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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맥추감사주일

관리자 2020-07-01 (수) 08:27 1개월전 116  

본문) 행 17:16-34, 요 8:31-38, 욥 28:12-28 

 

오늘은 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자, 금년 후반기를 여는 7월의 첫 주일이다. 특히 오늘 주일은 우리 한국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지난 반년 간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은혜(恩惠)와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세월을 잘 돌보아 주실 것을 구하는 믿음에서, 감사의 제사를 올린다. 특히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판데믹 속에서 맞이하는 감사절이어서, 우리의 마음은 더 절실하다. 이것이 가능함은 성령께서 당신의 택한 우리들을 감사(感謝)하는 존재로 세우신 까닭이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에서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려는가? 본문의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디에서 뵐 수 있고 또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가 베푸신 은혜와 선물이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 내용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세상과 이웃에게 전할 지도 일깨워 준다. 물론 여기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과 거기에서 얻어진 지식들이 필요하다는 과제가 있다. 진실한 외침은 깊은 만남과 기쁨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경우를 성찰해보자. 왜 나는 그 분을 기뻐하고 자랑하며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과연 나에게 여호와는 어떤 신이기에, 내가 지금 그의 증인으로 살아가는가? 간단할 수 없는 답변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내가 만나 믿고 사는 하나님을 분명히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나에게 하나님은 진정 어떤 분이시기에, 내가 그를 증언하고 외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특히 증언이 진정한 것이려면, 내 신앙의 주에 대한 고백도 진정한 것이어야겠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을 보자. 바울, 예수, 그리고 욥기서 지혜자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 여호와를 자기가 만난 삶의 현장(現場)에 전하고 심으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세계 최고의 인본주의 속에서, 예수님은 세계 최고의 신본주의 속에서, 그리고 욥기 지혜자는 세상에 가장 화려한 물질과 세속주의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만의 온 세상의 주(主)되심을 선포하며 그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선포하였다.

 

서신서에서 선교사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세계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정상에다 모시면서, 그가 왜 온 세상의 주시고 구원자이신지를 전했다. 그리스 아덴(아테네)는 당시 세계의 철학-지식-학문-종교-의학-학술-예술 등의 본산이었는데, 바로 그 영역에도 주인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그의 이런 외침의 근거는 하나님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신 참 주인이시다는 믿음 때문이다(25절). 그에게 하나님은 진정 최고와 최상과 최선의 신이었다. 어떤 신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다는 믿음에 충만했다.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 아들이신 당신을 당시 세계 최고의 신본주의(神本主義) 종교인 유대교의 중심에다 세우시려고 하셨다. 당시 세계 최고의 율법종교인 유대교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핏줄 자손이라는 명분 하나로 구원을 확신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예수에 대한 배척과 미움이었다. 핵심과 진리가 없는 허울종교를 만든 것이다. 그 바람에 마귀의 자식이 되어버렸다(44절),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오는 참 진리(眞理)와 자유(自由)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일에 통탄해 하신다. 결국 성령과 교회시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구약 욥기에서의 지혜자는 당시 물질주의(物質主義)와 세속주의(世俗主義)에 깊이 빠져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살길을 찾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찾으라고 강조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풍요로운 물질과 소유가, 인간의 삶의 문제 해결을 제공할 지혜와 명철까지도 제공한다고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일 뿐이다. 오직 조물주 하나님만이 그 길을 아시기에, 그 주님을 경외(敬畏)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23,28절). 

 

결국 이 세 본문의 증거들은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신 중의 신으로서, 최고(最高)의 신, 최상(最上)의 신, 최선(最先)의 신이시다는 뜨거운 믿음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런 하나님이시었기에, 그들은 온 세상에 하나님을 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외쳤다. 그 외에 신들은 모두 ‘하급(下級)신이요 생명 없는 우상(偶像)’이어서, 그런 것들을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의 삶은 고갈되고 비참해진다는 확신으로 선포에 임하였다. 

