ 바울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자로 일하게 되었고, 또 그 일로 이토록 동족들의 오해와 미움과 핍박까지도 받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어떤 박해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하늘 구원의 소명을 위해, 위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면서, 모든 죄에 매인 자들에 예수로 인해 사망의 족쇄들이 풀리게 되는 일을 기뻐하였다. 


o 복역(服役)한 이스라엘을 앞세워 영광의 세 세상을 여시는 여호와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무언가 오랫동안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꽉 막혀 지냈던 관계로 인한 가슴앓이(?)를 이제는 풀고 가겠다’는 확고한 심정을 잘 드러내신 곳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식이 악행하고 탈선하면서 부모의 계속된 충고까지 철저히 무시하고 지내자, 고민하던 그 부모는 그 자식이 거기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면서, 자식을 세상 법정에 넘겨 그곳의 심판을 받게 하면서 갖게 된 부모의 말 못할 심정이었다. 이는 결코 자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식을 ‘제대로 된 자식으로 다시 얻고자 한 부모’의 뼈아픈 결단이었다. 


그 바람에 그 자식은 범죄한 댓가인 형벌을 치루는 일종의 냉엄한 ‘숙려(熟慮)의 기간’을 보내야 했다. 유대의 바벨론 70년의 포로기가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런 중에 발생한 세대교체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자녀들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거의 맹인 수준으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여호와께서 대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 무엇이냐’란 등등의 회의에 빠져 있었다(사40:27 참조). 곧 오직 패배의식과 버림받았다는 자괴감의 감옥 속에 그들의 영혼들이 깊이 갇혀 있었다. 


그런 점을 헤아리신 여호와는 그들에게 보호자인 하나님을 제대로 알리는 일부터 시작하셨다(사40-55장 전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만이 그들의 앞길을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두 가지 차원으로 간결히 전한다. 


1) 자녀인 유대(이스라엘)가 포로생활을 70년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들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보내셨고, 어떤 주위 후속 환경을 준비하셨는가를 전하신다(14-15절).

☞ ‘오랫동안 조용하고 잠잠하게 참아오셨다. 하지만 때가 오자 임산부가 해산을 앞둔 것처럼 머잖아 형기를 마치고 출소(出所)할 내 백성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셨다(14절). 주변 상황들을 황폐하게 하고, 마르게 하며, 섬이 되게 하고, 바닥이 드러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뭔가 새 시대와 구원을 갈망하며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대비를 하게 하셨다(15절). 


2) 복역(服役)을 마칠 당신의 백성 유대에게는, 예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 길을 준비하신다. 그들의 행보가 역사의 암흑을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곳을 곧게 하는 구원자의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예고하셨다. 여호와는 그런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15절). 


o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회복은 (위)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다

여리고의 맹인이자 평생을 거지로 살아 온 바디매오는 영적으로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와 같았다.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귀머거리요 맹인이요 벙어리와 같은 영적 불구(不具)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바디매오나 당시의 유대교는 스스로 치유 받거나 자립할 수 도 없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의(義)로우신 자비와 능력의 손길을 접해야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 길을 알고 있었다(51절).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만’이 자신의 이 저주스러운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47-48절). 드디어 그 날과 그 때를 간절히 소망한 바디매오에게 비로소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여리고를 들렀다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시려는 마지막 길목에서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만나주시면서, 회복의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 맹인들이 광명의 길로 나아오는 생명과 구원의 하늘 잔치, 곧 이사야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보이셨다(52절, 사42:16절 참조).


o 하나님의 역사와 늘 연결되어 있어야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들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을 펼치시는 데에는 인간들의 저항이나 무능이나 실패나 박해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함을 우리는 새롭게 확인했다. 다만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 중요하고, 더욱 우리의 부족을 시인하면서 그의 자비와 도우심을 겸손하지만 바디매오처럼 간구하는 자세는 매우 필요함도 확인하였다. 


다시 확인해보자. 내가 하늘 생명으로 태어난 날이 언제인가? 내가 영적인 시청각 장애에서 해방되어서, 제대로 보고, 들을 것을 들으며, 온전히 말할 수 있는 삶의 능력을 확보하여 살기 시작한 날이 아닌가! 영적 성숙함으로 주의 나라의 자유인들로 살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