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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8-2) - " 모두가 하나님의 것 " / 김거성 목사 > 성령강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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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강림후(8-2) - " 모두가 하나님의 것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4-07-13 (토) 10:24 1개월전 210  

본문) 신 8:1-20; 롬 13:1-7; 마 22:15-22

 

1. 말머리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얼마 전까지 전세계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교회에 대면예배를 금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일부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또 교계 일각에서는, 실은 대부분 사이비 쪽이었습니다만, 이를 위반하는 일들을 일으켜 사회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일들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단톡방에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를 국회에 요청하는 국민동의청원을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마 몇 십 분씩 기다려 참여하신 교우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미 동의자수가 백만을 넘어 2백만을 향해 가고 있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국민들 가운데 탄핵에 찬성하는 비율(58.8%)이 반대하는 비율(38.9%)보다 높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지는 대략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여러 교회들에서 태극기부대 같은 내용들이 단톡방에서 돌아다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마 22장 본문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를 예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은 바로 이 주제, 즉 ‘교회와 사회’, ‘교회와 국가’, 나아가 ‘교회와 세계’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2. <그리스도와 문화>

 

교회와 세계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리쳐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라는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가 있었습니다. 신학자이며 정치사상가로도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동생인데,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을 통해 다섯 가지 유형으로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대립 관계에 있는 유형입니다. 이를 니버는 ‘Christ Against Culture’라고 표현했습니다. 문화로 표현되는 현실세계는 부패해 있기 때문에 배격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톨스토이에게서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찾아냈습니다. 권력욕과 폭력 행사의 근거 위에 있는 국가는 사랑과 겸손, 용서, 무저항 등의 기독교인의 생활과 병존할 없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일치 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The Christ of Culture’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교사요 계몽가처럼 문화와 적응하고 조화를 이루어갑니다. “그리스도는 문화의 그리스도이며 인간들의 최대 임무는 그의 최선의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셋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종합 유형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이를 ‘Christ above Culture’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유형은 중세 유럽에서,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복음과 결합된 문화를 추구한데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넷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역설 관계에 있는 유형입니다. 그는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가 이원론적으로 긴장과 충돌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과 대결하고 있는 ‘역설’의 상황을 바울이나 루터에게서 찾았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유형으로, 그는 그리스도가 문화의 변혁자로 역할을 하는 형태를 설명했습니다.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와 결합한 문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명과 극단적으로 대립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서나 어거스틴이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를 추구한 바에서 이런 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리쳐드 니버가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유형론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3. 신명기 8:1-20

 

오늘 구약성서 본문은 신명기의 일부입니다. 신명기를 필두로 이른바 전기 예언서,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를 ‘신명기역사서’라고 부릅니다. 크게 보면, 신명기역사서는 이 명령을 준수했을 때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과 이를 무시했을 때 오는 멸망을 핵심으로 삼고 역사를 ‘기술’했다고, 아니 ‘해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8장 본문을 통해 모세를 통해 전달하신 하나님의 명령들을 왜 출애굽 공동체가 준수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바탕은 바로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11절)를 어기지 않고, 야훼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나아가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의 길을 걸어갔음을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로마서 13:1-7

 

오늘 사도서간문 본문인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1절) 나아가 그는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2절)이라고 강조합니다. 또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는 존경하”(7절)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예로부터 논란거리가 되어왔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인 1974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교역자나 신자 중의 일부 사람들이 종교인으로서의 본연의 위치와 영역을 벗어나서 정치적인 집단행동에 가담하거나 그러한 행동에 합류하라고 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을 본인은 매우 걱정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위가 비롯되는 민주정부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악을 행하는 자일 것입니다. … 우리 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 듯합니다. 본인은 그러한 비난은 그릇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2016년 촛불항쟁 때 일부 신학생 등이 ‘박근혜 퇴진 반대’를 외치는 근거로 이 로마서 13장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일제시대에도 바로 이 본문을 일제 강점을 합리화시키며 국가 권력에 복종을 요구하는 구절로 삼기도 했다고 합니다.

