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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7-07 (화) 21:20 3년전 847  

본문) 행 28:11-31, 욘 3:10-4:11, 막 16:15-20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이다. 주께서 예고하신 ‘땅 끝 선교’가 지금까지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지를 다시 돌이켜 보면서, 그 매듭을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다행이 매주일 이어진 세 본문들, 특히 사도행전의 본문들은 교회 선교의 역사적 흐름을 일별(一瞥)하기에 용이하도록 잘 정리되었다. 그 핵심 내용들을 잠시 정리해 본다. 

 

성령강림주일을 통하여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어떤 모습과 내용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보여주셨다. 첫째 주일에는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선포된 주의 복음으로 첫 교회가 예루살렘에 세워지면서, 세계교회의 모(母)교회의 기틀(모델)이 마련된 것을 보았다. 둘째 주일에는 복음이 이미 이웃 다메섹에 까지 퍼져 나갔음도 확인했다, 성령이 박해자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실 때, 이미 그곳에는 아나니아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주일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사도의 수장인 베드로가 무할례자이자 로마 주둔군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 가정에까지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 임한 제2의 오순절 사건으로 인하여, 복음의 땅 끝 선교의 불이 이미 유대 지역 안에서부터 타오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넷째 주일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사도 바울 일행이 터키의 아시아 일대 선교를 넘어 유럽 선교에까지 진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의 북부 마게도냐 선교지이자 유럽 선교의 거점이 그곳 빌립보를 통하여 구축된 것이었다.  

 

다섯째 주일은 그리스 남부의 아가야 지역의 핵심인 아테네 선교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세계 인본주의의 요람이자 세계 지성의 한복판으로 간주되는 곳에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영인 성령 하나님을 온 세상의 구주로 담대히 선포하였다. 그렇게 선교가 있는 곳마다 크고 작은 복음의 열매들이 있었고, 지역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면서 복음의 물결은 서서히 당시 세계 권력의 중심이자 심장부인 로마를 향하여 가고 있었다. 

 

여섯째 주일인 오늘은 주의 복음이 어디에까지 선포되었음을 전하는가? 바로 로마였다! 인간 황제가 온 세상의 신이 되었고 인간의 메시아로 행세하는 초강국 국제도시인 로마였다. 사실상의 땅 끝이었던 곳이었다(행1:8참조)!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팍스 로마에 의한 구원이 아닌, 나사렛 예수에 의한 구원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실로 세계사적 대변혁의 깃발을 꽂는 선교였는데-, 본문은 바울이 그것을 위해 어떤 모습으로 자기 소명(召命)을 수행하였는지도 전한다. 

 

마지막 증언에서 기록자 누가가 온 세상에 꼭 전하려는 것이 있었다. 로마에서의 바울의 증언의 결과는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유대인’과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이방인’이란 매우 차별적 구도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하늘 백성의 주역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 복음 수용의 우선권이 있음에도 그 권리 행사를 스스로 거부한 유대인들은 뒷무대로 퇴장하게 된다. 하지만 후순위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잘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역사의 앞마당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변화는 ‘만민에게 선포된 복음에 따른 구원’이, ‘예수를 구주로 받느냐 거부하느냐’의 여부로 공식화(公式化)했음을 말한다(요한일서4:15,5:11-12참조). 

 

이런 기록들이 왜 중요한가? 우리 교회와 기독교의 신앙이 이 세계 안에서 어떤 흐름을 타면서 오늘 나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 줌과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미래를 살리려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열매만 먹고 끝낼 수는 없다. 오히려 이어갈 역사를 위하여 또 다른 하나님 나라의 씨앗들을 뿌리는 수고를 해야 할 몫이 있다! 대비하는 마음으로 주신 말씀들을 살피자.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의 맨 끝장(28절)에 쓴 선교 보고서이다. 그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과정과 로마에서의 2년에 걸친 선교 사역과 그 결과에 대하여 매우 치밀하게 기록으로 전한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1) 바울 일행은 적잖은 시간과 숱한 어려움을 뚫고 목적지 로마에 도착하였다. 자신은 로마 황제에 의하여 재판받게 해달라고 청원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로마에 압송되어 온 것이다. 통로는 지중해의 선편(船便)이었는데, 겨울을 낀 일기가 사나워서 제법 오래 걸려 도착하였다. 그의 로마행은 그의 제3차 전도여행이면서 그의 선교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여정이었다. 게다가 그는 재판을 통하여 황제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행27:24참조). 