 

선교란 의지와 용기만으로 되지 않는다. 무조건 외친다는 식의 막무가내도 안 된다. 우선 확실한 컨탠츠(내용)이 필요하다. 우선은 내가 만나서 믿고, 내가 사랑하고 고백하며 자랑하고 싶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 확실한 하나님이시기에 전하고 싶고, 나누고 싶고, 그의 복을 세상에 끼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그럴 때 선교는 성령의 도움(능력)을 힘입게 되면서, 큰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이제 말씀들의 내용을 살펴보자 

 

서신서를 보자

복음 증거를 목표로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그 성에 우상들이 가득한 것에 격분(激憤)한다. 소위 세계 최고의 지성과 철학과 사상과 학문을 주도한다는 도성이 그토록 각종 우상 종교의 기반 위에 있었음이 몹시 어이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요즈음의 일본판과 같지 않았을까 싶다. 바울은 바빴다. 유대교 회당을 찾고 그곳 장터까지도 찾아가 예수와 그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뿌리 깊은 거짓종교와 우상문화와 이원론적 철학사상에 도전했다(16-18절). 

 

하지만 바울의 그곳 아테네 선교의 결과는 타지에 비하여 빈곤했다(32-34절). 예수와 죽은 자의 부활을 핵심으로한 복음이 오랫동안 영과 육의 이원론(Dualism)에 뿌리를 둔 헬레니즘이란 편리한 철학사상에 길들여 있던 그들을 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바울이 그곳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이, 그 어느 곳보다도 매우 모범적이었음을 본다. 특히 그의 생태신학(生態神學)적인 선교 메시지는 지금도 타종교인과 불신자와 지성인들을 상대로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을 전하는데, 매우 탁월한 자료가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요즈음 코로나 정국에 한국사회에서 화두(話頭)가 된 기본소득(基本所得)의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에서도, 바울의 증언은 유익한 자료가 되리라 보인다. 

 

1) 기독교 선교사 바울과 당대의 유수한 헬라 철학자들-, 이 확연히 다른 이들이 잠시나마 하나로 만나서 대화(對話)하고 접촉할 수 있게 한 요인은 두 가지였다. 

☞ 첫째는 그들(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의 새 것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왕성한 지식욕이다(18-21절). 그들은 자신이 높은 철학과 이념의 차원을 선점한 지식인이란 자부심이 큰 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새로운 지식과 주장을 펼치는 이들과의 만남과 접촉도 꺼려하지 않았다. 둘째는 그들은 종교심이 많았다는 점이다(22절). 그래서 모든 종교의 주장들을 피하지 않았고 관심을 보였다. 그 점이 바로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2) 사실 그들에게 유대인 전도자 바울의 주장은 아주 낯선 것이었다. 팔레스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주장도 그렇고, 그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3일 만에 살아나셔서 모든 믿는 자의 구주가 된 자라는 주장을 접하면서, 그들은 바울을 ‘엉터리 사상을 퍼뜨리는 궤변가’로 간주했다. 처음엔 ‘예수와 부활’이 신적인 짝(커플)인가도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바울을 불러 그의 주장을 일단 듣고자 했다. 그래서 당시 그 유명한 공공(公共)증언의 무대인 ‘아레오바고(Areopagus)’에 바울이 설 수 있었다(18-19절).

 

3) 바울은 그들 아테네인들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 점을 부각하면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unknown god)이란 이름이 부여된 신까지도 있음을 지적하며, 자기가 ‘그 알지 못한 신을 이제 알게 해 주겠다’라면서, 증언을 시작했다(22-23절). 

 

4) 바울의 신론(神論)은 그들 신론과는 아주 차별화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천지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주재(主宰)이심을 고하였다(24절). 따라서 그 주재이신 분은 인간이 세운 전(alter)에는 계시지도 아니할뿐더러, 무엇이 필요하여 인간에게 요구하는 분도 아니시다. 오히려 이 창조주께서는 이 세상 만민에게 생존에 필요한 생명과 호흡과 만물(cosmos)까지도 다 주시는 분이시다(창2:7,사42:5). 그 어떤 차별이나 조건도 없이 온 인류에게, 마치 기본소득(基本所得)처럼 제공하셨다! 

☞이 창조주의 기본소득을 분배 받고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응답하며 사는지 성찰해보자!

 

5) 그뿐 아니다. 창조주께서는 인류의 전 족속들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창1:28,눅3:23-38), 연대(年代)도 정하셨으며(창1:14-15,8:22,행14:17), 거주할 경계도 한정해 주셨다(창1:9-10,잠8:29,신32:8). 이는 인간이 하나이며 동시에 주어진 시간과 역사를 살아가며, 몸담고 살 터전도 부여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손길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섭리하고 있음을 밝혔다(26절). 

