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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환경주일

관리자 2020-06-03 (수) 12:43 3년전 948  

본문) 행 2:37–47, 눅 12:8-12, 민 11:24-29

 

오늘은 6월의 첫 주일이자 성령강림 후 첫 주일이다. 날씨도 완연한 여름에 접어들었다. 한국교회는 오늘을 환경(環境)주일로도 지킨다. 금년의 환경주일은 그 동안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에서 맞는다. 지구촌 전역에 불어 닥친 코로나의 덕택이다. 비록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생산 공장들이 쉬게 되어 실직하게 되며, 생산량도 대폭 줄어들어서 수입도 줄고, 가족들과도 강제로 방콕(?)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등의 낯선 일들이 많아졌지만-, 그러나 지구의 대기(大氣)만은 그 어느 해보다, 깨끗하고 맑고 투명하다. 

 

오죽 새로워졌으면 지구촌 곳곳에서 야생 동물들이 인간이 줄어 든 길거리들로 나와 활보하며 드러누워 휴식하거나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간들에게 뽐내는 사태들이 발생하고 있을까-! 아무튼, 코로나가 지구촌의 생명체들에게 안겨준 질서의 변화는 대단하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그 동안 잘못 길들여져 살아온 인간들의 문화와 반응이다-! 인간들이 오랫동안 자기 몸에 익숙해진 소비문화, 퇴패문화, 물질문화, 파괴문화 따위를 씻어내지 못하는 일들 때문에-, 코로나가 강제로 안겨준 새 환경질서를 코로나 이후(以後)에도 다시 끄집어내거나, 이전보다 더 강화시키려고 나서지 않을까 우려(憂慮)되기 때문이다. 

 

지난 5월초,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의 거리두기로 들어가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이태원이나 홍대 지역의 환락의 카페 등으로 쏟아져 들어가 밤새 놀다가, 결국엔 코로나 확진환자들을 다시 대거 양산하는 사태를 통하여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잠시 기회가 열린 듯하니까 순식간에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모습들이다. 왜 그런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던져주신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분명한 메시지란 무엇이었나? 바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모습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로 살면 망 한다’는 것이다. ‘새 삶과 새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짚는다면, ‘너만 살려하지 말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구원을 원하면, 너부터 살려라’는 메시지를 우리가 받은 것이다. 이게 어찌 미생물인 세균 자체의 요구이겠는가? 이것은 코로나 재앙을 도구로 삼아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겠는가? 

 

이런 변화의 요구들은 물질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과 영혼의 영역을 포함한 삶의 전 영역들도 포함한다. 인간 삶의 기저(基底)를 이루는 종교와 신앙과 문화의 영역에도 그 변화를 향한 요청이 더 뜨겁다. 사실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랜 전부터 우리들에게 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낡고 병든 현재에 매여 살아오다가, 결국 이렇게 세균의 총 공세를 통하여 갱신과 변화의 문제를 강제 당하게 되었다. 

 

환경의 변화는 어디서 올까? 사람의 변화에서 가능하다. 사람의 내면세계의 변화에서 나온다. 그 점에서 우리 인생의 내면과 영혼을 살려주는 신앙의 갱신은 화급한 과제이다. 그러면 그 신앙의 갱신은 어디에서부터 인가? 분명한 것은 제도와 겉모습들의 변신에서만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가정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프 라인에서 온 라인 예배로 드리기도 하며, 모이는 예배에서 흩어진 예배드림도 맛보았다. 기타 다양한 주일성수 형태의 변화도 맛보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 신앙의 갱신을 위한 답(答)일까? 아니다. 

 

진정한 갱신은 외형이나 형식이나 제도만이 아니라, 내용과 질적 변화의 갱신부터여야 한다. 외형은 내용을 채우고 드러내는 그릇이면 된다. 그런 점에서 강림 후 첫째 주일인 오늘에 주시는 말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가장 뼈대가 될 엑기스들이다. 보통 우리는 교회 갱신과 변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공통으로 나누는 말이 있다. 곧 ‘초대(初代)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의 원시(原始)교회로 돌아가자’이다. 초대교회는 원시교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서신서는 베드로 사도가 선포(宣布)하기 시작한 설교가 그 청중들인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무리들에게서 발생한 변화들과 그로 인하여 인류사에 형성되기 시작한 교회 공동체의 역사와 그 내용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복음서는 그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내세우기 시작한 선포 중심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일이었음을 확증해 준다. 성령은 바로 그 고백이 자기 것이 되도록 돕는 일을 하시는데, 인간의 구원도 그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서 결정되게 됨도 함께 말씀하고 있다. 

