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령강림후(14-3) - "치료하시는 하나님" / 이훈삼목사 > 성령강림절

본문 바로가기

성령강림절 HOME > 설교올리기 > 성령강림절

[첫째해] 성령강림후(14-3) - "치료하시는 하나님" / 이훈삼목사

관리자 2018-08-24 (금) 20:22 5년전 4799  

본문) 열왕기하 5:1~14 야고보 5:13~20 마가 5:1~12

 

1. 두려운 질병

 

1) 고심 끝에 여름휴가 날짜를 잡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루 이틀은 연로하신 장인장모님과 식사도 하고, 나머지 날들은 지방의 동기 목회자들 몇 명을 찾아가서 만나기로 계획했습니다. 서해안 따라 내려가면서 그냥 편하게 만나서 식사하고 이야기 하다가 적당히 자고 올라오면 한 주간 지나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 솔릭이 한반도를 관통할 것이라는 예보가 뉴스를 지배했습니다. 계산해보니 지방으로 내려가는 일정과 태풍이 올라오는 일정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모처럼 아내와 갖는 황금 휴가인데 계획대로 지방을 갔다 올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고심하다가 아쉽게도 지방 가는 계획은 접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강풍과 폭우가 쏟아지는 도로를 운전하는 것은 사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또한 교회 건물이 태풍을 잘 견뎌주겠지만 언제인가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겨 빗물이 쳐들어오면 낭패인데, 방송에서 연일 태풍에 잘 대비하고 미리 점검하라는 경고가 이어지니 불안해졌기 때문입니다. 천재지변이든 인재든 내 삶에 질병이나 사고가 찾아오면 어찌하나 생각만 해도 두려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2) 근래 우리 교인들 여럿이 크고 작은 수술도 하고 뜻하지 않은 질병에 직면하여 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안쓰럽고 주님이 힘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올해 말이면 우리 교회 바로 옆 구 시청 자리에 성남시 의료원이 완공되어 개원할 것입니다. 꽤나 큰 종합병원이 생기게 되어 성남의 구 시가지 지역에서는 숙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형 병원에 가 보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놀라게 됩니다. 병원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데 병원에는 사람들이 항상 많습니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크고 작은 병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작은 병원보다는 실력과 장비 등 좀 더 믿을 수 있는 대형 병원에 환자들이 몰려들면서 수술환자들도 그 병원에서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채 강제로 일찍 퇴원해야 합니다. 수술한 다음날 바로 퇴원시키는 대형 병원도 많습니다. 병원에서 며칠 더 치료받고 회복한 다음에 퇴원하면 안 되겠느냐는 환자의 애처로운 호소에 의사는 차갑게 응대합니다. 환자분이 퇴원하지 않으면 다른 중환자가 죽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더 있고 싶다고 말할 환자는 없습니다. 그 큰 병원에 매일 환자들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침상에 실려 엘리베이터에 타고 이리저리 옮겨지는 환자들 중에는 노인도 많고 젊은이나 어린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지치고 긴장된 표정이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달고 다닙니다.

 

3)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금 투병 중인 사람들이 치료 받고 회복하여 건강해질 수 있을까? 더 이상 고통 가운데 신음하지 않고 절망 가운데 갇히지 않을 수 있을까? 환자의 비중이 점점 더 증가하는 세상, 점점 더 노쇠해지는 인류에 대해 교회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2.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고

 

1)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성경 시대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치료에 대한 갈망이 더욱 깊었습니다. 게다가 질병의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무지의 형틀 안에 갇혀 있었고, 원인을 모르니 대안도 있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건강한 삶에 대한 의지는 마찬가지로 강렬하나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과거와 현재가 천지 차이입니다. 과거에는 변변한 의술이 없었고 거의 주술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할 곳은 거기 뿐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을 찾았고 실제로 낫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은 왕의 총애를 받는 군 지휘관이었지만 악성 피부병에 시달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나병은 문둥병이라기보다는 악성 피부병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피부병은 참 괴롭습니다. 요즘에는 아토피 환자가 많습니다. 아마도 환경오염에 의한 불행한 현상일 것입니다. 아이가 밤새 피가 나도록 가려워서 긁으면 그를 바라보는 부모는 영혼에 거친 상처가 나고 피가 흐릅니다. 피부병은 잘 낫지 않고 오래가며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유기농 음식만 먹이고 좋은 공기 마시고 깨끗한 물로 씻고 마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도 쉽게 치료가 되지 않아서 아이도 부모도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나아만도 권력과 돈이 있으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치료법을 추천받았을 것이고 치유를 위해 온갖 묘약과 신비한 처방을 실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낫지 않았습니다.

육신과 영혼 모두 중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스라엘까지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엄청난 선물과 함께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치유를 요청하려한 나아만 장군이었지만 정작 엘리사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서 지나가는듯한 소리를 툭 던집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어라. 이것이 정말 효과 있는 처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우선은 강대국 시리아의 군대 장관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틀려먹었습니다. 엘리사의 태도가 무례하고 그의 처방 또한 신뢰를 갖기도 어렵습니다. 분노하여 그길로 돌아서 가려는 나아만을 동행자들이 겨우 말려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을 씻으니 평생 괴롭히던 나병이 사라지고 나아만의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꿀 피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자들의 횡포에 맞서 정의를 선포하는 역할과 함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주고 질병을 치유해주는 사명도 감당했습니다.

