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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7-1) - " 그 날이 오면 " / 서재경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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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강림 후(7-1) - " 그 날이 오면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19-07-26 (금) 14:36 4년전 3322  

 

본문) 미 4:1-4, 계 19:1-10, 마 25:31-46

 

신앙은 무엇보다 ‘그 날’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날’은 주님의 날, 하나님의 날이지요. 그 날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이지요. 우리는 오늘도 그 날을 기다리고 그 날을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날이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미가의 ‘그 날’

일찍이 예언자 미가는,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있는 산”이 가장 높이 우뚝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민족과 열강을 심판하시고, 모든 칼과 창을 꺾어 버리시고, 평화를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데 미가는, 하나님께서 그 날에 이루실 평화의 비전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주 담담하게 그립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4절) 

사람마다 자기 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너무 평범하고 밋밋해 보이는 풍경이 아닙니까? 자기가 심고 가꾼 나무 열매를 자기가 거두어 먹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자기가 심은 나무 아래 앉아서 자기가 쉬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미가가 기다리는 그 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아니, 미가만이 아니지요. 수다한 예언자들이 바로 이런 날을 기다리고 이런 날을 기도했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서슬 퍼렇게 선포했던 그 정의의 날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안에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그들이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그들이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암 9:14)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가 그토록 기다리는 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사 62:9)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사 65:21) 시편 시인도 은혜롭게 노래했지요.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시 128:2)

어떻습니까? 자기가 심은 나무 열매를 자기가 거두고, 자기가 심은 나무 아래 자기가 쉬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파루시아’의 실현이라는 말일까요? 그게 무슨 복이요 은혜일까요? 그 날이 오면,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거나, 하다못해 흥부처럼 박 속에서 대박이라도 터져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날은 우리의 日常을 깨고 들어오는 非常한 날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예언자들은 그 날의 풍경을 그렇게 그렸습니다. 그 날이 오면, 사람마다 자기 나무 아래 앉아 평화롭게 살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심고도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합니다. 뼛골 빠지게 나무를 가꾸고도 그 나무 아래 앉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세상에는 풀 한 포기 심지 않고도 온갖 나무 열매를 독차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을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하게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가의 시대에도 그랬고, 아모스의 시대에도 그랬고, 이사야의 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심지어 다른 사람의 열매를 빼앗는 폭력을 ‘능력’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지요. 

미가의 그 날은 그렇게 권력과 모략으로 힘없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자들을 심판하는 날입니다. 또한 그 날은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칫날

요한계시록은 오롯이 ‘그 날’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 ‘그 날’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주제이지요. 그 날을 기다리며,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어서 오십시오! 계시록은 주님을 기다리며 끝납니다.

그런데 모든 초점을 ‘그 날’에 두고 있는 계시록은, 드디어 그 날이 이루어지는 막바지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기 직전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왕권을 잡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바탕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 어린 양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죽임당하셨던 어린 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뜬금없는 듯하지만,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왜 ‘어린 양’일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뵙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 1:29)고 말하지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을 예수님의 상징으로 삼은 것일까요? 양에 대한 이스라엘의 유별난 애정 때문일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 상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양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 양의 반대편에 있는 상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앞에는 ‘짐승’들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양의 대척점에 있는 짐승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부터 이 짐승들이 출몰하지요. 용의 졸개요 사탄의 하수인이기도 하고, 세상의 우상 권력이기도 한 이 짐승들은 무시무시하고 포학한 야수들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뿔이 열 개나 되고, 표범 모습에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졌습니다. 이런 괴물 짐승은 양에게는, 어린 양에게는 너무도 위협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양이야 표범 한 마리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표범과 곰과 사자의 합작품에 뿔이 열 개나 달린 엽기적 괴물이니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이런 괴물 짐승과 어린 양이 맞서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세상에서, 강력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괴물 짐승을 따라야 할까요? 괴물 짐승에게 한 입 거리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양을 따라야 할까요? 여러분이라면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아니, 지금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있습니까?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서, 요한은 괴물 짐승이 아니라 어린 양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짐승 권력은 크고 강력한 것 같지만, 그러나 곧 무너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계 18:2) 요한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빨간 짐승을 타고, 자주색과 빨간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더러운 것이 가득한 금잔을 들고 있는 여인,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는 그 음녀의 이름의 비밀(계 17:3-4)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름은 ‘바빌론’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한계시록의 시대에 바빌론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된 나라니까, 여기 바빌론은 실제로는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어린 양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요 박해받는 길이지만, 그러나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괴물 짐승이 무너지고 어린 양이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이 그리는 그 날, 어린 양의 혼인 잔칫날은, 포악한 권력과 상술로 향락과 포만을 누리던 괴물 짐승이 멸망하는 날입니다. 짐승들의 난장이 끝나고 어린 양의 잔치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와 권력은 어린 양과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이 흘린 피로 이룬 것들이지요. 그 날은 이렇게 억울하게 흘린 피의 원한을 갚는 날이기도 합니다.(2절) 

 

인자가 오는 날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른바 마태복음이 전하는 마지막 심판의 비유이지요.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그들을 가르십니다. 그 날에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우신다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날, 인자가 오시는 날은 심판하는 날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자들과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자들을 판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흥미롭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왜 그런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인자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 입혀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서 ‘人子’라는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인자가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셈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을 잘 모셨으니, 그런 큰 복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양의 자리에 선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께 잡수실 것을 드리고, 마실 것을 드리고, 영접하고, 입혀 드리고, 찾아갔느냐고, 우리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 치매인 걸까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입니다. 이들이 양무리라면, 그중 가장 작고 작은 양, 가장 어린 양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어린 양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흔히 우리는 예수님 하면 ‘목자’를 떠올립니다. 양 떼를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이끄는 인자한 목자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까지 찾으시는 긍휼한 목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는 목자이십니다. 양을 목숨보다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작은 자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어린 양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역사에 어린 양으로 계십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듯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죽임당한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우회해서 예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린 사람을 지나쳐서 예수님께 드릴 수 없고, 나그네를 외면하면서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을 혐오하고 배척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에,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날’에 대한 미가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미가는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 아래 앉아 평화를 누리는 날을 꿈꾸었지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권력자에게 유린당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요한은 죽임당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악한 괴물 짐승이 지배하는 세상에 맞선 어린 양과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의 마지막 승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인내하고 희망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기 나무 열매를 자기가 누리는 세상을 넘어서, 자기 열매를 작은 자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열어 주셨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를 지켜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을 받드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마지막 심판 날에 양의 자리에 설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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