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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2-2) - " 엘리제를 위하여 " / 송종근 목사

관리자 2020-03-05 (목) 16:29 4년전 1425  

본문) 삼하 12:1~15, 행 3:11~21, 요 18:12~27

 

엘리제를 위하여~” 그 작곡가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품의 제목입니다. 아마도 피아노 좀 배웠다 하는 분들 모두 이 곡을 치셨을 것입니다. 전곡을 치지는 못해도 가장 인상적인 그 첫 부분을 따라했던 이들이 많았으니까요. 사실 이 곡이 유명한 이유는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 연주곡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동차 후진 음악으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제 기억 속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는 쓰레기 차가 후진할 때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리면 아 쓰레기 가지러 왔구나 생각했죠. 이외에도 특별한 의미를 담은 소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정적을 깨는 교회의 종소리는 예배를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고, 시골에서는 12시를 알리는 시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차임벨하면 떠오르는 것은 학교입니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소리가 차임벨이었으니까요.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소리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군대를 생각하면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기상 나팔소리입니다. 그래서 제대 후에도 나팔 소리만 들으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담은 고유의 소리가 존재합니다. 이 특별한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들고,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도 그 특별한 소리가 등장합니다. 바로 닭 울음소리가 그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이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끌려가신 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뜰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오늘 성경은 베드로가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예수를 뒤쫓아 갔음을 보여줍니다. 잡혀가신 예수님의 안위가 걱정 되서 따라갔던 것이죠.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안나스의 집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망설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왜 망설였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으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군대와 유대인 무리에 의해 잡혀 오신 예수님의 상황으로 봐서 자칫 자신에게도 해가 미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안나스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망설이는 베드로를 다른 한 제자가 여종을 시켜 데리고 들어왔다 증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17절입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예수의 제자라 지적하니 베드로가 이를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오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그도 예수님과 같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그는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던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이후 두 번이나 더 부인했고, 닭이 울 때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통곡했다 공관복음서는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이 닭 울음소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가운데 오늘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분명한 목소리로 예수님 앞에 다짐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가 닭 울기 전 3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말씀하셨죠. 그리고 지금 그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 자신의 다짐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그래서 그는 통곡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에 통곡하고, 스스로 교만했음을 깨달으니 통곡했던 것이죠. 주목할 것은 그런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증거를 통하여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던 자를 치유한 다음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다 구걸하는 장애인을 만났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치유 받은 자가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자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자리를 피하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치유받은 자가 붙잡은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지금 그들의 눈 앞에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합니다. 지금의 그들이 경험하고, 목격한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곧 베드로가 그들의 죄에 대해 정죄하고, 그들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들 저지른 모든 잘못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선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그 옛날의 모습에 대해 문제 삼지 않은 것이죠. 그러면서 오늘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권면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자신이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한 후,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오늘날 주의 영광을 증거하고 다니는 것처럼 그들도 깨달아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아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라 권면한 것이죠. 그러면서 베드로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21절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회복하실 때 곧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는 다시 돌아서고 회복할 시간이 허락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오늘 거룩한 경고를 들은 무리들이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거듭나면 그들도 거룩한 구원의 영광에 이르는 귀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베드로는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미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된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12장의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후처로 들인 다음의 이야기죠. 다윗의 불의함을 목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종 나단을 직접 다윗에게 보내 그를 깨우쳐 주셨음을 오늘 성경은 보여줍니다. 주목할 것은 나단이 다윗에게 나아가 비유로 다윗의 일을 지적했을 때 다윗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그래서 나단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가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행위가 죄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나단은 다윗에게 직접적으로 지적했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다윗이 나단의 직접적인 지적을 받자 이내 나는 죄를 범하였노라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핑계 되고, 변명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 꿇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속죄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사면을 통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오늘 구약의 말씀은 보여줍니다. 때문에 죄인 된 우리가 할 일은 새로운 기회를,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속죄함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겸손히 주의 뜻을 받들며, 날마다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지적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며, 자신이 한 악행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정죄하는 데 앞장서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을 또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도 인간의 그런 한계와 특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고쳐 쓰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이고,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거룩한 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가르치고 말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다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고, 인간이 그 기회를 통하여 돌아서면 오늘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능력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 드러나는 다윗과 베드로의 이야기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오늘 베드로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 선 무리들을 향해 너희들이 몰라서 그랬다편들어 준 것도 그 섭리 가운데 전한 증언인 것입니다.

때문에 연약하고 부족함을 아는 인간들이 할 일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베드로와 같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선 성전에 모인 무리들과 같이, 나단의 경고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한 다윗과 같은 회개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인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나는 안돼하는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회 주셨을 때, 하나님이 회개를 촉구하실 때 기꺼이 인정하고, 무릎 꿇는 것이라는 점을 오늘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신앙을 걱정합니다. 말씀이 무너졌다 한탄 하고, 하나님의 의가 사라졌다 한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졌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사라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선지자 나단의 비유를 다른 이의 잘못으로만 치부했던 다윗의 우매함이 우리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보니 교회를 향한 한탄이 나오고,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줄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이익을 위해, 내 평안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들이 만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들었던 다윗처럼 살고 있는 것이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분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겸손입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먼저 내 삶을 먼저 적용하는 것이고, 내가 죄인입니다 먼저 회개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성전에 모였던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부하를 죽이고도 당당했던 다윗은 나단의 지적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쓰레기 차를 떠올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날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엘리제를 위하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포된 말씀이 닭 울음소리가 되고, 나단의 지적이 되고, 베드로의 설교가 되어 우리가 먼저 회개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먼저 돌아서고, 우리가 먼저 회개하면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주의 영광을 보고, 진리를 깨닫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검은 밤 빛나는 네온 십자가는 한탄과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도전과 회개의 촛불이 될 것이고, 도심에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그들의 심금을 울리고, 양심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될 것입니다. 제자 베드로가 먼저 깨닫고 회개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먼저 깨닫고 회개하여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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