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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1-2) - " 회개는 마주보는 것입니다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9-03-08 (금) 16:24 5년전 2082  

본문) 마 6:16-18, 사58:1-9, 고후7:2-13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이 세상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는 절기입니다. 올 해는 사순절 첫 주일이 우리 교회 창립기념주일과 겹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께서 우리 교회의 창립예배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제발 ‘회개함으로 새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불신자들의 회개(메타노이아)가 죄와 세상으로부터 예수님께로 향하는 ‘돌이킴’이라면 구원받은 성도의 회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돌이키는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최근에 개봉된 비슷한 영화 두 편이 있습니다. 하나는 관람객 천만을 훌쩍 넘긴 “극한 직업”이고 다른 하나는 겨우 이백만 정도인 “뺑반”(뺑소니 단속반)입니다. 둘 다 경찰수사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뺑반”은 “극한직업”에 비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지만 그 내용 중 매우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뺑반” 소속의 ‘서민재’는 폭주족이었던 과거를 씻고 경찰이 됩니다. 그를 쫓던 경찰이 사고로 불구가 됐지만 서민재를 아들(양자)로 품습니다. 그 덕에 ‘폭주족 탕아’였던 서민재는 경찰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뺑반’선배 ‘은시연’이 묻습니다. “왜 하필 경찰이야?” 그 때 서민재가 대답합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출소하던 날) 소년원 앞에서 기다리면서. ‘그럴 생각 있으면 갚으면서 살자. 같이.’ 옛날의 저 같은 사람, 다시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가 “뺑반”의 경찰이 된 것은 자신 때문에 장애를 입고도 자신을 아들로 삼아준 ‘양아버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폭주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바로 잡는 위험한 일에 자신을 내 던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회개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대하는 것’,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사람의 죄악에 대항하고 그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새롭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마주보는 회개(마6:16-18)

 

믿는 자의 회개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사람에게 보이는 ‘가시적 경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참 경건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은밀한 경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복, 영원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산상수훈 중에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경건생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기도’와 ‘구제’와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구제와 금식은 오직 하나님만을 마주대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서 벽을 향하고 기도했듯이 하나님과의 사이에 그 무엇도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욕망의 도구로 삼는 경건은 갈수록 우리를 세상의 가치에 종속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대면할 때 우리의 욕심과 세상의 정욕은 사라지며 온전히 하나님께 붙들리는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내 뜻과 욕심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 하십니다. 구제는 이웃을 돕고 섬김으로 우리를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구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자랑하면 물질의 욕심이 명예욕으로 치환될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그 상을 받은 것  뿐입니다.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거룩과 온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얽어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이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시 티끌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아! 사람으로부터, 세상이 인정해주는 칭찬과 세상영화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향할 수 있다면 얼마나 깊은 영적 교제와 충만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웃을 마주보는 회개(사58:1-9)

 

믿는 자의 두 번째 회개는 자신으로부터 이웃에게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금식은 이웃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이웃은 내 경쟁의 대상이 아니고, 내 필요를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며, 내 유익을 위해 이용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신을 위해 살던 이기적 삶을 버리고 가난하고 헐벗고 포로 된 이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의 삶을 비로소 대면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내 소원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의 고통을 통해 그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짐을 짐으로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 있는 이웃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함으로 나 자신의 욕심에서 자신을 구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우리의 이기심으로부터 자신을 회복시킵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마니까요! 우리가 고통당하는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죄와 사망으로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이웃을 용서한 만큼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올바른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그 수고와 희생과 공로만큼 보상해달라는 것은 분명한 ‘상거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2절) 금식은 하나님께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요구를 들어주실 때까지는 밥한 술도 안 뜨겠다는 ‘강요’가 아닙니다.(3-4절) 그것은 참 불손한 행위입니다. 금식은 오히려 이웃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입니다.(6절)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며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입니다.(7절) 모든 관심을 자신으로부터 이웃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고난에 관심을 갖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그동안 우리의 이웃들에게 소홀했던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 때 막혔던 하늘이 열리고 나를 얽매였던 결박이 풀어지게 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8절), 병든 몸이 ‘치유될 것’이며, 여호와의 영광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9절) 그리고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과거의 나를 대면하고 나와 같은 이웃의 짐을 져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과거의 나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그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 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말씀을 마주보는 회개(고후7:2-13)

 

믿는 자의 세 번째 회개는 말씀을 마주보고 바로 보는 회개입니다.(10절)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이용하여 복을 받고 말씀을 통해 건강하고 말씀으로 번창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 말씀을 바로 대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대면하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통회 자복하는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 그들의 분쟁과 음란과 은사의 혼란과 온갖 미성숙한 죄악을 꾸짖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 꾸짖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 교회가 시험에 들고 바울의 책망을 거절하여 영적으로 뒷걸음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돌아와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책망을 잘 받아들여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말을 듣고 감사한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무죄한 사람들만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것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회개하고 자신을 죄악에서 돌이키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순간만 거룩합니다. 자신의 죄를 놓고 근심하는 순간에만 정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을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만큼 거룩하고 회개하는 만큼 존귀한 자가 됩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것은 참 회개가 있을 때입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미화하며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는 순간 교회는 그 거룩성을 상실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놓쳤지만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님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울왕은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잃었지만 다윗은 나단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 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단절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고립되고 맙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다운 사회는 회개를 통해서만 성립된다. 죄란 한 개인을 외톨이로 만든다. 고립된 인간일수록 더 파괴적인 죄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더 파괴적이 될수록 더 고립된다. 이 파괴와 죄와 고립의 악순환에서 한 인간은 멸망을 향해 간다. 이 악순환에서 헤어 나올 길은 오직 회개뿐이다. 속에 숨겨진 것을 다 털어내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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