 

2) 바울의 선편은 멜리데 섬에서 수라구사로, 레기온으로, 보디올에 이르는 코스였다. 보디올에서는 뜻밖의 환대를 받아서 7일간 머무르기도 했는데, 그것은 보드올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의 초청에 응하였기 때문이었다(14절). 그후 로마에 도착하고자 압비오 광장(로마에서 65km)과 트레이스 타베르네(로마에서 50km)에 이르렀을 때에는,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마중과 로마까지 수행해주는 감격스러운 경험도 하였다. 

 

이 일은 보드올은 물론 로마에도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 모습이었다. 누구에 의하여 교회가 들어섰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들 교회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한 듯하며, 바울 사도의 로마 도착소식도 사전에 알고 영접한 것은 진정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었다. 대체 어찌 그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행11장에서 만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같은 성령 받았던 이들이 그 주역들이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선교의 손길은 분명하다. 당사자 바울은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위로를 받으면서 로마생활에 담대히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15절). 

 

3) 바울은 로마의 군(軍)당국으로부터도 경비병과 함께 생활하는 일(16절)과 셋집 생활까지 하도록 특별대우(待遇)를 받았다. 자기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활발하게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2년간이나 말이다(30-31절 참조). 

로마에서 바울은 무척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의 지금까지의 선교에 늘 부담을 주었던 유대 당국의 제재, 예루살렘 교회의 간섭과 완고함, 엄격한 유대교의 비판 등등으로부터 초연한 입장에서, 바울은 오직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가 본 바울 선교의 중심은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였다!  

 

4) 도착 사흘 후, 바울은 그곳 로마의 유대교당의 지도층 인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자신이 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왔는지를 밝히면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유대인들로서 오랫동안 함께 공유해 온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하여 설명하고 싶어서였다(19-20절). 

 

☞ 그곳에서 바울은 자신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배척을 당한 일은, 이스라엘이 품어온 오랜 소망에 관한 악인과 의인의 부활(復活)을 전한 일 때문임을 밝혔다(24:15절. 참조). 그 어떤 범법(犯法) 때문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러기에 로마 집정관이 자신의 무죄를 인정하고 석방하고자 했음에도, 유대인들이 반대하며 죽이려고 하였기에, 자신은 억울함을 소명하고 생명 보전을 도모하고자, 자신에게 부여된 로마시민권을 행사하여 자신의 재판을 로마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므로서, 그곳 로마에 까지 오게 되었음을 소명하였다(17-20절). 

 

5) 그들의 입장(立場)도 놀라웠다. 로마에 오랫동안 기독교회가 있었음에도(18:2참조), 이 유대공동체가 지금까지 유대로부터의 어떤 소식이나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바울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받은 적이 없었던 상황임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서 그의 사상, 그의 종파, 그리고 어디에서든 반대를 계속 당하는 이유를 더욱 듣고자 했다.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다음 날자를 정하고, 바울 집에서 2차 모임을 크게 가졌다(21-23,상).  

 

6) 실로 역사적인 무대였다! 바울에게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가 부여된 까닭이다. 그 선포의 핵심(核心)은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였으며(19:8 참조), 그것도 나사렛 예수와 그의 말씀과 행위 안에서 도래한 나라임을 선포하였다. 그 내용을 입증하고자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들을 폭넓게 인용하고 활용하였다. 곧 예수가 이스라엘의 오랜 소망으로서 예고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데 집중했다(17:2,눅24:26-27,44-47참조).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열띤 강론(講論)이었다!

 

7)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믿는 자(인정하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인정을 거부하는 자)로 양분된 것이다(24절). 누가는 그 현상을 이사야의 예고대로라고 전한다(사6:9-10).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 까닭이라고 설명했다(25-27절). 그러니, 이제는 남은 것이 무엇일까? 그렇다. 복음전파의 상대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지는 일이었다! 예수의 복음이 유대 중심주의에서 ‘믿는 자 중심주의’로 재설정하는 일이다! 핏줄이나 혈통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과 내용 중심으로 질서의 틀을 세우는 일이었다! 

