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겔18:1-4, 21-32/ 갈2:15-21/ 눅23:39-43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언제일까요? 어릴 때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임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청년의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해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섰을 때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젊은 시절 많은 위기와 고난이 있었으나 그 어려운 고난과 풍파를 다 이겨내고 우리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결실을 이 세상에서 맺고 살 때가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을 가장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요? “건강한 생활신앙”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생활을 잘해서 천국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삶을 이루며 사는 “생활신앙”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가장 빛나고 아름답게 만드는 생활신앙이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겔18:1-4)
가장 아름다운 믿음은 모든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 뿐 아니라 갈등과 아픔, 삶의 위기들까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신 가장 아름다운 은총이라고 여기는 “나 때문”의 생활신앙입니다. 모든 불행과 어려운 일의 원인이 “너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주셔서 우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이 참 좋은 신앙의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때문이야!”라며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참 의인은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민족은 조상들을 원망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믿음생활을 잘 못해서, 우리 조상이 죄를 범해서 “너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고생을 한다고 불평합니다(겔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지금 자신들의 포로 된 고난의 이유를 과거의 조상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뉴스를 보십시오! 사회적인 재난이 일어나면 “너 때문”이라는 손가락질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보다 책임 있는 사람들을 골라내서 그 사람들에게 모든 재난의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참 믿음의 사람들은 “조상 탓”, “네 탓”, “과거 탓”, 환경 탓“이 아니라 내게 닥친 모든 고난의 원인이 바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변화시켜주심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물으셨다면 모든 인류와 이 세상은 이미 가장 큰 저주와 파멸의 불길에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로 가득하고 모든 사람이 타락했을 때, 그 죄와 허물의 책임을 자신이 지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의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지신 사건입니다. 우리 죄를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그 죄를 자신이 대신 십자가에서 지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살려 내셨고 새 피조물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내셨습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신앙 간증을 한 이지선 교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한동대에 재직했지만 지금은 이화여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에 TV프로그램인 유재석의 유키즈에 출연해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친 트럭 운전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고운전자는 혼자 소주 5병을 마시고 운전을 하고 있었고 이미 사고를 내고 급히 운전하다 신호대기하며 멈춰있던 이지선교수의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다행히 종합보험을 들어 모든 치료비보상을 다 받았지만 사고운전자를 본 적도 없고, 전화나 만나본 적이 없었답니다. 사람들이 화나지 않느냐 말하는데 자신은 오히려 그 운전자가 찾아오면 다 용서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가해자까지 만난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을 위해 빨리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오면 기쁨으로 용서하고 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용서하고 산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들에게 새 소망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더 감사한다고 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은 “나 때문에” 이 모든 고난가운데 나를 있게 하셨고 더 아름답고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잘 죽는 생활신앙(갈2:15-21)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 살기를 원합니다. 풍요롭게, 자유롭게 살고 바르고 온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전하게 산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쪽은 과도하게 소유하며 살고 한 편은 가난하여 핍절하게 삽니다. 한 편은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여 버리는 음식이 있지만 한 쪽은 굶주리며 삽니다.
80억의 인구인 지구촌을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킨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2022년 통계에 따르면 남자 51명, 여자 49명, 장애인 15명, 15세 미만 어린이 24명, 75세 이상 노인 4명, 평균연령 31세, 기대수명 75세라고 합니다. 종교별로 나누면 기독교 31명, 무슬림 23명, 힌두교 15명, 불교 7명, 민속신앙 6명, 무종교 16명입니다. 빈부의 차이로 나누면 세계의 부 76%를 10명이 가지고 있고, 1200만원 이하소득자가 56명, 영양실조 11명, 아사자 2명, 그런데 비만은 15명이라고 합니다. 100명 중 47명이 음식 구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 이런 불평등가운데 살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정의와 공의와 평화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로부터, 욕심과 이기심에 매어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옛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셔야만 바르고 온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갈2:19-21).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옛 사람(본성과 정욕과 이기심)이 죽는 것,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류 공영과 공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게 살아있으면 많이 가져도 행복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도 만족하지 않으며 끝없는 욕망과 정욕에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이게 살아 있으면 우리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 못하고 나를 다스려 주셔서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고 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지선 교수는 유퀴즈에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산다고 했습니다. 예쁜 얼굴로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사는 삶 보다, 지금 얼굴 전체를 이식한 피부로 덮은 얼굴로도 절망과 낙담가운데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고 일어날 새 힘을 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옛날로 돌아갈 마음, 전혀 없고 지금의 이지선이 훨씬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죽음의 목전까지 갔던 사고 이후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는 전혀 새로운 새 생명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삶까지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신앙(눅23:43/ 겔18:21-32)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은 슬픔에 겨워 눈물만 흘리셨고 요한은 참담한 마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큰 중죄인에게 내리는 십자가 형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가는 한 강도가 그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그 죄인의 괴수가 회개합니다. 돌이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눅23:41).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소망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아 놀랍게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배, 이 지상에서 드릴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존귀한 예배가 저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위대한 예배입니까? 죽음 앞에서도, 어떤 고난 앞에서도, 어떤 핍박 앞에서도 드리는 예배가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어떤 예배가 가장 거룩한 예배입니까? 내 성공, 내 욕망을 위해 내가 받을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며 자기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주님과 함께 죽어가는 저 강도의 예배가 가장 거룩한 예배입니다. 참 예배는 고난 앞에서 환난 앞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코로나 광야시대를 건너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자리에 나오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가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열정으로 더 큰 믿음으로 저 십자가에서 주님을 예배했던 강도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십자가의 주 예수를 찬양하는 예배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치 우리의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거룩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겔18:21-24)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지금 돌이켜 회개하며 죄에서 떠나면 그동안 범죄하며 살았던 삶을 용서하시고 그의 새로운 삶을 의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동안 거룩하게 살았던 사람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며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으면 그가 그동안 살아온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지금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이요! 지금 죄와 세상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 안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세상 가운데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활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