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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선교주일

관리자 2021-06-09 (수) 12:04 11일전 73  

분문) 고전 1:18~25, 호 2:14-23, 눅 14:15-24

 

강림 후 셋째 주일이다. 무더위와 함께 고르지 못한 일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빈번해진 비 때문에, 황사나 미세먼지 공포가 많이 줄어든 듯해서, ‘다행이다’는 느낌이다. 그러는 중, 최근에는 코로나19 백신 예방 주사 맞기가 세간의 화제이다. 마치 고르지 못한 날씨마냥, 백신 접종에 관한 정보들에 따른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보수 언론과 야당이, 정부 방역 당국이 코로나 백신 수급을 제대로 못해서 올해의 우리나라 백신 접종목표가 실패할 거라면서 정부를 공격했다. 그런데 미국의 얀센 백신 100만명 보내기 등의 협력과 해외에서의 다량의 수입 물량이 충분해지자, 이번에는 백신 접종의 후유증에 대한 공포심을 계속 조장했다. 그 바람에 국민 일부에서는 접종을 불신하고 기피하는 움직임까지 발생했다. 이 일은 정부가 올 후반기에는 전 국민 70% 이상의 접종을 통하여, 마스크 없는 일상생활인 ‘집단 면역(免疫)시대’를 열고자 하는 목표를 훼방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백신 수급도 안정적이며, 국민들도 앞 다투어 백신을 맞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우리는 전 국민 70-80% 이상의 접종으로, 코로나를 이겨낸 시대를 기대할 수 있을 듯싶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백신을 가지고 정부를 흔들고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자기들의 정파적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집단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란 소종파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적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잡아 정치하려는 자들을 이제 우리는 가려내야 한다. 사실 그런 집단이나 그룹들은 언제나 어느 때에도 있었다. 저들은 언제나 대의(大義)를 보지 못하고, 항상 자기 집단의 이익(利益)에 매달려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런 자들의 회유와 유혹에 휘말린 대가는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는 수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역사의 퇴보가 나타나는 비극이 초래됨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대와 문제의 본질을 풀어가는 시각을 바르게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면서, 어둠의 세상을 구원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한 지 68년에 된 본 교단 선교주일이다. 본 교단 세칭 ‘기장(基長-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PROK)’은 어떤 신앙 집단인가? 

 

기장은 1953년 6월 10-11일, 제3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란 새 이름으로 출범되었다. 그때의 <38회 호헌 총회 선언서> 에는 다음 4가지 핵심 선언들이 담겨 있다 : 

1)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 정신을 함양한다. 

4)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큐메니칼) 정신에 철저하고자 한다. 

 

이런 선언으로 시작된 우리 교단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완전히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제95개조 항목을 토론의 주제를 내걸면서 로마교회로부터 뛰쳐나와,새 역사인 개혁교회를 태동하였던 그 상황에 버금하는 일이었다. 아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독립하여 뛰쳐나온 형국에 버금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기장(基長)은 한국교회란 비행기의 ‘기장(機長)’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부터 기장은 한국교회의 신학을 선도하는 집단이 된 것이다. 

 

기장의 특성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서 두드러졌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은 무조건 말씀을 문자대로 믿으라했다. 하지만 기장의 신(新)정통주의 신학은 인류가 발달시킨 과학적 이해, 철학적 사고, 지성적 접근, 정신분석학적 이해 등을 활용하면서, 그 말씀이 안고 있는 메시지를 통전해서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 바람에 기장은 한국교회의 진보(進步)신학의 대변자가 되었다. 보수측으로는  이단으로까지 공격을 받기도 했고, ‘구원이 없는 교단’이라고 공세를 받기까지 하였다. 

 

더 큰 차이는 구원과 선교의 장에 대한 이해의 편차(偏差)였다. 보수교회에서는 오직 ‘모이는 교회’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제도교회를 위한 구원론이었다. 세상 현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바람에, 보수교회는 세상과 인간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또 어두웠다. 그 혼란을 저들은 이번 ‘전광훈현상’에서 절실히 드러냈고,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교회의 공신력에 대한 추락(?)상황으로 그 한계를 입증했다. 

