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연합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창조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0-09-09 (수) 08:26 3년전 767  

본문) 창 1: 26-31, 눅 12:4-7, 요일 3:1-10

 

창조절 둘째 주일이다. 기존의 코로나 판데믹에다가, 연이은 초대형 태풍들인 마이삭과 하이선의 공습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전국이 초긴장 속에 보낸 한 주간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인간 습격 현상들은 모두가 우연(偶然)의 산물일 리는 없다. 이 지구촌의 관리를 책임진 우리 인간들의 탐욕과 자연 파괴로 인한 행동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판단은 모든 환경 전문가들의 일치된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회개 밖에 없지 않나싶다.

 

회개라면 어떤 류(類)의 회개여야 할까? 얼마 전 안중덕 목사(샘터교회)께서 SNS에 ‘코로나 감염시대가 전해주는 메시지’로 올린 글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 적이 있었다는데-, 그 내용을 요점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우리의 회개의 마음을 모으고자 한다. 

 

☞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이다.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이다.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라>는 뜻이다. 대면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집합을 금지하라는 것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이 분은 우리에게 가해진 불편한 제재들(마스크 착용-손 자주 씻음-사람과 거리두기-대면 예배 금지-집합 금지)을 그대로만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왜 그런 제재가 우리에게 왔는지를 먼저 본다. 그러고 나니 그 원인을 ‘제재하는 너’에게가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나’에게서 찾았다. 관리가 부실했던 내 모습들과 잃어버렸던 관계들, 그리고 재정립해야 될 질서들이 다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새 삶의 출구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귀한 신앙인의 회개하는 모습이었다. 

 

오늘 말씀에서도 잇달아 나온 내용이 있다. 곧 이 표현이다. ‘--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0-31절).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원래 만족스럽고 완벽하였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좋은 세상이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종말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창조세계를 관리해 온 우리 인간들의 과도한 탐욕과 이기심 때문이었다. 조물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도 자연히 망가지고 말았다. 

 

가장 좋아야할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關係)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자, 지구촌과 인류는 극심한 몸살과 불행을 겪고 있다. 태풍이 남긴 잔인한 잔상(殘像)들을 보라. 분노한 신의 버림을 당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코 의로우신 창조주가 원하신 바가 아니다. 탕자(蕩子)가 된 인간들 스스로의 자업자득(自業自得)에 따른 것이다. 아직은 기회는 열려있다. 창조주께로 돌아갈 기회 말이다. 악화된 아버지의 관계 복원에 집중할 때란 말이다. 

 

하나님 자신은 본래부터 관계적(關係的) 존재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정체성에는 이미 하나님 자신이 유아독존적 존재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삼위(三位)로서의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내지 상호협력적(相互協力的) 입장을 취하신 분임을 충분히 담고 있잖은가-! 거기에서 완전한 관계를 이룩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심, 완전하심, 전능하고 전지하심, 아름다우심의 모습을 이 세상에 찬란히 보여주셨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전한 책이 바로 성경이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우리 인간들도 아예 본질부터 관계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이 설정해주신 조상과의 관계 속에서 왔고, 가족과 이웃들과 관계 맺어서 살아가며, 세상과의 다양한 얽힌 관계들 속에서 희로애락의 삶을 살다가 간다. 그러기에 진정 복 받은 자들은 주변과의 관계 맺기를 잘한 사람이다. 하지만 관계 맺기에 실패한 자들은 깊은 불행과 어긋난 환경에서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마침 오늘 창조절 둘째 주일은 한국교회가 교회연합(聯合)주일로도 지킨다. 교회연합이란 수많은 전체 교회와 교단을 하나의 교회,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각자의 교단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믿음 안에서 서로가 형제자매와 같이 좋은 관계로 연대하여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자는 것이다. 

 

사실 교회나 교단이 많은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서로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은사를 이웃 교회와 공유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으로 함께 연합만 한다면, 그곳엔 향기와 능력이 가득하리라. 아프리카 반투족에게는 우분투(Ubuntu)라는 매우 감동적인 격언이 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귀한가? 하지만 요즘의 한국교회의 생태는 우분투 정신이 아니다. 옛 바리새인들처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고압적이다. 연합정신의 실종이 정말 무섭다. 

