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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3-3) - "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참 목자 예수님 " / 이태영 목사

관리자 2021-04-16 (금) 10:07 7개월전 260  

본문) 겔 34:11~16, 히 13:7~10, 20~21, 요 10:1~18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고 성도들이 양떼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고백 중의 하나입니다. 시편 23편은 목자 되신 하나님과 그의 양떼가 되는 성도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감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는 고백은 성도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는 고백은 하나님과 성도간의 일체성을 보여 줍니다. 시편 28편 9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라는 기원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소망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의 참 목자상


  예언서 중에서 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장 강조하는 성경은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 중에서도 34장은 목자와 양에 대한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11절에서 16절까지는 참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양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말씀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양을 찾는 목자이십니다. “내가 양을 찾고 찾되…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내리라.”(겔 34:11하~12) “캄캄한 날”이라는 것은 ‘사망’을 상징하며(렘 13:16), ‘분노’와 ‘환난’과 ‘고통’과 ‘황폐’와 ‘패망’과 관련이 있습니다(습 1:15).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찾고 건져내실 뿐 아니라, 인도하시고 좋은 꼴을 먹이시는 목자이십니다.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겔 34:13-14)라는 말씀은 양을 모으고, 좋은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좋은 꼴을 먹이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목표는 양떼와 함께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겔 34:15). “누워있게 한다”는 말은 지극히 평화스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편 23편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서는 참 목자가 되신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양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요약해서 표현합니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하나님께 있어서 죽음에 처한 양을 돌보시고 좋은 꼴로 인도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스겔 예언자는 양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한 권세에서 건지셔서 좋은 우리와 살진 꼴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정의와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참 목자상 


  히브리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참 목자로 고백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히 13:20)라는 표현 속에 있는 “양들의 큰 목자”라는 말씀은 히브리서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에는 참 목자이신 주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와 다른 점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 안에서 죽으신 예수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이끌어내셔서 부활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되, 양을 위해서 죽으신 목자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대제사장으로 고백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양들을 위해서 영원한 속죄를 하시려고 희생제물이 되어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양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귀한 생명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 참되고 놀라운 사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참된 목자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참 목자상 


  요한복음서에서 증언하는 예수님께서는 에스겔서와 히브리서의 목자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에스겔서에서 보이는 목자의 모습을 그대로 증거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의 이름을 불러 각각 인도하시는”(요 10:3) 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양의 문”(요 10:7)이 되셔서 “양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동시에 참 목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에게서 히브리서의 목자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이 예수님을 참 목자로서 고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0:11, 15)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점에서 히브리서의 “큰 목자”와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말씀하면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참 목자의 모습을 아주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평화와 생명의 세상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납고 포악한 이리를 통해 참 목자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참 목자는 이리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 양에게 다가올 때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만, 거짓 목자는 양을 버리고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요 10:12). 양을 버리고 도망하므로 이리는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친다는 것입니다(요 10:12)


양들을 위해 이리 한 마리 앞에서 목숨을 버린 목자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중에 매우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0장 12절에 거론되는 이리가 단수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 목자 앞에 나타난 이리는 한 마리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리라는 말 “뤼코스”는 여섯 번 나옵니다(마 7:15, 10:16, 눅 10:3, 요 10:12, 2회, 행 20:29). 그런데 오늘의 요한복음 본문만 제외하고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됩니다. 이리가 본래 무리 동물인 것을 감안할 때 복수형으로 쓰이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특별히 이리가 사냥할 때에는 반드시 무리를 지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이리를 말씀하실 때 이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리 한 마리는 거짓 목자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셨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리가 두 마리 이상 나타났을 때 목자가 도망을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관례가 있다고 합니다. 이리가 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있는 목자라면 그 이리를 지팡이나 돌멩이를 이용해서 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한 마리를 보고 도망을 한 목자는 어떤 이유로든지 거짓 목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한 마리’ 이리 앞에서 참 목자가 한 행동입니다. 참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이리와 싸워서 쫓아낸 것이 아니라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참 목자는 이리와 대결할 것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이건, 여러 마리가 떼로 달려들던 온 힘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표현에는 이리와 싸운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목숨을 버린다”고 할 뿐입니다. “버린다”(티데미)는 말은 본래 “두다” 또는 “놓다”의 뜻이 있습니다. 티데미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100회 가까이 쓰이지만, 싸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합니다. 참 목자는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오는 이리와 싸워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리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이리에게 먹이로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양을 잡아먹지 말고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양과 이리가 함께 누리는 예수님의 사랑, 생명, 평화


  거짓 목자가 도망함으로 이리의 포악성과 교만함을 극대화시켰다면, 참 목자는 이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이리의 잔인한 본성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양을 예수님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동시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이리와 하나가 됨으로써 이리의 포악성과 잔인함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 한 마리 앞에서 목숨을 버리시는 참 목자상을 통해서 양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이리에 대한 사랑도 함께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피 안에서 이리의 포악성과 양들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모든 갈등과 적대감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리와 양이 자신들의 본성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사야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이끌리며”(사 11:6, 참조; 사 65:25)라고 꿈꾸며 노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22)은 이처럼 놀라운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참 목자상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으로 양들의 목숨을 살리려는 생명의 예수님과, 이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줌으로 이리마저 사랑하시는 평화의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으로서 양과 이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오늘은 부활절 셋째주일이면서 장애인주일이고, 4.19혁명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이 세 가지는 별개인 것 같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 내부의 신앙이며 교리인 것으로 보이고, 장애인 문제는 복지에 관한 것이며, 4.19는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이념의 사안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생명의 문제, 평화의 문제, 사랑의 문제가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 목자로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이 땅에 참 생명, 참 평화, 참 사랑을 구현하시려는 거룩한 일이셨고, 부활은 이 모든 일들이 허황된 이상이나 꿈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분명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거룩한 표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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