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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2) - " 다윗과 함께 춤을 " / 조성호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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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6-2) - " 다윗과 함께 춤을 " / 조성호 목사

관리자 2018-03-24 (토) 16:18 6년전 2864  

본문) - 막11:1-10, 삼하6:12-19, 히12:18-24

 

 <설교> : 사무엘서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관리하고 조정해 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기록되어 있는 ‘베레스 웃사’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이곳을 명실상부한 수도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궤(법궤, 언약궤)를 옮기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안치하면 예배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권 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법궤 이동은 정치도, 하나님 섬기는 일도 잘해보고자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의 퍼레이드가 벌어졌습니다. 화려한 축제였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베레스 웃사’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언약궤 이동 계획은 취소되고 맙니다. 뭐가 잘못되었지? 다윗은 고민에 빠집니다. 앞이 막힐 때는 뒤돌아보고 살펴야 합니다. 법궤에 관한 규례들에 생각이 미칩니다. 법궤 운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법궤는 구별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만 했습니다(출 25:8-22, 민 4:15, 7:9). 사울에게 쫓겨다나던 광야 시절, 매사를 하나님께 묻고 그토록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던 다윗인데, 왕위에 올라 결정적인 대사를 치르는 때에 왜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정해주신 규례들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정치적 목적에 법궤(하나님, 예배, 종교)를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자기 목적이 앞서다보니 수단과 치장을 더 요란하고 화려하게 했던 것 아닐까요? 알고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윗은 역사도 망각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마법의 램프나 부적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겪었던 쓰라린 역사의 교훈까지 잊어버렸습니다(삼상 4-5장).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그대로 따라하고 말았습니다. 삼상 6장에 기록된 블레셋의 법궤 운반 방식은 삼하 6장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수레를 이용해 운반하는 것이 사람이 메고 가는 것보다 능률적, 효율적이고 발전적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 교회 안에, 능률, 효율, 편리, 합리, 속도, 성장, 발전, 혹은 부흥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릴 줄 모르는, 비인격적인 것들(물질, 기술, 돈, 이념, 체제, 권력, 성공 등)이 우상화, 절대화됨으로써 인권과 인격이 유린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레스 웃사’ 사건에서 우리가 새겨 보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웃사는 오랜 세월 동안(약 70년 가량? / 삼상 7:1-2 사무엘 치하 20년 + 사울 치하 40년 + 다윗 치하 10년) 법궤를 지켜왔던 아미나답의 아들이었습니다. 법궤를 지키고 돌보는 일에 있어서는 숙달된 전문가입니다. 웃사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법궤는 거룩하다. 하나님이 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이 거룩한 궤 안으로 더러운 것들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의무다.’ 마침내 웃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지켜드리고 있다고 자부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수레에 실려 있던 법궤가 떨어지려 할 때 웃사가 손을 번쩍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든 것은(6절, 새번역: 꼭 붙잡았다) 돌발적인 상황에서 취한 반사행동으로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법궤를 지키는 직분자로서 “거룩한 물건들이 몸에 닿았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민 4:15)는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가 평소 법궤를 대하고 다루었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궤를 지키려는 열심은 있었지만,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열정은 무모할 정도로 있지만 기본을 잊어버린 웃사의 손버릇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오늘의 ‘웃사’들이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살육을 합니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지켜드리고 있는 수호자라 착각하는 오늘의 ‘웃사’들이 벌이는 반인륜, 반도덕적 행태로 인해 하나님은 모독당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한숨짓고, 교회의 위상은 곤두박질칩니다. 종교지도자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예배드리는 일에는 전문가가 되었지만 순종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까?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당과 품격 있는 예식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고 조종하려 들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까지도 무감각하게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을 무시하는 일은 ‘베레스 웃사’처럼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운반 방식은 달랐습니다. 구별된 사람들이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함께 메고, 한 발 한 발, 느리더라도, 중심 흔들리지 않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법궤가 머물고 있는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내려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징표입니다. 오벳에돔은 블레셋 성읍 가드 출신입니다. 법궤(하나님의 임재)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다윗은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반성과 깨달음의 시간이 지난 후 다윗은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또 한 번의 큰 축제가 더 크게 벌어집니다. 찬양대의 규모도 더 큽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례를 그대로 따르는 퍼레이드입니다(참조: 대상 15:1-26). 다윗은 너무 좋았습니다. 신명납니다. 왕복을 벗어던지고 모시 에봇(속옷이 아니라 제사장의 옷?, 혹은 종교예식에 참여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법궤가 있는 곳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듯, 다윗은 법궤를 따라가는 행렬에 계층과 계급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듯 법궤를 따르는 이들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다윗의 겸손입니다. 광야에서 훈련받을 때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았습니다. 무사히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모두 함께 기쁨으로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열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스라엘 역사에 위대한 순간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축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그러하였습니다(성경은 그녀를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딸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기구했던 사울의 삶이 다가옵니다). 그녀는 백성들과 같이 어울리며 춤을 추고 있는 다윗에게 화를 냅니다. 왕실의 체통을 구겼다고 업신여깁니다. 미갈, 그녀에게는 다윗의 순종은 물론이려니와 웃사의 열정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퍼레이드에서 웃사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에게 닥칩니다.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됩니다. ‘베레스 미갈’입니다(삼하 6:23).