 

5. 로마서와 바울, 로마교회의 상황

 

로마서는 신약성서에서 서신들 가운데 가장 앞에 나오지만 실은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바울 자신이 가장 깊이 확신하는 바를 요약해 놓은 것” 또는 ‘선언서’(manifesto)라고 보거나, ‘바울의 유언장’(Paul’s last will and testament)이라고 결론지은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처럼 당해 교회나 바울 자신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그 교인들을 향해 쓴 편지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구체적 상황과 무관한 보편적 원칙이라면 이 로마서, 특히 13장은 성서 전체는 물론 바울 서신 내에서도 일관성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자의적으로 가감하거나, 또는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거나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로마서 또한 구체적인 상황, 사회-정치적 상황과 신학적 상황 등이 포함되고 통일되는 ‘목회-선교적 상황’을 배경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을 때에는 이처럼 로마교회의 상황, 바울이 처한 상황, 즉 ‘삶의 자리’(Sitz-im-Leben)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로마교회는 처음에 유대인 중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또 이방인 중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 이른바 ‘경건한 자들’,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합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 18:1-2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뒤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본도 태생인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다. 아굴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린 까닭에 대해서 <글라우디오의 생애>(Vita Claudii)를 집필한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글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는데, 이는 그레스도(Chrestus)에 의해서 사주받은 그들이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 로마 시내에 집중된 무산대중과 외인집단에게 식량공급이나 주택사정 등이 원활하지 못했고 도시분위기의 교란 등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소요로 말미암아 글라우디오는 주후 41년 집회금지령을 내렸고 49년에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여기 언급된 ‘그레스도’는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가 소요사태의 주동자인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후 54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네로 황제가 집권하면서 이 칙령을 해제하여 유대인들의 귀환이 허락됩니다. 그들이 귀환한 다음 로마교회에는 유대교 율법 준수가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로 말미암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정확하게는 ‘믿음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갈등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미 갈라디아 교회에서 발생했던 사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4-15장에 나오는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갈등은 이러한 배경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제 논문의 요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13장도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거기서 그의 선교사역을 지원받고 스페인으로 향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상황에서 다시 반로마 소요 등으로 또 한 차례 추방령이 나오거나 해서 로마교회가 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고민을 담아 이 로마서를 썼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의 권세에 대한 복종 언급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상황과 무관한 ‘원칙’이 아니라 앞서 설명한 당시 로마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을 향한 권고였을 것입니다.

 

6. 마태복음서 22:15-22

 

로마서 13장을 오해한 사람들은 오늘 복음서 본문까지도 그 바탕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했으며, 예수께서도 가이사, 즉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려라”고 하셨으니 신약성서는 일이관지하게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은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 아닌 ‘가이사의 것’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만물의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구속주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8절)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앞서 언급한 본문과 같이 답변하실 때, 당시의 지배집단이던 바리새파와 헤롯당원들은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이해했을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신 것으로 말입니다. 다만 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빠져나가는 대답을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조차 ‘탄복하며(ἐθαύμασαν)’(22절), 놀라며, 감탄하며, 경악하며, ‘그래, 우리가 졌다!’라고 인정하며 예수를 남겨두고 떠나간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기본적인 관점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원칙’처럼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독재 체제에 빌붙어 기생하면서 이 구절을 ‘악용’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죄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일제 치하에서, 또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민주와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가 힘쓴 노력들도 많았습니다. 지난 4일,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 50주년 기념식과 재현 한마당’도 바로 그런 흔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iyXrP2zSY. 


7. 마무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야훼 하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역사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피조물, 모든 순간에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일요일에만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 가능한 일일까요? 불가능합니다. ‘나는 교회당 공간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 가당한 말일까요? 역시 가당치 않은 말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바탕 위에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도록 또 충만하도록, 리쳐드 니버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의 변혁자’로서 노력하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의무요 과제입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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