 

구약은 성령의 역사가 모세 시대에도 특정한 무리들에게는 있었음을 확인해주면서, 그 성령의 역사를 두고 모세와 그의 시종이었던 여호수아 사이에 나타난 확실한 차이를 통하여, 모세가 당시에도 그 성령이 모든 백성들도 공유하기를 바랐음을 전한다. 모세의 그런 바램은 오랜 세월이 흘러 요엘을 거쳐, 오순절에 성령이 모두에게 강림(降臨)하시므로서 비로소 성취되었다. 

 

서신서를 보자

베드로의 첫 설교는 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바로 그들 모두가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하며 기다렸던 메시아 장본인이셨다는 논지의 설교였기에-, 매우 도전적이고 공격적이었으나, 놀랍게도 그들은 성령의 개입을 통하여 반발 대신에 아픔과 찔림으로 받고 있었다(37절.상).

 

1) 그래서 나온 첫 반응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였다’(37.하).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그런 행위가 무지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자, 그 마음이 두렵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였다. 예수를 죽이면서 과격해졌던 살기(殺氣)중심의 마음이, 어느덧 두려운 마음중심으로 변해 있었다. 복음을 받을 밭(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2) 사도 베드로가 네 가지 단계로 답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회개(悔改)를 요구했다. 자신들이 먼저 잘못했음을 시인(是認)하라는 것이다. 비록 메시아를 보는 안목이 없어서, 과오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였을지라도, 그래도 변명 대신에 잘못은 잘못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권했다. 


☞ 요즈음, 이병박-박근혜 전직 대통령들의 사면을 일각에서 계속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먼저 자신의 과오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그것도 없이 정치적 거래만을 생각하여 사면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을 안겨 줄 것이다. 우리는 전두환 같은 이들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진정 용서받고자 하면, 먼저 진정한 사죄의 고백을 해야만 한다.

 

2) 죄 사함의 표지(標識)로서 물세례(洗禮)를 요구했다(38절 상). 용서에도 받았다는 표지가 필요하다. 계속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 정신과 가치를 보전하고 이어갈 표지를 자기 몸에 담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 물세례는 그래서 받는다. 


☞ 물세례의 기원은 침례(浸禮)에 있다. 범죄한 온 몸을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서 씻어낸다는 뜻으로 우리 온몸과 맘을 맑은 물속에 넣는다. 죄의 옛 사람의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다. 동시에 잠시 후에는 그 죽었던 몸을 물속에서 일으킨다.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남인 부활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물세례는 사람을 죽음과 부활 과정을 체험하게 하면서, 세례받기 이전과 이후의 존재가 달라졌음을 기억하며 살게 한다. 그러기에 이 물세례는 반드시 받아야만 된다. 

 

3) 그런 사람에게는 특별한 선물(膳物)이 주어진다. 바로 성령(聖靈) 세례이다(38.하). 이때의 성령세례는 물세례의 의미와 정신을 제대로 살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영적 혜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 전체이다(39절,10-11장,13:46,22:21,엡2:17 참조). 

 

4) 그 때에 듣는 주요 메시지는 ‘이 패역(悖逆)한 세대에 구원(救援)을 받으라’이다(40절). 이 설교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 날에 얻는 신도수가 무려 3천명이나 되었다(41절). 

 

5) 모이는 교회(敎會)가 태어났다! 다음의 4가지 요소들로 그 교회가 진행되었다(42절)  :

①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 예수의 생애, 말씀, 고난, 부활등의 증언들이 주 메뉴였다. 

② 서로 교제(코이노니아)하였다.

③ 떡을 뗐다 – 주의 성만찬을 나눈 것이다 – 고전11:20-21의 식탁공동체를 이루어 갔다. 

④ 오직 기도에 힘썼다 – 예수 중심의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자원이 되었다. 

 

6) 교회 공동체의 근간(根幹)이 될 다음과 같은 모습들이 밑받침 되었다(43-47절) :

① 사도들을 통한 기사와 표적이 많았다. 성령이 그들의 영적 권위를 세워주셨다(44절). 

② 서로 궁핍이 없도록 기본소득형 재산공유(財産公有) 공동체를 이루어 갔다(45절)

③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고 집에서는 떡을 뗐다. 고전11:20-21의 식탁공동체를 이루었다(46). 

