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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환경주일

관리자 2021-06-02 (수) 08:26 2년전 482  

본문) 갈 6:1~10, 미 7:18-20, 요 7:53-8:11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이다. 무더운 계절, 유월에도 접어 들었다. 요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구촌의 온실가스 과다 배출에 따른 기후 환경 악화에 관한 우려가 커졌다. 이상(異常) 기온으로 인한 생태계 변화가 이제는 범(凡)세계적이 되면서, 그로 인한 피해의 규모가 예측을 넘어서고 있다. ‘발등의 떨어진 큰 불’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19도 그 부산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번 서울에서 개최된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부-기업-시민사회가 함께 하는 협의체인 P4G(녹색성장 및 글로벌 목표2030을 위한 연대)란 녹색미래 정상회의가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의 위험해진 온실가스 상황을 서둘러 감축해서, 지구촌의 비참한 종말을 막아보자는 취지의 대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차세대를 위하여서도 정말 서둘러야할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잘 되도록 힘을 모으자.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가 함께 지키는 환경(環境)주일이다. 흔히 환경이란 거대한 담론(談論)처럼 받기가 쉽다. 너무 광범위한 주제로만 받고 끝낼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은 환경의 주체인 인간의 내적 삶의 환경에 집중하면서, 이 문제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의 생활환경은 전 세계에서 최상위 급의 전자화되고 자동화된 고급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핸드폰은 이미 우리에겐 생필품(生必品)이 되었다. 그 바람에 천하의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정보의 엄격한 통제 때문에, 크게 빛을 보지 못보고 있는 편이다! 특히 외국에서 살다온 이들의 눈에는, 충격을 받을 정도로 우리의 생활상이 선진화되어 있다. 실로, 역사상 지금처럼 편리한 삶을 누린 적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호화스러운 삶의 변화와 향상(?)이 반드시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수입이 많아지고, 자동화되고 기계화된 삶의 편리함이 우리의 만족도와 삶의 질(質)을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이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불만족과 불편함과 불평등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라는 문제가 드러난 것이다. 그 바람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 또 다른 삶의 벼랑에 몰려서 살아간다. 

 

아담과 이브가 왜 범죄했던가? 에덴에 먹을 것이 없거나 부족해서였던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먹을 것이 풍성해서 범죄했다. 자기를 제재하는 선악과가 제시되자, 그것에 대한 궁금증과 자기 과시를 하려는 무모함에 그만 무너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삶의 질이 급락(急落)한 것은 가난이나 질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에덴을 복되게 누릴만한 자기 훈련과 절제력이 부족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력이 부족하니까, 모든 것이 흉기가 되었다. 

 

잠시 핸드폰을 생각해 본다. 왜 우리는 이토록 핸드폰을 끌어안고 살게 되었는가? 편리성과 유용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점도 함께 알아야 한다. 핸드폰을 관리할 당사자인 내가 그것을 다룰 인격과 자기 조절 능력이 없으면, 어찌될까? 그 핸드폰은 머잖아 자기를 전혀 엉뚱한 사람으로 만들고, 나중에는 지옥에 떨어지도록 만든다. 각종 범죄와 탈선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그는 자기 핸드폰을 이기(利器)가 아닌 흉기(凶器)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은 분명 우리 생활에 숱한 유익한 정보들을 준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우리를 지옥으로 유혹하는 위험한 정보들도 많다. ‘그것을 네가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으리라’(창3:4)는 뱀의 유혹들이 많다. 그런데도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그런 뱀의 유혹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면, 그는 어쩔 수 없다. 한순간에 범법자가 되고, 성범죄자가 되며, 살인자도 되어 에덴 거주자가 아닌 감방과 지옥으로 가야할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문명의 편리함과 탁월한 순발력은 그것을 이용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하게 만들었다. ‘빨리빨리’란 말이 한국인의 대명사처럼 되기도 했다. 조급증과 참지 못함과 서두름이 언젠가부터 우리의 정상적 인격을 무너뜨려 왔다. 그 바람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천박(淺薄)해지기 시작했고, 감정조절에 실패자들이 되었으며, 무책임하게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즉 인간 서로를 하나로 묶어낼 인내, 관용, 포용, 따뜻함 등을 상실한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정치권과 언론은 그렇다고 해도, 가장 이 힘이 발휘되어야 할 가정과 교회와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그 소중한 덕목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 바람에 가정에서는 이혼이 급증하고, 교회는 분열하여 힘을 잃었으며, 친구사이엔 등을 돌리면서 서로 외로운 관계로 떨어지는 마이너스 인생들이 되어 갔다. 홀로된 외로운 인생들이 급증하였다. 이런 모습은 언제나 연합과 일치를 무너뜨리는 것이 자신의 제일 목표로 삼아왔던 마귀를 한없이 즐겁게 한 샘이 되었다. 