 

교회는 구원론(救援論)과 선교론(宣敎論)에서 제 자리를 분명히 잡아야만 한다.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그 종교는 사람을 헤매게 하면서 그 영혼과 육체를 망가뜨린다. 또한 우리가 받은 구원과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일에 대한 방향 설정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그 교회나 성도는 이기주의적 교인이 되고 만다. 받기만 하고 나눌 줄 모르는 자가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o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헬라계 교포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다가 다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빛 가운데에서 만나면서(행9장),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그 세 부류의 특성들과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상당한 통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서로 다른 신앙과 가치관을 가지고, 날카로운 비판과 견제를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 이 셋 모두를 다 섭렵(涉獵)한 사도 바울의 선택(選擇)은 무엇이었나?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였다! 그 이유가 있었다. 곧 십자가의 말씀(도)에는 유대인이 찾고 있는 표적도 있고, 또 헬라인이 찾으려는 지혜도 담겨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18,24절). 그러기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선택하면, 이 셋은 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구원의 포인트를 십자가에서 찾았던 바울은 그 일 성사에 목숨 걸고 뛰어 들었다. 

 

1) 유대인은 표적이나 이적(miraculous signs)을 추구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다(22절). 이런 모습은 그 시대의 아주 대조적이요 대표적인 사조(思潮)들이었다. 이는 새의 양 날개와 같았다. 하늘의 표적이나 이적을 구하며 사는 유대인들은 그 시대의 신본주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최고 최상 최신의 차원 높은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은 그 시대의 인본주의의 표상이었다. 


2) 이것은 이 둘 모두가 크고 놀랍고 최고의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점에서와 그러기에 그들 세계는 일반인들로서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共通的)이었으나, 그것들을 취하기 위하여 문(門)을 두드리는 방향만은 정 반대였다. 유대인은 항상 하늘에서 찾았으나, 헬라인은 언제나 인간에게서 찾았다. 곧 한쪽은 하늘의 전능자에게서 찾고 살았고, 또 한쪽은 인간들 속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에게서 찾았다. 없으면 신들을 만들어서라도 숭배하였다.

 

3) 그렇다면 이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접점(接點)이 필요했다. 그 접점을 찾기만 한다면, 세계선교의 문은 활짝 열릴 수 있다. 교회 시대를 온 세상에 활짝 열 수가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앞장 선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이었다. 성령은 바울이야말로, 이 양측 영역들을 다 이해하며 살았고, 또 그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언어, 문화, 그들의 가치관들도 통달한 인물이어서, 그 두 이질적인 세계의 한 복판에다 바울을 예수의 증언자요 선교사로 투입시켰다. 

 

4) 성령이 양쪽에다 내세우신 접점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였다! 당시 인간의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장인 십자가(十字架)와 거기에 억울하게 못 박혀 죽임 당하신 예수가 그들 양측을 살려낼 대안적 콘셉트(concept)임을 제시한 것이다. 실로 극약 처방과 같은 치료제였다. 맞으면 다 살게 할 것이고, 안 맞으면 완전 참패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령은 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그들이 찾고 있는 완전한 해답으로 제시하신 것인가? 그 비밀스러운 해답은, 놀랍게도 ‘전도(傳道)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된 것이기도 했다(21절)

 

5)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그들이 찾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심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참 하나님이 ‘어떤 사랑의 신’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셨고, ‘세상 모든 죄인들을 멸망에서 구원해낼 참 지혜’가 십자가 희생에서 나왔음을 제대로 보여주셨다. 곧 예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찾아온 사랑, ‘밀고 들어오는 사랑’을 참 이적과 표적으로 나타낸 것이고, 헬라인들이 그토록 구하던 참 지혜의 실체를 제대로 맛볼 수 있게 해 준 것이었다. 

 

6) 선교와 전도는 바로 그런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반응들은 어떠하였나? 둘로 나뉘어졌다. 멸망하는 자들은 미련하고 헛튼 소리로 받았다. 주로 헬라인들이 그러했다(18,23.하).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스칼달톤-무기력의 표시)로 받아 넘겼다. 하지만 구원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즉 십자가의 소식에 가슴을 여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道)를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받았다(18,21,23-25절 참조). 

 

☞ 결국,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은 이러한 초기의 저항과 배척의 담을 무너뜨리면서, 그들의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산맥도 흡수하고, 예수 복음의 기독교의 세계를 활짝 열었다.

