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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재일동포선교-개척선교주일

관리자 2020-09-02 (수) 07:58 3년전 727  

본문)  창 1:1-25, 요 1:1-5, 계 4: 1-11

 

창조절(創造節) 첫째 해가 열렸다. 삼년마다 돌아오는 전체 절기순환 과정에서 창조절의 첫해를 다시 맞이하였다. 절기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도 다시 대하게 된다. 하지만, 3년 전의 본문이 다시 주어졌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나 선포마저 이전의 것일 수는 없다. 우리 인생이 변하였고 시대도 달라졌으며, 예전에 밟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과제들도 넘치게 되었는데, 어찌 하늘 생명의 메시지가 예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금년처럼 미증유(未曾有)의 코로나19로 인하여 인류가 새롭게 겪고 있는 전염병의 문제와 그로인한 질서의 붕괴(崩壞)와 역작용(逆作用)들-, 거기에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지구촌의 기상 이변(異變)들로 인한 극심한 환경파괴 현상들과 거기에서 초래되는 삶의 기반붕괴 문제들은 창조절을 다시 맞이하는 오늘의 우리 교회로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하는 간절한 기회일 수밖에 없다. 말씀을 받되-, 앉아서가 아니라 일어나서 받아야할 정도가 되었다. 

 

마침 우리 교단은 가을을 여는 9월의 첫 주일이기도 한 오늘을 재일동포선교주일 겸 개척선교주일로도 지킨다. 재일동포는 누구인가? 일제(日帝) 식민지의 후유증의 산물들로서,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다. 그들은 가해자였던 일본을 떠나지 못해 그곳에 거주하며 살면서, 일본인으로의 귀화도 거부하고 우리 한국인의 신분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 바람에 많은 차별과 배척을 당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모국교회가 함께 돕고 기도하자는 주일이다. 당연하다! 

 

개척선교주일은 주 예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비록 요즈음처럼 교회가 세상의 신뢰가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교회는 세워져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 생산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특히 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일반교회와 차별화되고 빛과 생명력을 발휘할 우리 교단의 교회들은 더욱 개척되어야 한다. 총회가 DMZ 접경지역에다 세우려는 <화해와 평화의 교회>는 당연히 설립되고 건축되도록 힘을 모아야만 한다.  

 

묻고 싶다. 여러분은 창조를 무엇으로 보는가? 없는 새 것을 만들어내는 일로 볼 것이다. 옳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다양하고 폭넓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시작과 뿌리와 기원(起源)과 역사(歷史)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은 확실히 사람을 보다 견고하게 한다. 자기를 보다 알게 되고, 해야 할 것도 보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대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이 부족하면 그 인생도 자연히 나약하다. 

 

그런데 ‘성서가 증언하는 창조’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만물의 시작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만물을 시작하고 존재하게 하는 창조주와 조물주의 영역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즉 ‘신의 영역’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 표현을 성서는 ‘태초’라고 말한다(창1:1,요1:1-2,요일1:1). 태초에도 차이도 있다. 창1:1의 태초(히,베레쉬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개시(開始)로서의 시작된 ‘시간의 출발점’이라면, 요1:1의 태초(헬,아르케)는 그 시초 이전에도 존재한 ‘시간적 차원을 초월한 영원(永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태초부터의 선재(先在)성도 바로 거기에서 증언한다. 

 

따라서 창조절 첫째 해의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성경이 열어 준 바로 그 창조의 깊은 원 세계를 함께 여행하고자 한다. 이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우리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종종 우리는 TV 프로그램에서 세계를 시청할 때가 있다. 보다가 내가 다녀 온 곳이 나오면, 얼마나 반갑던가! 우리도 이제 하늘 아버지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맞이하여야 하겠다. 머잖아 큰 기쁨 속에서 맞이할, 그 때를 위해서도 말이다. 

 

오늘의 세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인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창조의 주역으로 활동하셨음을 잘 보여준다. 성부께서 창조의 큰 주역이셨고(창세기),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말씀과 권능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창조의 역사에 직접 함께하신 분이셨으며(창세기 & 요한복음), 성령께서는 흑암과 혼돈의 태초에 질서를 잡아주실 뿐 아니라(창세기), 주의 종 요한을 하늘 세계에로 올려서 그곳 영적 생태계도 보게 하는 연결짓는 활동을 하게 하셨다(계시록), 

 

무엇보다도 이러한 본문들은 우리의 좁은 창조 이해에 큰 각성과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본문은 세 분 삼위 하나님의 역할 수행에 대한 증언에 못잖게, 그들의 창조 세계의 범위를 광대하고 무한하게 열어주신다. 이 점에서 저 계시록의 증언자인 밧모섬의 요한에게 임하셨던 성령의 감동이, 하늘나라의 여행을 시작할 우리들 모두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계4:1-2).  

