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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6-2) - " 낮아짐의 길, 평화와 생명의 길 " / 이태영 목사

관리자 2019-04-12 (금) 14:14 7일전 46  

본문) 12:12~19, 9:9~12, 2:1~11

 

예루살렘에 들어서시는 예수님께 무리가 흔든 나뭇가지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나뭇가지’(21:8), 마가복음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11:8)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나뭇가지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 위에 폈다”(19:36)고만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종려나무 가지”(12:13)라는 표현을 분명하게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지키는 것은 요한복음서의 증언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종려나무

 

구약성경에서 종려나무가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출애굽기 15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사막의 오아시스에 있는 종려나무는 물 샘과 함께 구원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했습니다(4:5). 이처럼 종려나무는 공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종려나무는 성전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를 비롯하여 곳곳에 문양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왕상 6:29, 왕상 7:36, 대하 3:3). 종려나무는 히브리어로 타마르인데 성경에는 다말이라는 인명과 지명이 여러 번 나옵니다(38:6, 삼하 13:1, 47:19).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종려나무는 키가 크고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번영(92:12)과 아름다움(7:7-8)을 나타내는 귀한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

 

특히 요한복음의 종려나무 가지라는 표현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기원전 167년에 성전을 회복한 일입니다. 당시 시리아를 물리친 이스라엘 백성은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승리와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카베오상 13:51에 나오는 종려나무 가지”(바이온)라는 표현이 유일하게 요한복음서 12:13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매우 의도적으로 이 표현을 인용함으로써 당시의 무리의 염원을 나타내려 했을 것이라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무리가 갈망한 것은 옛 다윗 왕조의 복원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리는 예수님께 호산나를 외치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합니다(12:13). 이러한 분위기는 대체로 모든 복음서의 증언이 일치합니다. 마태복음은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하고(21:9), 마가복음은 우리의 조상(아버지) 다윗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찬송했다고 합니다(11:10). 누가복음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칭송합니다(19:38). 무리는 고난 받는 왕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윗의 뒤를 이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입성과 관련해서 특별한 증언을 합니다.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2:18). 무리는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적을 보고 열광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 직후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도 합니다(6:15).

 

나귀 새끼와 예수님

 

무리의 환호성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입니다. 더구나 나귀의 새끼는 어미에 비해 힘도 약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조를 잇기를 기대하는 무리 앞에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고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스가랴서에서 염원하는 왕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스가랴 9:9-10에서 고백하는 새로운 왕은 겸손한 왕입니다. 그는 나귀 새끼를 타는 왕입니다. 말을 타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과는 전혀 다릅니다. 스가랴서가 전하는 왕은 평화의 왕입니다. 그는 모든 전쟁을 없애고 화평을 전하는 왕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스가랴서에서 염원하는 왕의 모습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일치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평화의 메시야요, 겸손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역시 예수님을 고백하면서 낮아지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의 고백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태를 가지셨고, 사람으로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겸손한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입니다(2:6-8).

 

낮아짐의 길, 죽음의 길 그리고 부활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무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대조차 한순간에 저버리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명예와 욕망과 영광을 버리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버림받고, 철저하게 짓밟히고, 철저하게 낮아지는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배신당하고, 처절하게 고통당하고, 처절하게 죽임당하는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총회에서 제정한 씨뿌림주일과 그리고 4.19혁명 기념주일입니다. 이 세 기념주일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세 기념주일은 십자가 앞에서 하나의 공통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이며, 그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박수인가 채찍인가, 면류관인가 가시관인가, 왕좌인가 십자가인가를 묻습니다. 살고자하는가 죽고자하는가를 묻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4.19 혁명도 자유를 위한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기 위한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길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부활을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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