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0:8~18, 계 3:1~6, 마 23:13~28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총회가 정한 순교자 기념 주일, 제주 4.3기념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주님의 돌이키라는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승호 시집 “방부제가 썩는 나라”에 시인의 말은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시가 시시한 시대일수록 시시하지 않은 시를 써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모든 게 다 썩어도
뻔뻔한 얼굴은 썩지 않는다”
계엄과 탄핵국면을 지나면서 우리는 정말 뻔뻔한 얼굴들을 매일 대하게 됩니다. 그들이 사회지도층이요 종교지도자들이라서 더욱 화가 나고 암담해집니다. 그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듯이 우리의 마비된 양심이 깨어나고, 모든 죽임당한 사람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사순절 넷째 주일의 세 본문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 성찰해보았습니다.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선한 사람의 죽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임을 당한 선한 사람에 대한 것이고,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유대 지도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혐오와 편견, 산업재해, 환경오염, 전쟁, 학대와 폭력에 의한 죽음의 이야기들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숱한 죽음들이 우리와 무관한 죽음일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그 사람의 불행일까? 비참한 개죽음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들을 죽인 것일까? 나의 침묵이 그 일에 동조한 것일까?
예수의 죽음은 유대 지도자들의 거짓과 무지와 죄를 드러낸 것이고, 그들이 만든 거짓과 죄를 하나님의 뜻으로 호도하는 부패한 종교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던 무지한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죽음이었습니다.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순교자들의 삶을 성찰하면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숱한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가는 방향이 올바른 것인지, 성찰해봅니다.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여,
모든 죽임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소서 !!
무엇으로부터 돌이켜야 하는가?
첫째, 패역함에서 돌이키라(이사야30:8-18)
유다 지도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해 애굽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비해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촌락을 허물고 주민들을 무리하게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전쟁 준비에 골몰하여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지친 백성들을 돌보는 대신 군사력을 키우고 강대국에 의지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이사야는 그런 뻔뻔한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 들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유다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빠른 말을 타고 도망하여도 그들을 쫓는 대적들이 더 빠르고 강하게 그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이사야는 경고와 더불어 진노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구원을 위해 유다가 해야 할 일은 ‘돌이켜 조용히 있는 것’(사30:15)입니다. 나라의 위기를 외세와 군대에 의지하여 해결해 보겠다고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비로소 그의 백성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고자 기다리셨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서 돌이키라(요한계시록 3:1-6)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 유일하게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처음엔 뜨거웠지만, 나중에는 죽어가는 교회가 돼 주님으로부터 '살아있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사데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식게 만든 것일까? 원인은 돈과 세상을 사랑함에 있었습니다(딤전 6:10∼12). 사데에는 작은 시내가 흘렀다고 합니다. 황금천이라고 부를 만큼 사금을 함유하고 있어서 BC 560년경 크로이소스왕은 엄청난 양의 사금을 채취해 부유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순금을 제련하던 도가니가 무려 300개 이상 발굴됐고 도가니 밑바닥에는 순금이 그대로 남아 있어 크로이소스왕의 전설적 부요가 역사적 사실임이 판명된 바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데는 금산지로 유명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4-5)
로마 시대의 부와 권세를 상징하는 옷은 자주색이었으나 사데의 의인은 흰옷을 약속받았습니다. 남아 있는 그루터기 신앙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진리에 대한 내적 열망이 사라진 신앙은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가리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도 형식주의적 신앙에서 진리의 말씀을 처음으로 받았던 때의 감격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위선으로부터 돌이키라(마태복음 23:13-28)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강하게 촉구합니다. 1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도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란 겉으로는 정의롭고 선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내면에는 이기적인 동기를 숨기고 배려심이 없는 편견이 가득한 자라는 뜻이다. 이를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리고 정의로움의 외관만 흉내 내는 위선자라고 꾸짖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들이야말로 유대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위선적인 삶을 고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13절 하반절에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지도자들의 위선적 모습으로 인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막고 있음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넷째주일, 예수님의 십자가와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주님의 돌이키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패역함에서 돌이켜 진리를 따르고 명목상의 신앙인에서 돌이켜 살아있는 믿음으로 위선적인 삶에서 돌이켜 신뢰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