 

법궤가 상징하듯 오늘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잔치가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잔치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다윗과 같습니까, 미갈과 같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쁨이 있습니까? 한 주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고백과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까? 미갈 처럼 못마땅한 채로 잔뜩 찌푸리고 앉아 예배를 구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체면치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기쁨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우물은 점점 말라 갈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전한 사도 바울의 우직하고 열정적인 증언이 떠오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날의 모습과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날의 장면이 겹쳐집니다. 법궤가 들어오던 날이 그러했듯이 오늘도 온 예루살렘 성이 축제의 날입니다. 다윗의 춤은 군중들이나 아내를 즐겁게 해주려는 광대의 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춘 춤이었습니다. 다윗처럼 춤추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십니까? 1000여 년 전 그 날, 예루살렘성에 축제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양대가 법궤 뒤를 따랐듯이, 오늘은 ‘호산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다윗이 춤을 추었듯이 예수님도 나귀에서 내려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시지 않았을까요? 혹시 <춤의 왕>이란 주제의 아일랜드 민요, Lord Of The Dance / The Dubliners)를 기억하십니까? The Dubliners 그룹이 노래한 원곡의 느낌이 좋습니다.

 

1.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2.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 때 그들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 

  어부 위해서 춤을 추었을 때에는 날따라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3.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춤췄더니 높고 거룩한 양반들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겨 매달았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4. 높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춤을 계속해 추기란 힘이 들지만 

  끝내 땅 속에 깊이 묻힌 이후에도 난 아직 계속 춤춘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5. 어리석게도 그들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 살면 나도 네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련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다윗의 춤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평화로 인해 기쁨이 가득한 춤, 모든 이들이 함께 따라 춤추기에도 덩달아 기분 좋은 춤이었다면, 예수의 춤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향한 연민과 저들을 위한 십자가 사랑의 길을 가는 고통과 슬픔이 배어있는 춤, 제자들조차 따라 하기 싫어했던 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당신을 태웠던 새끼 나귀와 함께 춤을 추십니다. 춤추며 이렇게 노래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춤까지 출 것이다. 나를 위해선 아무도 춤 추어주지 않을지라도, 너희들의 인생은 반드시 춤추는 인생이 되도록 하겠다. 내 춤을 방해하는 죽음의 세력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끌어안고 무덤까지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의 춤사위로 무덤문을 깨뜨리고 나올 것이다.”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려는 열정으로 가득한 분이십니다. 그 일을 위해 십자가 매달리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고 피가 뿌려지는 산제사가 드려집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땅의 사람들을 위한 열정과 하늘 아버지를 향한 순종의 완벽한 조화입니다. 이후 그 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받아먹고 거듭난 제자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예수로 인해 우리 모두는 죽음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며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며칠 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합니다. 예수를 향한 열정은 있지만, 예수께 순종하며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상황에 따라서 내 맘 내키는 대로 손을 뻗는 웃사를 닮았습니다. 스승이 가시는 길을 막아서고, 종래는 도망가는 예수의 제자들에게서도 웃사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춤판을 벌이는 예수가 영 불편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율법학자, 바리새인, 제사장들) 이었습니다. 특권층이었던 그들은 체통을 구기고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싸늘한 눈초리로 예수가 벌이는 춤판을 못마땅하게 구경만 할 뿐, 미갈이 다윗에게 했듯 예수를 업신여겼습니다. 마침내 예수를 없애려고 이스라엘의 공동의 적, 로마 제국의 권력에 아부하고 그들과 결탁한 잘못된 열정과 비뚤어진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상 최고의 춤, 영원의 춤을 추시는 분의 파트너로 초대되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신랑 예수와 함께 추게 될 영원한 춤판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연주에 맞추어 신앙의 선배들과 믿음의 길을 완주한 세상의 모든 교회공동체 식구들과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추는 춤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 축제의 날에 이르기까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열정을 갖고, 그 길에 놓여있는 내 몫의 십자가를 순종으로 지고 가는, 오늘의 춤추는 다윗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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