 

다시 길을 찾고자 한다. 마침 오늘 본문들은 창조주가 설정해주신 세 가지 차원의 핵심적 관계들을 알려주신다. 창세기에서는 조물주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 곧 남자와 여자의 상호 관계이다. 누가복음서에서는 친구(親舊)관계를 말한다. 요한서신에서는 우리가 부모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이다. 사실 이 세 가지, 곧 남녀의 온전한 관계, 친구 관계, 자녀 관계가 가장 핵심이 아니겠는가! 본문들은 이런 관계들 모두를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정립되기 원하신다.

 

창세기를 보자

본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관한 기록이다. 창조 일정의 마지막 여섯째 날의 하이라이트인 인간 창조였다. 그것도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제작하신 것이다(26-27절). 

 

그 때, 창조주는 그의 깊은 뜻 속에서, 인간을 ‘같지만 다른 존재’인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로 만드셨다. 성(性)이 하나가 아닌 둘로 만드신 것이다(27.하). 이는 남녀가 존재적으로는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어 살고, 동시에 기능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역인 생명 창조(생육)와 번성하게 하는 일에도 동역하도록 제작하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본 질서였다-!

 

그리고 그런 신적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창조주께서는 앞에서 창조하신 자연 생태계를 안겨 주시면서, 먹거리로도 삼고 관리하며 살도록 배치하셨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조물주는 크게 만족하셨다(28-31절). 여기에서 우리는 꼭 되새김해야할 몇몇 대목들을 살피고자 한다. 

 

1) 인간에게는 창조주가 부여하신 천부적(天賦的)인 인권(人權)을 담아 주셨다(26절). 이는 불가침적(不可侵的) 성격의 인권이다. 창조주의 형상이 담겨있는 신적 영역을 가진 대상에게, 누가 감히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인권에 손대면 안 되는 이유이다. 인간을 해(害)치거나 죽이면, 그것은 하나님께 해를 가한 일이다. 그렇다. 신이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은 지고(地高)한 것이다. 우리도 인간을 보는 눈이 새로워져야 한다. 

 

본래 ‘형상’이란 말은 ‘세워 놓은 상’이나 ‘신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변에서는 그 상을 볼 때, 그 상이 가리키는 장본인을 보게 하는 대리적 효과를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대로의 인간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전체 피조세계 한 가운데에다 세우신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점 때문에, 만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작 인간이 인간을 제대로 못 보는 것이 불행이다! 도대체 인간이 어찌 인간 생명을 해치고 죽일 수 있을까?

 

2) 신이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드신 것은, 신이 마음을 다해 사랑할 대상을 인간으로 설정해 두셨음을 말한다(26절). 관계에서 가장 큰 힘은 서로의 닮음에 있다. 가족 사랑이 가능한 까닭도 서로 닮았다는 데에 있잖은가? 발가락이라도 닮으면, 자기 가족이며 혈족이다. 배제나 차별할 수 없이 품고 살 존재요, 생사고락을 함께할 존재이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셔서 사랑하신 대상이 바로 인간이었다! 손주를 사랑하는 조부모들의 눈빛은 언제나 빛난다-!  

 

3)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소중함도 환기시켜 준다(27절). 이 대목은 남녀를 남편과 아내로 창조하신 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고 상호보완적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왜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은 것인가? 이것은 남녀가 언제 어디서나 서로 연합해야 비로소 창조주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남녀의 분리, 즉 1/2만의 인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결코 대변할 수 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관계가 남녀의 연합임을 말한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영원한 미완성이며, 생육과 번성도 불가능하다. 남녀가 연합(聯合)해야 그 다음이 가능하다. 성(性)차별이나 억압은 반신적인 행태이다.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할 때, 남녀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요즈음엔 ‘미투’(Me Too)운동이 활발하다. 그 바람에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추락(墜落)한다. 남성 우위적 성차별과 성폭력에 오랫동안 짓눌려왔던 여성인권이 신장되고 회복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교회든, 인간 사회에서는 남녀가 서로 마음과 지혜와 힘을 합하여야 온전한 세상 청지기로 살게 된다. 

