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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1) - "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 " / 한성수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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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3-1) - "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 " / 한성수 목사

관리자 2025-03-19 (수) 14:45 11일전 63  

본문) 9:11-18, 고후 11:19-30, 23:1-12

 

세계 도처에서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에, 두렵고 위험한 세계전쟁을 두 차례나 겪은 인류이지만, 망각의 힘이 탐욕을 부추겨서 또다시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총부림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오직 힘으로 남을 지배하겠다는 인간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약자를 삼키려는 침략전쟁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칼과 창이 아니라, 자본의 힘으로도 나타납니다.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아니 강탈하기 위해 거대 자본은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삼키려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사라지고 양의 탈을 쓴 거짓 선동가들이 의의 전위대로 활약합니다.

하지만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하여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리라”(9:16)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9:17)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빠른 경주자들이 먼저 도착하고, 힘센 용사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혜자들이 기름진 음식을 얻고, 명철자들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지식인들이 은총을 입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9:11)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는 사람일진데, 부지불식간에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리듯이, 사람이 걸어가는 인생길은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입니다.(9:12) 다시말해 육신의 탐욕과 능력으로만이 내가 원하는 세상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능력을 벗어난 수많은 그물과 올무들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잘 난 능력자가 없으니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한 가지 안타까운 예를 듭니다. 큰 왕이 와서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성읍을 치려고 할 때,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 그의 지혜로 성읍을 건지게 되었는데, 그를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9:14-15) 분명 가난한 자의 지혜가 크고 힘센 왕을 물리쳤으나 그의 지혜는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힘에 의지하고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기에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와 그가 베푼 은혜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의 전도서를 읽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전도서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난한 지혜자로 오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9:58)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가난한 지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으나, 그를 높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2:6-11)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가장 낮은 곳에서 들어 올리셔서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은 가난한 지혜자, 곧 종의 형체를 가지사 겸손과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으나(고전 1:18), 하나님은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을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호령보다 낫게 여기셨고, 세상의 무기보다 낫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종교적 형식에 매여 알맹이 없는 경건을 자랑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입술로 말하는 것은 경청하고 행할 수 있으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행위는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의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위선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랑과 헛된 공명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말씀이 새겨진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여 자신을 존경받아야 할 선생인 양 드러냈습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탐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저잣거리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겨 했습니다.(23:3-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결코 가난한 지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교만한 행동으로는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들도 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형식과 겉치레로 포장하고 대접받기를 즐겨한다면 결코 랍비로 칭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

 

유대사회에서 랍비는 단순히 율법의 지식만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랍비는 경의를 표하는 호칭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랍비는 존경받아 마땅할 참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위선의 탈을 쓴 자가, 삶과 유리된 지식을 가진 자가 존경받는 선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선생이기에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선생의 위치를 박탈한 것은 아니지만 존경받는 선생이 되기 전에 가르침을 받는 자들과 한 형제라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섬김의 마음을 가질 때, 그가 높임을 받고 큰 선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시는 한 분, 곧 하나님만이 너희의 아버지이시니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 분 그리스도만이 너희의 지도자니 지도자라 칭함도 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땅의 아버지와 지도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는 존경과 높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섬김의 도를 실천하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1-12)라고 말씀하시면서, 섬김과 낮아지는 지혜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선동에 빠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들은 지혜롭다 했지만 어리석게도 거짓 사도들을 기쁘게 용납했다고 하면서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 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빰을 치더라도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라고 탄식합니다. 바울이 열정을 다해 복음으로 양육한 교인들이, 현란한 수사와 위압을 가지고 행세하는 거짓 사도들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양같은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 먹고, 빼앗고, 빰을 치더라도 스스로 높이는 그들에게 교인들은 무력하게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큰 자는 섬기는 자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고 하셨건만, 고린도 교인들은 섬김으로 헌신하였던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거짓 사도들의 무도하고 교만한 헛된 교설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호령소리가 세상을 혼잡하게 합니다. 고린도 교인처럼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는 자들이 어리석게도 우매한 호령 소리를 기쁘게 용납하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거짓 선동자들이 아스팔트 광장의 이곳저곳에서, 양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 먹고, 빼앗고, 빰을 치더라도 그들의 무례한 선동에 환호를 합니다. 앞서 언급한 전도자와 주님과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볼 때,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서신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나는 거짓 사도들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후 11:22-23)

 

바울은 혈통적으로나, 언약의 전통으로나, 사명 받은 일꾼으로나 어느 모로 보아도 자랑스럽고 당당한 사도라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처럼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 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빰을 치는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처럼, 복음을 위한 어떠한 고난도 수고도 없이 선생의 자리만을 차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신없는 자들의 헛된 소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합니다.(고후 11:23)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아온 고난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없이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합니다. 파선하여 일 주야를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과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 여러 번 잠을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박해와 고통은 차치하고 날마다 바울을 누르고 있는 일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고 합니다. 박해의 고통보다 교회를 위한 염려가 더욱더 바울을 무겁게 누르고 있기에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9)라고 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일념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염려하고, 믿음의 공동체에 있는 약한 자와 실족한 자의 삶을 헤아리고 그들을 위해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자, 그가 랍비로, 아버지로, 지도자로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전도서의 전도자가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음에도, 세상은 빠르고 힘쎈 능력을 가진 자와 지혜와 명철로 무장한 자를 선망하며 그와 같은 자들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한 육의 기준에 의지할 때,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는 멸시받고 우매한 자를 다스리는 자의 호령이 세상을 지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힘보다 낫고,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지혜를 갖춘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고 하였으니, 세상을 이기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아는 것에서 비롯됨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수난의 길을 통해서 약하고 가난한 하나님의 지혜가 악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섬김과 낮아짐의 삶을 몸소 살아감으로써 영적으로 더욱더 성숙한 믿음을 이루는 사순절 절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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