 

그의 증언으로 우리는 창조에 대한 이해를 이 땅과 자연과 생존 질서에서는 물론(창세기), 인간의 육체적, 영적 세상과 시간대까지도 포함할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이 세상을 넘어선 영원한 나라에까지도 함께 볼 수 있는 광대한 영역(계시록)의 대 스펙트럼(spectrum)을 함께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만 보고 사는 사람, 둘만 보고 사는 사람, 셋 모두를 보고 사는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건강하게 최후의 승리자가 될까? 답은 분명하다. 당연히 세 모두를 함께 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성경이 열어준 광대한 세계를 모두 보고 살아가야 한다. 

 

창세기를 보자

본문은 성부이신 하나님의 ‘보이는 세상에 대한 창조’의 모습을 상세히 전한다. 그 때의 땅은 한마디로 무질서의 세상이었다. 혼돈(formless)과 공허(empthy)와 흑암(darkness) 위에 있었다. 그러다가 성령(聖靈)의 개입으로 비로소 질서인 생명의 틀을 갖추게 된다(2절). 이때의 창조 행위는 성자의 명령하시는 말씀(로고스)에 의하여 다섯째 날 동안 진행되었다(본문 참조). 

 

알고 보면, 그때 창조주께서 만드셔서 이 땅에 남겨주신 모든 것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과 인간들을 생존하게 하시려는 무상(無償)의 기본소득(基本所得)과 같은 것들이었다. 모두 인간 시대를 준비시키신 것들이었다. 그 내용들을 잠시 살펴본다 : 

 

1)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을 만드셨다(3-5절). 빛을 낮으로, 어둠을 밤으로 구별지어 주셨다. 

2) 둘째 날에는 궁창(광활한 공간-expanse)를 만드셔서(6-8절), 그 위를 하늘(sky)로 하셨다.

3) 셋째 날에는 궁창의 물을 나누어서 모인 물은 바다(seas)로, 뭍은 ‘땅’(land)가 되게 하셨다(9-13절). 땅에는 씨 맺는 채소(vegetation)와 씨가진 열매의 나무(tree)를 내게 하셨다.

4) 넷째 날에는 하늘 궁창에 광명체(발광체)들을 운행하게 하셨다(14-19절). 그 중에 태양이라     는 큰 광명체로는 낮(빛)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이라는 작은 광명체로는 밤(어둠)을 주관하     게 하셨다. 곧 그들로 징조(徵兆)와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주관하게 하셨다.

5) 다섯째 날에는 물들로 생물들이 해양-공중-육지에서 번성하게 하셨다(20-23절). 공중의 새들, 큰 바다의 짐승들,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복을 주셨다. 가축과 기는 것들도 그 종류대로 내게 하셨다. 

 

6) 지상 창조의 결과는 대축제(祝祭)였다! 기록자는 이렇게 과정마다 두 개의 추임새를 붙였다

① 모두 다 창조주의 ‘말씀 그대로 되니라’ - ‘And it was so’ / (7,9,11,15,24절)! 

② 조물주의 마음도 매우 흡족해 하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God saw that it was good/ 4,10,12,18,21,25절)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제4 복음서의 서막(序幕)으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계신 분이셨음을 선언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오래된 기독교의 가사로서, 후기 이스라엘의 지혜신학의 노선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1) 특히 여기에서의 ‘’태초‘는 창1:1의 천지창조의 개시라는 의미의 태초의 개념보다도 더 멀다. 모든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영원(永遠)까지를 소급하여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2절). 이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태초(시작,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선언한다(2절). 그것도 하나님과 하나이신 말씀(로고스)으로도 소개한다(1절). 그 말씀인 분이 창세기에 나온 이 세상 만물 하나하나가 현존(現存)하도록 명하시고 지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2)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만물(萬物-all things)을 그의 권능으로 직접 지으신 주체였음을 밝힌 것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복음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4절). 이런 선언을 우리는 또 다시 계시록에서 24장로들의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올린 찬양에서 듣는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하). 