 

8) 여기에서 사도행전은 결론(結論)을 내린다! 구원의 미래(未來)는 비(非)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敎會)에 속한다는 점이다. 마태와 함께 누가도,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더 이상 이스라엘과 그 역사의 연속선(連續線)상에 있지 아니함을 선언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오랜 희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완강히 거부함으로서 역사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 이방인 중심 교회들이 그 희망을 수용하면서 새 주역이 된 것이다! (물론, 사도 바울의 롬9-11장에서 그 점을 달리 보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구약을 보자

요나서를 다시 본다. 다시 볼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상과 인간을 맑고도 열린 눈으로 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바가 성취되면, 기꺼이 지금까지의 당신의 계획도 유연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하지만 그의 종 요나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선교의 대상이 이미 회개하여 변했고 하나님도 심판을 거두어 들였는데에도, 그는 여전히 상대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다. 고정된 종교적 세계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 ‘유연(柔軟)한 하나님과 완고(頑固)한 그의 종’의 영적 구도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는 보통 ‘완고한 하나님과 유연한 인간’의 구도를 상상한다. 그런데 요나서는 ‘유연한 하나님과 완고한 그의 종’의 모습을 제시한다. 곧 요나는 우리의 변하지 않는 완고함을 대변한다. 이유가 뭘까?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와 자신의 심성에 대한 무성찰이 그 원인이다. 보라. 하나님은 근본 심판과 멸망을 원하는 분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생명들을 다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범죄는 단호히 미워하지만, 회개와 새 출발에는 너무도 기뻐하신다(3:10). 돌아온 탕자를 조건 없이 대하듯, 회개한 탕자에는 매우 유연한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완고한 우리들에게 있다. 우리는 의인 의식과 자녀의식이 매우 강하다. 그것은 좋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형제를 대하는 마음이 너무도 배타적이며 차별적이라는 데에 있다. 즉 우리의 마음엔 두 아들을 품은 아버지의 마음이 없다. 그래서 공로와 업적과 질서라는 차별 선을 스스로 세우고, 형제를 심판하고 배격하며 따돌린다. 아비의 자비와 긍휼이란 영성의 부재가 이웃과 형제들에게는 유연성(사랑)의 결핍증 환자로 만들고 만 것이다. 

 

2) 요나가 참 하나님의 종이고 그의 적자라면,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 아닌 종의 마음에 붙들려 살고 있어서(요8:35-36), 회개하고 돌아 온 탕자인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3:10참조). 이런 치명적 질병에 예수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걸려 있었고, 바울의 복음을 거부한 로마의 유대교인들이 걸려 있었다(행28:24). 그 바람에, 그들은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을 대하면서 하나님께도 불평하고, 짜증을 남발하며, 차라리 죽는 게 좋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3,9절)

 

3)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본심도 알고는 지내왔지만(2절),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복음이 아닌 율법 집행자처럼 완고한 태도를 견지한 모습에 있다. ‘믿는 자들이 더욱 마음이 좁다’는 세간의 비평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 준 것이다. 참 신앙인이 못되었음을 보였다. 

 

4) 그러기에 이제는 핏줄이나 직분이나 종이란 신분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자. 그 대신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를 당신의 상속자요 아들로 인정해 주실 지를 고민하고 찾아보자!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의 기회는 유대인이나 요나나 완고한 로마의 유대신도들이 아니라, 차라리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들에게 그 나라를 상속할 기회가 주어짐을 알자.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주님의 승천과 함께 주신 말씀으로서, 세 본문의 서론이자 결론일 수 있는 말씀이다. 주님의 지상 명령으로서의 선교 파송의 대상은 천하의 만민(萬民)이었다(15절).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내 민족만 아니라 적성 국가인 니느웨의 백성들도, 이념과 종파와 혈통의 담을 넘어 모든 족속에게도 전해야 할 복음이 바로 우리가 받고 전할 복음이다. 

 

‘구원이냐 정죄냐’는 판단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 결정될 뿐이다(16절). 분명한 것이 있다. 몸으로 말씀을 좇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표적(標的)들이 따른다(17-18절).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입증해 주는 표지들을 제공해 주신다. 우리 다짐하자. 복음전파 명령에 순종하여, 분명한 신앙 전사의 반열에 오르자! 그래서 사도들의 행전인 성령행전의 속편(續編)을 우리들이 써내려가는 일들이 새롭게 일어나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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