④ 하나님 찬양이 충만했고, 백성들의 칭송도 받게 되면서, 구원 받는 자들이 증가해 갔다(47)

 

복음서를 보자

예수의 인자론(人子論)이 담긴 곳이다. 히브리어로 ‘벤 아담’이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말로서 ‘인류(=사람)을 이루는 각 개인(벤=아들)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을 진정으로 아는 유일한 인간이심을 말한다. 막10:45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속죄물로 내놓으신 인자 자신이셨다. 특히 이 인자는 언젠가는 자기 앞에서 심판받을 사람들을 위해, 먼저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매우 특별한 분이다. 인간 구원을 위하여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죽이신 참 인자(the Son of Man)가 바로 예수이셨음을 말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인자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전했다(요3:13). 본문에는 성령이 오셔서 세우신 원시교회는 이 인자이신 예수가 지금 원시교회 공동체에서 믿음의 주(主)로서 고백되고 있음을 전한다.  

 

1) 이 인자이신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是認)도 하고 부인(否認)도 하실 권세를 가진 유일한 분이시다(8절). 즉 인간을 제대로 아시는 예수만이 인간 심판의 척도(尺度)이시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가 누구를 시인하고 누구를 부인하실 것인가? 

☞ 인자의 시인을 받게 될 사람은, 사람 앞에서 인자인 예수를 시인한 사람이다(8절,하).

☞ 인자의 부인을 당하게 될 사람은, 사람 앞에서 인자인 예수를 부인한 사람이다(9절). 

 

2) 하지만 ‘지상(地上)의 인자 예수’는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오인(誤認)을 받아 거부되고 비방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알고 계셨다. 즉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진정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를 비방하고 죽이는 데 합류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까지 양지(諒知)하셨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10.상 눅23:34절.참조). 베드로도 바로 이 긍휼의 복음을 전하였고, 결국 교회는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들’이 대거 모이는 집단이 되었다. 

 

3) 하지만 절대 용서받지 못한 자들도 있다. 바로 성령을 모독(冒瀆)한 자들이다(10절.하). 그들은 누군가? 성령이 오셔서, 인자인 예수가 그리스도 주이심을 명백히 밝히고 깨우쳐주었는데도, 믿지 않고 비방하며 등 돌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유사한 자들이다. 

 

4) 진정한 성령의 사람은 당연히 어떤 역경에서도 예수를 증언하고 전하는데 앞장선다(11-12) 

 

구약을 보자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행군을 이끄는 지도자 모세는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불만으로 크게 시달린다(민11장 참조). 이를 헤아리신 하나님은 그를 도와 그의 직무를 나누어질 장로들 70인을 세우게 하신다.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세에게 부여하신 영(靈)의 분배도 포함한다(16-17,25 참조). 마치 예수께서 성령을 사도들에게 이양하는 모습과 같다. 

 

그런데 해프닝이 있었다. 장로들 중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이 장로소집에 불참하고 장막에 머물러 있었다. 소집에 불응했으니, 징계 대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소집된 장로 전체에게 임할 때, 불참한 그 두 사람에게도 임하면서 장막의 그들도 황홀 중에 예언을 했다(26절). 그 소식을 접한 모세의 보좌관인 여호수아와 지도자 모세의 입장이 아주 대조적으로 갈렸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말리소서’(28절)하였고,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영을 모든 백성들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라는 입장을 취하였다(29절). 

 

☞ 이 장면은, 막9:38-41에 나타난 제자 요한 형제의 입장과 그 보고를 접한 예수님의 상반된 입장과 비견된다. 모세의 의도는 무얼까? 비록 최후에는 자신들의 선택에 따른 심판이 주어지겠지만, 성령과 복음은 모든 만민을 위한 것이며, 상대의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받아보아 알게 하라’는 입장이었다. ‘열린 성령, 열린 복음’이 정도(正道)'임을 고한 것이다!

 

결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보혜사 성령과의 동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길과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깨워 주심으로서, 내 길이 온전해지고 또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기도가 절실한 연유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의 수준과 차원을 뛰어 넘게 하신다. 그게 현재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큰 두려움과 염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은 언제나 최상(最上).최선(最善)이란 기초 위에 있다. 귀하고 소중하며 가치 없는 것을 제시하는 성령은 상상할 수 없다. 성령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그 성령을 구하자. 왜곡되고 편협한 성령론이 지금 한국교회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성서적 성령론으로 돌아가자. 이번 절기의 세 본문 여정을 따라 그 정도에 반드시 들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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