 

6) 그러면 인간은 그런 조물주를 어떻게 찾을 수 있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신을 접촉할 그의 형상이 내재되어 있다. 곧 영적 존재여서, 하나님의 능력과 개입을 힘입어 삶을 산다(창1:26-27). 자신이 하나님의 소생임도 감지한다(스토아/B.C3세기 시인 Aratus). 따라서 인간이 금-은-돌로 만든 신상에게 엎드리면 안 된다(27-29절). 그것은 창조주를 모독하는 일이다!

 

7) 결론을 전했다- ‘이제는 이 참 신을 알았으니, 무지한 세월로 지내온 일을 회개(전향)하라. 그 전능자가 아들 예수를 죽음까지 살리신 손길로 천하를 심판할 날이 올 것이다! (32-33절) 

☞소수의 씨앗들이 떨어졌다– 디오누시오(아레오바고 관리인/남) + 다마리(여) + 일부 사람들

 

복음서를 보자

유대교 지도자들과 치열하게 대립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충돌의 원인은 무엇인가? 율법(律法)에 대한 유대교의 아주 잘못된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인 공의와 사랑을 담아내야할 율법을 사유화하고, 613가지나 되는 율법들을 문자주의로 접근하면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할 법적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 인간들에게 안겨 줄 신앙양심의 자유, 복음의 자유를 아예 말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말하는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자가 하나도 나올 수 없었다. 오직 자기들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낯 뜨거운 짓만으로’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 처지를 헤아리신 하나님의 친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행태에 크게 분개하셨다. 그들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 자식들 짓이었다(38,44절). 오직 희망은, 그들의 율법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었다! 

 

1) 인간에게 참 자유와 기쁨을 안겨 주는 것은 진리이다(32절). 거짓은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진리는 평화와 자유를 안겨 준다. 진리가 무엇일까? 지존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가 진리이다(36절)! 그리고 그의 말씀이 진리이다! 진리 예수와 그의 말씀이 그를 믿음으로 좇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들의 자유’란 특별한 선물을 부여한다. 종(從)에게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영원히 거할 집이 부여된다(35-36절).  

 

2) 종교라는 틀에 갇힌 진리는 안 된다. 거기에서는 진리가 자유를 속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드러내고자 헌신하는 종교여야 한다. 진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진리위해 자기 부정도 서슴치 않을 때, 참 자유와 해방의 능력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완고한 율법종교로 전락한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배신한 마귀의 자식에 불과하였다. 진리를 드러내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복종하는 종교여야 한다. 

 

구약을 보자

욥기는 기원 전 3-4세기, 바벨론 포로 후기에 기록된 지혜문헌이다. 처참한 포로생활을 마치고 본국에 귀환했으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삶의 방황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살았다. 대부분은 자신의 살 길이 풍요로운 물질과 소유에 있다고 판단하고 그쪽으로 기우러진 듯하다. 고가의 보석과 금은 패물. 광산업이나 교역 등으로 풍요해지면, 자신이 살 길이라고 믿었던 듯하다(15-19절). 

 

욥기는 흔들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이끈다. 여기에는 인간들에게 ‘예상 가능한 하나님’도 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상 불가능한 하나님“도 전한다. 절대자가 세우신 모든 질서와 모든 사건들 속에는 전능자가 숨겨 놓으신 깊고 높은 뜻(지혜)이 있음을 전한다. 의인 욥이 까닭 없이 삶이 무너지면서도, 치열한 하나님과의 몸부림을 통하여 갑절의 복인(福人)으로 제 자리하는 모습에서(42:10-12), 욥기는 그래도 인간의 지혜와 명철의 해답은 여호와께 있음을 밝힌 것이다. 

 

1) 욥기 전파의 핵심은,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냐’였다(12,20절). 

2) 답은 이렇다.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어떤 피조 생물들이나 고가의 귀중품들로도 모른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 만이 그 길과 있는 곳을 아실 뿐이다’(12-14,23절). 

 

3) 다만 인간이 하나님만이 보유하신 지혜와 명철을 접(接)할 수 있는 그 길은 있다 – 바로 인간이 ‘주를 경외(敬畏)하고, 악에서 떠남에 있다’(28절). 이 점이 욥이 승리한 포인트였다!

 

결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그를 보여주고 전해야 할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선교인들이다.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 무대는 서로 다르다. 삶의 현장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든 간에, 우리의 하나님은 온 세상과 온 무리의 주님이셔야 마땅하다. 세상 만물과 만민은 모두 그의 소유들이며,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이 생존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우리의 생존을 위한 베푸신 기본소득인 생명,호흡,환경 등의 은혜의 선물들은 진정 거룩하며 신성하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 뜻을 물으며 세상을 이겨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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