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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4-3) - " 침묵과 반역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0-05-01 (금) 19:59 3년전 1372  

본문) 사 63:7-14 행 13:26-35 요 21:1-14)


1. 두팔체와 엘자의 죽음


4·15 총선이 끝나고 큰 사건이 없었나 싶었는데,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으로 부산이 떠들썩합니다. 시장직을 사퇴했지만 현재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저급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차별 등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과 학교 내의 문제이며, 교회 내 문화에도 성차별적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를 반성하게 합니다. 


또한 ‘n번방 사건’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n번방 사건’은 텔레그램 등 메신저 앱을 이용하여 ‘스폰 알바 모집’ 같은 글을 게시하여 피해자들을 유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여 얼굴이 나오는 나체사진을 받아, 이를 빌미로 협박해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다시 이것을 유포하는 디지털 성범죄, 성 착취 사건입니다. 놀랍게도 피해자가 중학생 등 미성년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회원 규모도 수만 명이라고 하니, 기가 막힙니다. 특별히 오늘이 어린이·청소년주일이자 교회교육주일인데, 우리 사회 기성세대의 도덕성이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처참한 사건입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성희롱과 성차별 등에는 엄정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 재발 방지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되는 것, 피해자 보다 가해자를 보호하려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문화로는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습니다. 오 전 시장 사건, n번방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글씨체 가운데 ‘두팔체’라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이 이웃에게 ‘층간 소음 항의’ 같은 생활민원을 할 때 메모지에 쓰는 ‘거친 필체’를 말합니다. 여성이라고 무시할까봐 일부러 ‘센 남성’으로 보이기 위한 전략입니다. 택배를 받을 때도 수신인에 본명 대신 ‘곽두팔’을 씁니다. 여기서 두팔체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혼자 살면서도 현관에 일부러 남성의 신발을 함께 놓아두는 여성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여성들의 몸부림입니다.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또한 예수의 몸된 교회가 제 역할을 하는 사회는 이런 두팔체로 민원이 아닌, 고운 글씨로 사랑의 편지를 쓰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그런 세상이 오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참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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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팔체 예시와 후기



작가 이유리는 미술사를 통하여 지워진 여성들을 호출합니다. 특히 14-17세기 서구교회와 국가가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화형에 처하던 시기의 여성들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이유리 작가가 발견한 마녀 고발자들의 행태가 생각했던 것만큼 종교적 광기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녀로 몰린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양했는데 그중 제일 표적이 되기 쉬운 사람은 비혼 여성, 남편과 사별한 여성과 같은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단 한 가지 사회적 지위가 약한 독신 여성들을 고발하는 것이 남성을 고발하는 것보다 뒤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성의 경우 고발자가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으나, 독신 여성의 경우, 부친이나 남편 등과 같은 가부장제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력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앙갚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마녀사냥 주동자들에게는 편리한 희생양이었습니다. 


작가 이유리는 1880년도 작품인 빈첸츠 카츨러의 <1583년 마녀 엘자 플라이나허의 화형>을 소개합니다. 그림의 배경은 1583년 9월27일입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나이가 70세인 엘자 플라이나허(1513~1583)가 나무 기둥에 사슬로 손을 묶인 채 서 있습니다. 엘자의 몸은 사형 직전까지 행해진 숱한 고문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맨발에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그간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구경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이제 막 발밑의 나뭇단에 불이 붙었습니다. 얄궂은 건 엘자의 온몸을 태운 나무를 지불한 돈도 엘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녀 심문 비용도, 화형 전에 열린 재판관들의 연회비용도 모두 엘자가 부담했습니다. 게다가 엘자의 남은 재산도 모두 지방 관리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엘자는 무슨 죄로 이렇게 마녀로 ‘선택’이 되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엘자를 마녀로 고발한 그의 사위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엘자가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이유 때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를 볼까요? 


엘자의 딸 마르가레트가 죽자, 손녀인 ‘아나’를 엘자가 돌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르가레트의 요청으로 폭력적인 남편의 손에서 딸을 지켜달라는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위인 게오르크 슐루터바워는 자신의 딸을 데려가 홀로 키우는 장모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게다가 딸 아나는 간질 증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게오르크는 자신과 마찰을 빚던 장모를 ‘마녀’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가톨릭 예수회 소속 심문관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엘자가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엘자를 가혹하게 고문하고 심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녀로 판결받고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무도 엘자를 대변해주지 않았습니다. 엘자는 보복당할 불안 없이 곱게 재산을 몰수당하며 죽어갔습니다. 폭력성(가정 폭력)을 지닌 남성과 가톨릭의 종교적 광기, 그리고 남성 가부장적 사회의 탐욕이, 한 여성과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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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츠 카츨러, <1583년 마녀 엘자 플라이나허의 화형>, 1880년께, 석판화 



2. 침묵


요한복음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요 21:1).”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4).”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난주 말씀과 같이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다시 자신의 본래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2-4)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죠?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가노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지만, 다시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 21:5-6).” 