 

대책이 시급하다. 특히 성령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방어막 전략이 필요하다. 그게 무엇일까? 마침 오늘 강림 후 둘째 주일에 주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이 주신 우리 안에 있는 큰 힘이 될 용서와 관용, 그것도 깊은 자기 성찰(省察)을 통하여 발휘될 상대를 향한 용서와 관용의 영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런 힘들은 무엇보다도 건강한 파장을 일으키면서, 먼저는 자신과 상대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하나 됨의 견고한 사회적 영성까지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 서신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잘못과 범죄를 대하는 성도의 바람직한 대응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특히 성령을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도 제시한다. 상대의 일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도 함께 살피는 일을 유독 강조하면서 말이다.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없음을 찬양한다. 그 결정적 이유는 자신들의 허물을 사유(赦宥)해 주시는 하나님의 관용 때문이었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를 전한다. 곧 오늘의 말씀들은 용서-사유-관용의 품과 날개로, 이 병든 시대와 인간을 치유하자는 것이다. 

 

o 서신서를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환경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자기들 사이에 드러난 범죄에 대하여 대응하고 처리하는 모습이 매우 미숙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문제를 성령 받은 성도들이 영적 방법으로 성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율법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바람에(2,8절), 그런 아픔이 치유를 못하고 부작용을 불러오는 모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바울 사도는 그 대안을 몇 가지 제시하면서, 교회의 건강을 안내하였다. 

 

1) 교회 안에서의 범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치료 방법은 강제성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발성을 기초로, 피차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성령의 법(=신령한 자)을 좇아 살아가는 이들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자세이다(1절). 

 

2) 범법자가 드러나면, 먼저 자신부터 성찰(省察)해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온유(溫柔)한 마음을 갖고, 그를 회복시키려는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내 경우였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 지를 먼저 생각하며, 나 자신도 그런 시험 받지 않게 되도록 두려워하여야 된다’(1절). 소위 그 사안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자가 되는 것이다(4-5절). 

 

3)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의 짐을 벗겨주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놓고서, 서로 짐을 나누어질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기 때문이다(2,14절 참조). 행여 내가 무슨 심판관이나 된 듯 심문자처럼 그 범법자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 그것은 시내산 모세의 율법을 쫓아 상대를 정죄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3절).  

 

4) 이런 중에도 사도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권면을 한다. 곧 ‘가르침을 받는 자(성도)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절). 이 부분은 지난 주일에도 바울의 목회자들의 생계 유지권에 관련해서 강조했던 바로 그 내용이다(고전9:4-14절참조). 그런데 또 이 점을 여기서 재론하는 것은,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목양사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허약하게 만드는 일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5) 그러면서 사도는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명심해 두어야할 말씀 한마디를 선포한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永生)을 거두리라’(7-8절). 

 

☞ 어떤 말씀인가? 모든 인간은 농부이다. 현재의 내 행위를 심고 그 열매는 미래에 거둔다. 그렇다면, 현재는 무엇을 심고 미래에는 무엇을 거두게 될까? 두 종류가 있다. 

- 한 부류는 육체(肉體)를 심는 자들이다. 이들은 평생 자신의 유익과 욕망에만 집착하며 산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我)가 소멸될 때, 함께 다 소멸당할 죽음을 맞는다. 또 다른 부류는 성령(聖靈)을 좇으면서 산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생을 성령의 작용과 소원을 좇아서 사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죽음이 찾아와도, 불에도 타지 않을 영원한 것을 추수한 열매들로 인하여 그는 불멸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永生)을 누리게 된다.  

