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6:12~19, 히 12:18~24, 막 11:1~10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가복음 11장 9-10절)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샀습니다. 차 중에서도 가장 비싼 차, 이른바 ‘슈퍼 중의 슈퍼카’를 샀습니다. 엔진 소리도 우렁차고 디자인도 세련되고, 얼마나 미끄러지듯 잘 나가는지, 맘에 꼭 들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달려갔지요. 그런데 아주 조그만 꼬마 차 하나가 뒤에 바싹 따라붙었습니다. 영 모양 빠지게 말입니다. 까짓것 한방에 따돌리면 되지요. 액셀을 슬쩍 밟아줘서 씽 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그 꼬마가 기를 쓰고 따라와서 어느새 또 꽁무니에 바짝 붙었습니다. 이거 좀 적잖이 신경 쓰이고 은근히 열이 받지요? 차를 갓길에 세웠더니 꼬마도 뒤에 바짝 섰습니다. 이 정도면 이건 시비를 거는 거지요. 차에서 내려 꼬마 차 운전자에게 큰소리쳤습니다. “도대체 왜 따라오는 겁니까?” 진짜, 도대체 왜 따라붙은 걸까요? 꼬마 차 운전자가 땀을 닦고 헐떡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꼬마는 손님에게 덤 드리는 경품입니다.”
이거 웃자고 하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분 중에는, 상대방에게 기죽지 않으려면, 그래서 협상을 잘하려면, 비싸고 큰 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만나면 안 되겠지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사기꾼 가짜가 사람을 속이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황당무계한 사기 사건을 보면, 참 멀쩡한 사람이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그 겉모양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껍데기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속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하지요. 사업도 그렇겠지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 1:11)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 정작 그 백성은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왔는데 종들이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왕이 왔는데 신하들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찍이 예레미야도 하나님이 당신이 지은 세상에서 하룻밤 머물 곳을 구걸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찬미하며 맞이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의 종려주일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맞이하는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 말씀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이야기를 마가복음에서 받아 읽었습니다. 갈릴리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올라온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침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인근에 도달했지요. 여기서 이 올리브 산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을 마주하고 있는 올리브 산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 성문으로 입성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가에는 많은 무덤이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죽었지만, 죽은 다음에라도 끝내 메시아를 보겠다는 소망으로 거기에 묻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메시아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다니엘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환상을 예언했지요.(단 7:13) 인자가 구름을 타고 와서 모든 우상의 권력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기대요 희망입니다. 많은 유대의 랍비들은 그렇게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메시아가 말을 타고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은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자 실체였지요. 실제로 억압자들은 말을 타고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바빌론과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군대는 기마대를 앞세웠습니다. 말을 탄 기병대와 말이 이끄는 철갑마차는 당시의 최첨단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압적이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무엇보다 전쟁의 승리자, 제국의 황제가 천둥처럼 팡파르를 울리며 백마를 타고 성문으로 들어오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은 위엄과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자신들을 해방할 메시아가 위엄찬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저항하며 봉기했던 어떤 유대 지도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기 위해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했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날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올리브 산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까요? 하늘의 구름일까요? 아니면 기백 있고 위엄찬 백마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나귀를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구름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는 무엇입니까? 나귀는 말보다 아주 작습니다. 사람이 타기보다는 짐을 나르는 데 씁니다. 다리도 짧아서 참 볼품이 별로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끌어오라고 하신 나기는, 그나마 다 큰 나귀가 아닙니다. 새끼 나귀입니다. 새끼 나귀! 이건 애들 놀이로는 몰라도 어른이 타기에는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선생이라는 사람이 나귀 새끼를 탄다면, 이게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건 꼬마 차 정도가 아니지요.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새끼 나귀를 끌어와서는, 거기에 그럴듯한 안장이라도 얹은 게 아니라, 갈릴리 촌사람들의 그 허름한 겉옷을 얹었습니다. 그 길은 또 어떻습니까? 길에 무슨 레드 카펫을 깐 것도 아니지요. 사람들이 들에 있는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길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일사불란한 제국의 호위대와는 전혀 달리 오합지졸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따라가며 이렇게 외쳤지요.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첫 종려주일의 풍경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거 뭔가 좀 허술하고 이상하지요. 그런데 이 풍경을 좀 더 자세히 톺아보면, 진짜 더 이상한 게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누구의 도성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또 누구의 성전입니까? 마땅히 하나님의 성전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호산나 외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먼저 맞이해야 할 사람들, 맨발로 뛰어나와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아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 몇이 거기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에게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좀 조용하게 꾸짖으라고 말하지요. 그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예 죽여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자들이, 메시아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린다는 자들이, 정작 그들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몰라서 그랬겠지요?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바람에 잘 몰라봐서,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것이겠지요? 아닙니다.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몰랐을 수가 없지요. 이미, 우리도 아는 대로, 일찍이 예언자 스가랴는 메시아가 오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습니까?(슥 9:9)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그토록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도 알고 있는데, 율법과 예언의 전문가라는 그들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알고도 그랬다면 정말 더 궁금합니다. 그렇게 예언을 잘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요? 왜 메시아를 맞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음모를 꾸며 십자가에 넘겨버렸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탐욕과 교만 때문입니다. 탐욕스럽고 교만한 자들은 군마를 타고 군림하는 자들에게는 비굴하게 껌뻑 넘어갑니다. 하지만 겸비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볼 수도 없고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볼 수도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겸비하셔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는 오직 겸손한 사람들만이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의 말씀으로 다윗이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다윗은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지요. 그런데 다윗에게는 한 가지 숙원이 있었습니다. 바로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전쟁을 치르며 손에 피를 많이 묻혔지요. 그래서 그 손으로 함부로 법궤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웃사가 궤에 손을 댔다가 죽은 것도 보았으니 얼마나 두려워했겠습니까? 그래서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두었지요. 그런데 오벳에돔의 온 집안이 복을 받는 걸 보고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직 성전을 짓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궤가 온다니 얼마나 기쁩니까? 다윗은 큰 축제를 벌이며 궤를 옮겼습니다. 궤를 옮기는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면 멈추어서 소와 살진 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뿐 아니지요.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예복)만 걸치고 춤을 추었습니다. 춤을 추는데,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추었다네요. 다윗은 그렇게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법궤를 다윗성에 들여왔습니다. 장막에 법궤를 놓은 다음 다시 본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빵과 고기와 건포도를 하사했습니다. 정말 법궤를 모시는 다윗의 마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과정에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춤에 진심이었는지, 알몸에 에봇만 걸치고 전심전력으로 춤을 추다가 그만 속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알몸이, 주요부위가 다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부인 미갈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들이 보는 앞에서 다 보여주며 왕의 체통을 떨어뜨렸다고 업신여길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렇게 잔소리, 아니, 큰소리하는 미갈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무슨 말입니까? 낮고 천한 인간이 주님의 궤를 맞이하는 일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더 낮아지고 더 천해져도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극치입니다. 이것이 진정 주님의 궤를 맞이하는 다윗의 겸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법궤를 맞이하며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통 따위가 무엇이냐고 그런 것은 다 (개가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개나 주어도 좋다고, 온몸으로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생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고 겉옷을 벗어 새끼 나귀에 얹고, 호산나 외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호산나, 복되시다 축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한 자는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랬듯이(히 12:21) 다윗이 그랬듯이 두려워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들만이 온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낮고 천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호산나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도록,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한민교회 / 서재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