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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1) - "따라 따라 예수 따라가네"/ 김진수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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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사순절(6-1) - "따라 따라 예수 따라가네"/ 김진수 목사

longbeach 2018-03-23 (금) 17:11 6년전 2619  

본문) 삼하6:12-19/ 히12:18-24/ 막11:1-10 (종려주일)

     

사람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누군가를 따라갑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따라가느냐가 바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따라 따라 예수 따라가네”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1890년에 서울에 와서 보고 경험했던 “보배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책입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시집간 ‘보배’는 자신을 종처럼 부리는 남편을 따라 살면서 열여덟에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내를 모질게 구박하던 남편이 일찍 죽자 시댁은 돈을 받고 ‘보배’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넘깁니다. ‘보배’는 이 두 번째 남편에게 다시 종살이하듯 끌려가 더 모질고 고통스런 삶을 살지만 곁에 있는 자신의 “딸”로부터 유일한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보배”는 마지막 남은 소망이었던 그 딸마저 잃습니다. 이제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에서 그녀를 찾아온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보배’가 읍내에 갔다가 기적같이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오직 예수님을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보배”가 만난 “예수”는 그동안 짐승 같은 취급을 받던 조선의 한 많은 여인, 절망과 고통 속에 살던 여인을 구원했고 오히려 그 남편, 그리고 무당과 온 마을이 그 한 여인으로 인해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는 감동적인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왕의 도성, 다윗 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하여 잘못 좇았고 예수께 실망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끝까지 따랐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끌고 가는 말씀, 순종하는 말씀(삼하6:12-19)

     

사울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의도대로 살기를 원했고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릴 때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따르고 경배하며 살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천한 목동에서 한 나라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여부스족속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삼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그곳에 모셔옴으로 온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사는 백성”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옴으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새 시대가 이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 시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법궤를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높이고 따르고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 묵은 이스라엘의 영적 적폐를 먼저 일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궤짝 다루듯 해온 악한 습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건 짝”을 수레에 실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는 몰라도 점잖은 사람이 소가 모는 수레를 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도 수레가 아니라 사람들이 메는 가마나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법궤를 수레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이동하게 하셨습니다.(출25:14-15, 민4:15) 그러나 다윗은 다윗성에 하나님의 말씀의 법궤를 옮겨올 때 이를 간과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법궤가 너무 오랫동안 “바알레유다”에 방치되어 있어서 법궤를 이동해본 일이 없었고 가까운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거대한 신상을 옮길 때마다 수레를 사용해 온 것에 익숙해진 다윗이 부지중에 법궤를 옮기는 규례를 범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Lange)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서 나온 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 충돌(베레스)합니다. 아무리 좋은 인간의 지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순적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법궤 이동행사는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소들이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6절) 자신의 주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제 멋대로 행하는 다윗처럼 소들도 자신의 주이신 다윗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충동대로 날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받들어 순종해야 할 말씀을 내 소유물로 여기고 내 방법대로 수레에 끌고 가는 사람들처럼 소들도 사람의 말을 받들지 않고 제 멋대로 수레를 끌고 간 것입니다. 소들이 뛸 때 법궤를 메고 가지 못한 잘못을 깨닫는 대신 손을 들어 법궤를 붙들어 또 다른 죄를 범하는 죄의 악순환에 이르게 된 사건, 이것이 “베레스웃사”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십자가를 내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받들어 순종해야 할 일이요 십자가는 욕망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나를 죽이고 지고가야 할 사명이 아닙니까?

     

말씀을 내 욕망성취를 위해 사유화하고 말씀을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도구화하는 이 비극의 줄을 끊지 않고는 다윗은 새 시대 새 나라를 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기를 기다려 마침내 법궤를 보관하고 있는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다는 말을 듣자마자 법궤를 모셔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육보일배(六步一杯)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온 몸으로 춤을 추면서 법궤를 영접했습니다. 그런데요, 법궤를 예루살렘에 온전히 들어온 후, 끌고 다녔던 말씀을 절대 순종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후에 비로소 다윗왕국에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삼하7:1)

     

끌고 가는 백성, 끌려가는 예수(막11:1-10)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웬 어린 나귀입니까?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그런데 지금 어디서 나귀를 찾으며, 찾아도 누가 거저 줍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나귀가 어디 있는지도 아셨고 그가 명하시자 만나본 적도 없는 나귀 주인도, 남의 손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도 고분고분 순종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만이 율법을 이루실 자시요 완전한 성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 따라가야 우리는 마귀의 도전, 세상의 유혹,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법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과 해방을 주시는 참 왕이 되십니다. 저주와 우리의 대적 마귀를 몰아내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왕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예수 따라가야 죄를 이깁니다. 마귀를 이깁니다. 세상을 이깁니다.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이십니다.

     

그러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 했습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나타내는 예수를 왕으로 삼아 그들이 당면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를 타개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자신 안에 배태되어있는 불행과 절망의 원인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회적 위기와 정치적 위기의 본질, 억압과 질병과 고통의 뿌리인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를 얻기만 하면, 경제적 위기만 해결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에 넘겨줌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존재로부터의 변화, 우리 속사람을 새 창조함으로 누룩처럼, 겨자씨처럼 하나님 나라가 퍼져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자신들의 뜻을 성취해 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날마다 끌려 다니시는 예수를 이제 풀어 놓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끌고 가실 수 있게 예수를 자유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보다 한상 앞서려는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죽이지 않으면 욕심과 정욕이 예수를 죽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예수가 살아야 우리가 다시 삽니다. 새 존재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살려라! 예수가 살아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고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들(히12:18-24)

     

히브리서 기자는 매우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감히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친히 뵐 수도 없었습니다. 산에 불이 붙었고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큰(?)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8-19절)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지 않도록 간구했으며 모세조차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20-21절) 모세를 따라간 사람들은 하나님께 접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18절, 너희는)이 이른 곳은 모세가 올라갔던 만질 수 있는 지상의 시내산이 아니라(18절) 하늘에 있는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 천만 천사, 생명록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 심판주 하나님, 중보자 예수님이 계신 곳에 친히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접근 할 수 없었던 하나님 앞에 예수 믿은 우리는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따라 순종함으로! 주님과 함께 우리는 모세도 감히 접근 할 수 없었던 은혜의 자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리에 들어갑니다.(롬5:2) 

     

우리가 들어가게 된 곳은 “(심판과 보복을 외치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라는 예수님의) 뿌린 피”가 있는 곳입니다.(24절)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주이십니다. 결코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간과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과 심판을 우리대신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를 대항한 대역 죄인을 매다는 형틀입니다. 죄인의 괴수가 달립니다. 시시한 죄수는 이 형벌을 당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우리대신 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가 그만큼 크고 절망적인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이 그만큼 크고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을 벌거벗기는 그 수치를 보십시오! 

- 스스로 자기를 못 박을 형틀을 지고 가야하는 심리적인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채찍으로 온 몸을 난자당하는 그 아픔을 보십시오!

- 신경이 관통하는 양손목과 발 가운데를 커다란 대못으로 두드려 박는 육체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 무엇보다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외면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절연하고 지옥까지 내려가야 하는 그 큰 저주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바로 대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더러운 죄의 뿌리로부터 돌아서서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쉽게 반복하여 죄에 굴복하는 근성을 매정하게 잘라버리고 주님께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보혈의 피는 아벨의 심판의 피를 덮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주님의 대속의 보혈의 피로 사함 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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