☞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창조주와 ‘로고스’(말씀)로서의 존재가 하늘 보좌의 하나님의 존재와 동격(同格)에 계신 분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로고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시다‘(요1:1하)라는 복음서의 선언이 타당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3) 이런 창조주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셨으니, 그가 세상에는 어떤 존재로 나타나게 될까? 당연히 빛과 생명으로 나타나셨다(4절). 그것은 본래부터 자신은 빛과 생명이셨기에, 이 세상을 향해서도 그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비록 아둔한 세상이 그런 그를 몰라보고 배척하였을지라도, 그 안에 비추인 빛과 생명은 감출 수도 없었고, 이 세상 그 누구에 의해 통제될 수 없었다. 그가 발산하시는 빛과 생명을 이 어둠의 세상이 결단코 이겨낼 수도 없었다! 

 

4) 요한복음서는 빛과 생명이신 예수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전한다. 8:12에서는 주님이 직접 당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밝히면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예고하셨다. 당신의 생명을 받은 자들의 세상적인 삶도 당연히 빛으로 나타나리라고 밝혀주신 것이다(마5:14). 이것은 또한 세상의 기득권을 가진 어둠의 세력들로부터의 오해와 미움과 배척과 박해도 피할 수 없게 되는 고난의 삶도 예고하신 것이다. 

 

☞ 실제로 초기의 제자들은 세상의 어둠의 세력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에 시달렸다.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의 빛’이라는 거룩한 멍에를 내려놓을 수 없었기에 부득불 걸머진 멍에였다. 계시록은 그런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성도들 위하여 주님이 마련하신 또 다른 창조세계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 내용이다. 그 세계를 공개하며 고난을 이겨낼 동력을 주려는 주님의 배려였다

 

계시록을 보자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은 깊은 환상 속에서, 하늘로 초대받아 열린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신 보좌에 이른다(1-2절). 그곳의 생태 환경은 이 땅과 전혀 달랐다! 혼란과 파괴 대신에 질서와 평화가 가득한 곳이었다. 보좌의 영광과 찬란함은 형언할 수 없었고-(3절), 그 보좌는 마치 조정(朝廷)의 신하들 인양, 흰 옷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24장로들과(4절) 일곱 등불을 켜든 일곱 영과(5절), 앞뒤에 눈들을 가진 네 생물들이 전후좌우로 포진하여 있었다(6절).

 

1) 그 중에 여섯 날개와 안팎을 볼 수 있는 눈들을 가진 네 생물(生物)들의 찬양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주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시라는 내용이었다. 그들 네 생물들은 사자-소-사람-독수리 모습을 각각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첫 지상창조의 장이었던 세상에서 동물-가축-사람-공중을 각각 대표하는 생명체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이 거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도 돌렸다(8-9절). 내용으로는 찬양받는 보좌의 주도 재림(再臨)하여 오실 그 주님이 분명하였다. 

 

2) 24장로들의 찬양도 대단했다. 이들은 변화된 존재가 아닌 원래부터의 천상에서 존재한 불가시적 영적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자신들의 금관도 벗어드리면서 찬양을 올렸다(10절). 그들은 보좌의 주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실 ‘주 하나님’과 만물을 지으셔서 만물이 그의 뜻대로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 고백은 그 수많은 장로들 중에 어떤 장로가 진정 영원자 앞에 서는 선택을 받을 지를 알게한 장면이다. 그곳은 오직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긴 자들이 들어갈 세계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정의 평화 생명의 뜻을 거스르고, 이번 광화문의 태극기부대에 참여한 장로들 같이 코로나 판데믹을 악용하며 정부의 전복을 꾀하거나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일에 참여한 한국보수교회들의 장로 같은 이들은 절대 거부되는 세상임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것이다. 

 

결론이다

창조주의 창조 영역을 다시보고 또 새롭게 보자. 가시적인 이 지구촌 전체는 물론이지만 우주도 조물주의 영역이다. 인간세계는 물론, 자연중심의 생태계와 태양과 달을 비롯한 별들의 세계도 창조주의 무대이다. 보이는 물적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도 그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세계는 창조주의 손에서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 넓은 창조주의 생태환경 속에서는 조물주에 대한 배신자가 설 자리는 전혀 없었다. 그 분의 세계가 아무리 크고 넓어도 주인에게 등돌린 자들의 머리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은 피할 곳이 확실히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조물주께서 마련하신 영원하고 풍성한 영적 생태계가 분명히 그를 위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다시 추스르자. 우리 모두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질서와 품격을 잘 챙기고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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