 

3) 예수님의 삶을 간단히 정리하면 가르치고 치유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또 다른 사역은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에 비해 치유는 훨씬 더 급박하고 직설적입니다. 낫든지 안 낫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질병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환자들을 가까이 하면서 그 환부와 냄새, 그리고 이들의 가난한 현실까지 직접 만지고 호흡하면서 주님을 찾아온 모두를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 피부병 환자, 손 마른 자, 다리 저는 자, 말 못하거나 소리를 못 듣는 자, 마침내 죽은 사람까지 살려주셨습니다. 육신의 질병과 함께 귀신들린 사람들도 말끔하게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도 주님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는 갈릴리 지방을 넘어 유대 지방에까지 확산되면서 적잖은 논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능력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일까? 귀신을 내쫓는 것은 오히려 그가 귀신의 조종을 받는다는 표시 아닌가? 뭐 이런 의심과 논란입니다.

주님의 삶에서 치유이야기를 빼면 반 밖에 남지 않아 무척이나 허전해 질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삶에서 병자 치유는 삭제할 수 없는 핵심 사항입니다.

 

 

3. 치유를 회복하는 교회

 

1) 교회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는 것이 교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의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하신 사역을 세상에서 끊지 않고 이어가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교회의 지향 점은 주님이 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이 본질을 상실하고 대신 다른 것으로 채울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2) 주님이 안 계신 지상에서 한 줌에 지나지 않았던 교회가 모진 고난을 헤치고 생존하며 세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주님처럼 치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야고보 5:14~15)

 

초대교회 사역의 핵심은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질병에 걸리면 다른 것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목회자 등 지도자)을 초청해서 기도하라고 강권합니다.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다, 병든 자를 낫게 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병든 자가 자동적으로 낫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낫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런 치유의 능력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서 가능한 것임을 빠트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어떤 신령한 사람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교회는 병자를 외면하거나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했다는 것입니다.

 

3)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교회로 찾아오는 환자가 많았습니다. 다친 사람, 암 환자, 정신병자, 뇌전증(간질) 환자, 심지어 송아지 아픈 것도 기도해서 낫게 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과거 교회는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유하는 종합병원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아프면 당연히 교회부터 왔고 그래도 안 되면 병원으로 갔습니다. 모두가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는 전체적으로 신유의 은사를 발휘하곤 했습니다.

21세기 지금의 교회는 더 이상 병자들이 치료해달라고 찾거나 교회의 치유 능력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교회 또한 병자들을 치료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환자도 으레 교회가 아니라 병원부터 가려하고 교회도 당연히 병원으로 가라고 안내합니다. 이것이 마치 세련된 기독교 신앙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현상이 정말 옳은 것일까?

 

4) 우리나라는 1989년에 모든 국민에게로 의료보험제도가 확대되었는데 이것은 정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노동자, 농어촌 그리고 도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 대상이 됨으로써 이제는 누구나 병원에서 쉽게 진료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병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서 교회에서 치유받기를 간구하던 이들이 이제는 아프면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병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교회는 병원에 이양했습니다. 한편으로 교회는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교회가 병자를 치유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분명 교회를 향한 치유의 요구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치유의 능력이 행해졌고 그를 통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헌신과 그를 지켜본 간접 체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유는 근본적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역할을 했습니다. 백 가지 이론도 한 번의 체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병 치유는 한국교회의 존재와 선교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 한국의 대표적 교회들의 성장은 이러한 치유 능력에 근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5) 이제 세상은 변했습니다. 아픈 이들이 더 이상 교회의 치유를 기대하지 않으며 교회도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한 세대 사이에 교회가 지닌 치료 능력은 빠르게 쇠퇴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도 비슷하게 침체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아프면 병원가지 말고 교회에서 기도에 전념하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 모든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의술은 하나님의 능력과 대척점에 있기에 부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병은 의사가 치료하는 것이니 아프면 당연히 교회가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고 모든 질병은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세련된 믿음인 것일까?

 

이러한 한국교회에 오늘 하나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야고보 5:14~15)

 

예수님 시대나 초대교회 시대나 한 세대 전 한국사회나 현재나 똑같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질병 앞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해야 할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 믿음 위에서 전문적 지식으로 내 질병을 치료할 병원의 처방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인간의 의술에 기대지 말아야할 것 같고 의학을 따르려면 하나님 말씀은 그저 덕담 정도로 치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의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지식이 발전하여 의학은 첨단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의학적 치료 방법은 눈에 보이는 반면 하나님의 손길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병 치료는 하나님이 아니라 병원이 담당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일반화됩니다. 병 치료 영역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점점 희미해지고 교회는 그저 마음의 위로와 격려만 담당하는 역할로 축소됩니다.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모든 책임과 권한은 이제 전적으로 병원에 달려있습니다. 우린 지금 이런 시대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학의 발전도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입니다. 병원과 교회는 서로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발전하는 의술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백하면서 치료에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술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게 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6) 이것을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복음의 치유 능력과 책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병자를 향해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의사는 하나님의 뜻을 기술적으로 실행하는 사역자임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이 병 치유 기능을 교회로부터 빼앗아 병원에 맡겼다고 해도 교회는 병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능력은 교회에 있으며 이 책임과 능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저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낫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질병이라는 두려운 현실 앞에서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살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치유의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는 병을 고치는 치유 능력의 회복을 통해 참 교회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