그러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요 21:7)”게 됩니다. 이 장면은 눈에 익습니다. 처음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입니다. 공관복음서에 잘 나와 있죠?(마 4:18-22, 막 1:16-20, 눅 5:1-11)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조반을 먹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 21:8-12)

 

한 장의 우울한 그림입니다. 제목을 붙여보면, ‘디베랴 호수가의 침묵’, 혹은 ‘우울한 아침’이겠죠? 아침은 신선해야 되는데, 우울합니다. 왜 그럴까요? 침묵 때문입니다. 침묵 가운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떡과 생선을 나누어 먹습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요 21:13).”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떡을 떼어 나눠먹을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그 다음 그들의 삶의 행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처럼 침묵입니다. 떡을 나눠 먹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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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랴 호수가의 침묵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인줄 알지만,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 만나기 전에 고기잡이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겠다는 무언의 저항입니다. 아주 무기력한 침묵입니다. 엘자의 죽음 앞에서 침묵한 남성들의 모습이자, 오늘 성인지 감수성이 나락에 떨어진 우리 사회의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기력한 침묵이 시간이 지나며 반역으로 바뀝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3. 반역


오늘 구약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먼저 이스라엘의 반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침묵보다 더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침묵이 아니라, 반역이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사 63: 7-10)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침묵을 넘어 반역의 길로 간 것이죠! 


4. 간구


그러나 후반부는 다른 말씀이 이어집니다. 모세 때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호소하는 부분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야 의미가 잘 전달됩니다. 


“그들은 그의 종 모세의 시절을 생각하며 말하였다. ‘당신의 양떼를 맡은 목자를 바다에서 이끌어내신 이가 어디에 계신가?, 당신의 거룩한 영을 그에게 넣어주신 이가 지금 어디에 계신가?, 당신의 자랑스러운 팔로 모세의 오른팔을 잡아 이끄시며 백성들 앞에서 물을 가르시어 영원한 명성을 떨치신 이, 말이 벌판을 달리듯이 깊은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가 지금 어디에 계신가? 그들은 골짜기를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넘어지지도 않았다던데.......” (사 63:11-14)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총을 따라,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 백성들을 인도하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침묵하고 반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이제 그들 역사의 가장 뚜렷한 하나님의 구원 손길인 출애굽과 홍해의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 반역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요? 바로 구원의 증인, 부활의 증거자로 살아야 합니다. 


5. 증인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침묵하고 반역했지만, 간구하여 구원받은 이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 삶의 서사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무튼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비시디아(현재는 터키)의 안디옥 회당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증인이 되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배경을 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곳인 수리아(현재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행 11:26)는 최초로 이방선교를 시작합니다(행 13:1-3). 이때 파송한 선교사가 바로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13장 말씀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브로 섬(행 13:4)과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4)에서 전도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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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오늘 본문 말씀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안식일 날 행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출애굽부터 사사시대, 사울과 다윗 왕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실터인데, 그 이가 곧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이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행 13:17-23). 본문은 그 다음부터 행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들어볼까요?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 13:26-27)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여 정죄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죄와 죽임은 말씀에 이미 예언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행 13:28-31)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렇죠? 그리고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 13:32-35) 


구약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은 주의 부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지친 영혼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명에 침묵하면 안 됩니다. 또한 사랑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불순종하거나 반역하면 안 됩니다. 구원을 간구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에 많은 엘자들이 죽어갑니다. 거기에 이제는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회가 이러한 마녀 사냥의 광기에 종교적 명분을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예수의 종교가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방해물이 된 것입니다. 엘자가 불에 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한 지난 2020년 4월 29일 3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다친 이천 물류창고 화재 피해자들인 ‘일용직 노동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천에서는 2008년에도 냉동 물류창고에서 불이 나 40명이 사망했었습니다. 반복되는 인재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보고, 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회를 바꾸어야 하고, 제도를 바꾸고 법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저 베드로처럼 고기잡이하러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엘자가 불에 타 죽어가면서 했던 생각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이야기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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