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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강림후(7-2) - "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에게 고함 " / 이성호 목사(포항을 사랑하는 교회)

관리자 2020-07-17 (금) 17:40 3년전 1737  

본문) 사 65:17~25, 계 21:1~7, 눅 13:22~30


구약의 제사장인 신관(神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정체성 왜곡보다 더 심각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과 관련해서, 장차 죽어서 들아가는 낙원이나 영혼 구원에 국한한 강론입니다. 그것은 표피적인 이해입니다. 이번 주 성령강림 후 일곱째주일 예배력 본문은 이 점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본문의 말씀들은 이른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명명된 세계가, 피안의 황홀을 연상케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한 ‘좁은 문’ 뒤에 있는, 실제하는 ‘예수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 나라는 달걀 18개를 절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18개월을 구형하지 않으며, 세계 최대 아동 포르노를 유통시킨 중범죄자를 동일하게 18개월 선고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 나라는 별장에서 벌거벗고 망나니 짓을 하고, 출세와 권력을 위해 조국을 팔고, 동족을 죽인 살인자들이 큰소리치며 호의호식하지 못하는 세상이며, 고결하게 살아온 일생을 흉내조차 못낼 자들이, 자신의 죄스러움을 용납할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인생을, 조롱하며 능멸할 수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1. <질량보존의 법칙>

이사야서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처음으로 역설합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입니다. 예컨대 현실은 죽은 것 같고 망한 것 같으나 하나님의 통치, 곧 정의와 공의와 사랑과 연합된 세상이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이 호령소리는 아무리 죄악이 만연하고 폭력과 피흘림과 강포함이 흥황할 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라는 약속의 실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강자의 횡포와 폭력이 사라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자들의 성읍, ‘예루살렘’으로 은유된 예수 공동체에는 마침내 다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것이고(19절), 다시는 보금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땀흘리는대로 얻을 것이고(21-22절), 다시는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빼앗기지 않을 것(23절)입니다. 지난 날의 온갖 끔찍한 경험이 다 사라지는, 바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조차 나지 않을(17절) 영원한 샬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청자(聽子)는 ‘천하만민’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예언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구약에 등장하는 두드러진 적용입니다.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이 일차 ‘청자’라는 사실은, 이 말씀이 지닌 확실성과 엄중함을 구체화하며 현실화합니다. 즉 오늘을 사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여러분과 저입니다. 


2. <이기는 자> 

주전 1000년기와 2000년기의 아카드 문헌에는, 사건이 발생되고 난 후에 기록된 예언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의사(擬似) 예언서’라 부릅니다. 이같은 예언에는 “한 왕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정형구를 사용하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왕은 하늘과 땅을 새로 세우며,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며, 국가의 번영을 도모하고,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며, 사회의 올바른 기능을 발휘합니다. 


두 번째 본문인 계시록의 말씀은, ‘의사 예언서’와 같이 이미 되어진 일을 미래형으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기록자인 요한이 마치 미래로 가서 보고 온 것을 알리는 예언자로 보여지는 까닭입니다. 그날의 ‘새 하늘과 새 땅’인 예루살렘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 한 것 같고(계21:2)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마침내 ‘임마누엘’의 완성의 때가 도래합니다(3절). 그때에 다시는 우는 날이 없으며, 사망의 그림자가 사라질 것이며(4절), 만물은 신실하고 참되다 기록될 것입니다(5절). 


마침내 옛 백성에게 상징적으로 예시되었던 것이 성취됩니다. 이와 같은 묘사의 진실성은 교회, 즉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인 시련에 직면할 때, 믿음과 소망과 결심을 강화시켜 주고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궁금해 집니다. 이 모든 것을 상속으로 받는 신부요, 하나님 백성이요, 새 예루살렘인 그들은 누구인가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 그들은 “이기는 자”(7절)입니다. 


3. <구원의 상속자>

예수님 시대,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읍을 회복시켜 달라고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미래에 대한 일반적인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겨자씨와 누룩을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눅13:18).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를 갖추며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3절) 예수님을 대답을 빙빙 돌리시지 않을뿐더러, 묻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실천적이고 단호한 행동을 촉구하십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잔치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한다는 전제가 붙은 대답으로, 예수님은 출입 제한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표현이 좀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으시나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으리라’가 맞습니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가 맞습니까? 왜 이렇게 번역되었을까요?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ijscuvw(이스퀴오)라는 단어인데요,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할 능력이 있다, ~할 능력을 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ijscuvw(이스퀴오) 앞에 부정어 ouv(우)가 붙은 형태로 쓰여졌습니다. 


- 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원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 버릴 수 있는데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칠 수 있는데 고치려 하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 무엇일까요? 바꿀수 있는데 바꾸려 하지 않는 것, 그거 말입니다. 불법과 부정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사람, 이사야서의 표현으로 하자면, 종교 생활은 잘 하지만, 내가 가진 유리한 조건을 휘둘러서, 이웃을 절규하게 하고 부르짖게 하는 사람, 주택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보유해서, 정작 필요한 이들은 구할 수 없게 하는 사람, 아무리 땀을 흘려도 쪼들릴 수 밖에 없는, 좋은 자리를 강한 자가 선점하는 구조, 수고가 헛되는 사회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 바로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사람’이겠습니다. 


(27절)하반절 말씀입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이 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은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미워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니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이여야 합니다. 교회요, 예수 공동체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의 신부요, 약속의 상속자요, 불의를 이기는 사람이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하나님 백성인줄로 믿습니다. 


대한민국의 유수한 교회들이 부정한 정치 권력에 입을 맞추고, 돈과 부동산에 매몰되어가고, 엽기적인 섹스에 탐익하며 스스로 색동옷을 입고 무당이 되어갑니다. 싸워야 할 것과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만진창이가 되었지만, 접대부의 화장술과 같은 장식으로 꾸미지만 이내 그 천박함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합니다. 악에서 떠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런데 이 ‘힘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싸우라’입니다. 영어로 ‘싸우다’, ‘다투다’인 fight입니다. 번역들이 ‘힘쓰다’로 되어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아곤(ajgwvn) 이라는, ‘싸움’에서 유래된 아고니조마이(ajgwnivzomai)입니다. 여러분, 이 한주도 파이팅 하십시오. 잘 싸우십시오. 성경대로라면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 한주도 주안에서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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