 

4)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닮은 인격과 품성이 마치 “씨앗”처럼 내재되었음을 알린다(26,요일3:9). 창조주는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 모양대로’라는 표현을 무려 3차례나 사용하셨다. 그 ‘우리’는 누굴까? 지난 첫 주일에서 확인된 창조 역사의 주역으로 참여하신 성부-성자-성령 삼위이신 하나님이시다. 서로 역할을 분담하고, 서로 신뢰하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협력하셔서 일체가 되어 서로에게 ‘최상의 좋은 관계’를 보여주신 하나님 말이다! 

 

그 영성이 우리 인간 안에도 심겨져 있다. 이제 그 부분에 눈이 떠서, 개발되고 발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부분하셨다. 남녀와 부부와 가족과 교회공동체와 세상에서까지 ‘창조주의 더불어 영성’이 발휘된다면, 창조주의 기쁨과 반가움은 최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최상의 좋은 관계형성을 위한 헌신의 자리에 부름을 받고 살고 있다. 

 

누가복음을 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택한 제자들이 앞에서 말한 창조주의 본성으로 훈련되고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면서, 거기에 특별한 보너스 선물을 얹혀 주셨다. ‘너희는 나의 친구(親舊)다’(4절).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한 연합적 영성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종이나 노예의 수준에 두게 하지 아니하고, 당신과의 친구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확인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가 될 조건으로, 당신이 명(命)하는 대로 행하여야 함을 언급하신 바가 있다(요15:14). 친구는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가는 좋은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대로 우리를 그의 말씀을 좇아 살면서 예수를 친구로 두고 살게 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본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답을 주셨다. 첫째는 그 어떠한 삶의 두려움에서도 자유하고 안전을 누린다! 그 이유는 예수 친구 그가, 원래 몸만 죽이고 영혼엔 손도 댈 수 없는 자가 아니라 몸과 영혼 모두를 심판할 권능자이신데(4-5절), 그런 강력한 분이 내 친구가 되어주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둘째는 그런 놀라운 분이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만큼 자상하고 치밀한 손길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6-7절). 

 

☞ 물론 인간 친구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 없는 세상 친구들만 두고 살면, 그는 실패자일 뿐이다. 그러기에 예수 친구부터 확보하고 사시라. 세상 친구들은 그분 안에서 다시 얻으시라. 부디 우선 확실한 좋은 친구인 예수 친구를 두셔서,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사시기 바란다. 

 

요한일서를 보자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가족관계 맺기에 관한 말씀이다. 가족도 가장 핵심가족인 자녀(子女)되기이다(1-2절). 사도 요한은 일찍이 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문제를 그의 구원론의 가장 큰 핵심적 주제로 삼은 이였다(요1:12). 부모와 자녀 관계는 언제나 상대관계가 아니라 절대관계이다. 서로의 운명을 함께 하는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런 관계를 맺는 일이다. 

 

1) 사도 요한은 인류를 두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했다(10절).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와 죄를 없애려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5,8절) 그리스도를 씨로 받아(9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를 향한 소망 속에서(3절) 예수의 성품(性品)인 형제 사랑과 생명과 희생의 길을 택하여 사는 사람들이다(10, 벧후1:4)

 

2) 가인에 속한 마귀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불법인 죄 속에서 산다. 죄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범죄에는 특징이 있다. ‘범죄하다’(6절)의 헬라어 동사가 현재 시제로 사용되고 있음인데, 그것은 그들의 범죄가 한순간의 실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습적이고 고의적이며 지속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의와 선행을 행할 기회나 회개할 기회가 없이 살다가 죽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마귀에게 결코 미혹되지 않도록 늘 깨어 살아야 한다.

 

결론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세계 보전을 위하여, 당신의 백성들이 피차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최상위 피조물들인 이성(異性)과의 관계가 좋아야만 한다. 이 관계에서 성공하면 그의 미래는 매우 밝아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구 관계도 강화되어야 한다. 서로의 협력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혜를 나눌 수 있으면, 그 생애는 매우 풍성해 질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관계도 철저하게 보전되게 해야 한다. 항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이다. 형제 사랑으로 내가 주의 자녀임을 입증하며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성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빛을 발하게 하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