 

6) 그런데 이러한 영적 싸움은 매우 긴 씨름을 해야만 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인내(忍耐)와 끈질김’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장거리 마라톤처럼 간주하여, 영적 행진과 사역에서의 최후의 승리를 바라야만 한다(9절). 그 최후의 때는 반드시 온다! 

 

7) 이를 위하여 사도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행동을 요구한다. 믿음 유지하는 일은 혼자만으로는 어렵다. 상호간에 연대와 협력인 ‘어깨동무 정신’이 매우 필요하다. 그게 바로 우리의 가까운 이웃인 믿음의 가정들과 좋게 지내야할 낼 이유이다(10절). 서로 간의 결속력이 필요하다.  

 

o 구약 미가서의 내용은 당시 하나님을 향한 예배 의식문의 형식에서, 마무리 짓는 찬양의 핵심(核心)으로 올린 것이다. 그 내용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시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꺼이 보여 주신, 용서(容恕)와 사유(赦宥)하심과 인애(仁愛)에 대한 찬미였다. 이스라엘은 그 일을 기억하면서, 예배 때마다 기꺼이 자기들을 용서하신 여호와를 이렇게 찬양하였다 :

 

- '주와 같은 신(神)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仁愛)를 기뻐하시므로 진노(震怒)를 오래 품지 아니 하시나이다(18절).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19절). 끝으로, 주께서 옛적에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자기들에게 성실(誠實)과 인애(仁愛)를 더하셨다고 뜨겁게 고백하였다(20절). 

 

o 복음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보여 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은 그의 하늘 아버지의 죄인을 사유하시는 바로 그 모습과 일치한다. 곧 죄인을 향한 용서와 자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를 증거한다.

 

1) 초막절 절기 중인 어느 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자, 주님은 당신에게 몰려온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2절). 그러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姦淫)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 예수 앞에다 세우면서, 예수를 시험하기 시작했다(3-4절). 

 

2)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거론하면서(신22:22-24참조),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물었다(5절). 이유는 뻔했다. 여자에 대한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고발할 명분을 얻고자 함이었다.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고, ‘치라’하면 법적 권한이 없이 사람이 로마법을 유린했다고 고발하려고 한 것이었다. 

 

3) 그러자 주님은 아주 묘(妙)한 행동으로 응답하셨다. 갑자기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계속해서 그러셨는데, 그런 중에 시험자들이 계속 답변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자, 주님은 비로소 입을 열어서 이렇게 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7절). 그런 후, 주님은 다시 땅에 손가락 글씨를 쓰셨다. 

☞ 땅에 쓴 손가락 글씨란 렘17:13절에 근거를 가진 내용으로서, 책에 쓴 것과는 달리 언제든 지워져 남아 있지 아니함을 뜻한다. 혹 심판자들을 향한 경고의 내용도 쓰셨다고 본다(마7:1). 

 

4) 결과는 놀라웠다. 주님의 그 한마디가 그곳 사람들 모두의 양심(良心)에 가책(苛責)을 불러일으키면서, 원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모두가 다 떠나고 말았다, 그 여자만 남았다!

 

5) 이를 확인하신 주님이 그 당사자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절)

☞ 그러면 주님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간음한 죄에 대한 응징(膺懲)에는 분명히 동의하셨다. 하지만 그 죄를 응징하려는 심판자들에게는 ‘네가 심판자로서 갖추어야할 확실한 조건은 갖추었느냐’고 물으셨다. 남을 판단하려면, 그 자신부터 먼저 아무런 죄가 없어야만 한다. 그것은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혀 용납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다(마7:1참조). 

 

☞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교회에서 동료들의 허물에 대하여 함부로 정죄하면 안되는 근거이다. 결국 더 큰 은혜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유일한 심판자 되신 예수께서도 그녀를 향한 정죄를 거두시고, 용서하시면서 그 불행한 여인에게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셨다. 이게 바로 주님의 세계였다! 

 

o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는 용서와 관용의 힘을 길러야만 한다. 범죄한 이들에게는 치유와 회복을 돕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자기 성찰을 부단히 하고, 나에게도 언제 닥칠 시험과 범죄의 기회를 완벽히 차단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자들이고 범법의 위험 선상에 있음을 자각하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며, 특히 선행을 격려하면서 항상 성령을 위하여 심고 사는 영적 연대망을 강화하자. 우리 교회의 강한 영향력이 세상에까지 발산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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