 

o 호세아서 내용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고 다시 한 번 자기 백성들을 구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이겨내신 일을 전한다. 이런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버려서 죽임 당하신 일이 구약의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다. 구원은 우리의 선행이나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주도적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 선택에 의한 것임도 확인하게 해 준다(요일4:10참조). 

 

1)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베 푸시는 적극적인 사랑을 받는다. 마치 간난 아기가 태어나면서,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사랑의 선물 공세를 받는 상황과 비슷하다. ‘타이르고, 데리고 가서 위로하고, 안겨 주고, 모든 응대를 다 받아주신다’(14-15절).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알이 아닌 여호와를 자기 남편으로 받게 하신다(16-17절). 

 

2) 그런 내적(內的) 관계가 확립된 후에는, 여호와는 그의 아내 된 자들을 어떤 외부의 위협에서부터 굳게 지켜주신다(18절 이하). 그것은 마치 신랑이 신부에게 지참금으로 지불하듯 한다. ☞ 자연 재해(災害)로부터의 보호, 전쟁 공포배제, 평화의 삶, 공의-정의-은총-긍휼히 여기심 등의 안전망(安佺網)을 펼치셔서, 그의 신부들을 완벽히 보호하신다(18-20절,렘31:34,계19:7). 

 

3) 이런 모습을 통하여, 여호와는 하늘과 땅의 모든 증인들 앞에서 자신이 다루기 힘든 이 백성들인 당신의 신부들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시지는 지를 알리시고(21절), 또 그들로부터의 응답도 이끌어내기도 하신데, 그 신부된 이스르엘에게 까지도 응답하게 하신다(22절,하).

 

4) 이 과정에서 여호와는 당신의 원래의 참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앞서 당신의 긍휼에서 배제되고(로루하마,히) 당신의 백성이 아니라고 정죄 당했던 자들(루암미)까지도,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끌어안으시는 자비와 관용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부터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을 받으시는 주님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호와는 결코 이스라엘의 주님만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의 주가 되이셨음을 제대로 보여 주신 것이다(23절).

 

o 복음서는 정작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초대의 잔치를 베풀기 시작하시자-, 오히려 주님의 처음 초청 받았던 무리(유대인)들은 전혀 엉뚱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 대한 주님의 분노와 아쉬움을 보여 준 내용이다. 

 

1) 유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첫 초대를 받은 선민(選民)들이었다. 그런 영광은 대단한 은혜요 영광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마지막 시대에 적합한 하늘 만찬을 마련하시자(16절-초저녁에 시작되는 만찬으로서 모든 삶의 완성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잔치, 계19:9,사25:6-8참조),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들을 내세우면서, 처음 약속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초대에 불응하고 나왔다. 그런 모습은 초대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무시(無視)였다. 그러니 주인의 허탈함과 분노가 얼마나 컸겠는가? 

 

2) 이유는 자기의 소유들과 새 가족에 대한 애착들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주인보다 자기들 것에 더 몰입되어 있음을 보인 것이다(17-20절). 이는 그들이 아직도 그들 조상들처럼, 바알을 여호와보다 더 섬기는 있음을 보여 준 일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공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에 그 주인은 결국 긴급조치를 발동한다. 그들 거부자들에게는 당신의 잔치 자리에서 완전히 배제시킴과 함께(24절), 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하던 종교적, 사회적 로루하마와 루암미들에게는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신 일이었다(21-23절). 이는 백신 문제로 국민 면역시대를 훼손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3) 결국 나가서 거리에 흩어져 살던 무리들,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이 다 차별 없이 초청받았다. 이는 종말 시에 하늘 잔치에 참석할 자들이 –호세아서에서 언급된 로루하마와 루암미들인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자들, 성가신 자들, 모든 이방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땅 끝 선교의 장이 활짝 열리게 된 연유였다. 

 

o 우리는 누군가? 장자가 아니라, 뒤늦게 메시아의 잔치상에 초대받은 루암미-로루하마와 같은 자들이다. 우리의 낮고 천한 신분에도 메시아의 잔치상에 초대된 은총을 입은 자들이다. 이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정신과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자.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힘써 여호와를 알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자. 이게 또한 우리 교단의 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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