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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1) - "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의 길 " / 종려주일 / 씨뿌림주일 / 4.19혁명기념주일 / 이태영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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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사순절(6-1) - "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의 길 " / 종려주일 / 씨뿌림주일 / 4.19혁명기념주일 / 이태영 목사

관리자 2025-04-11 (금) 18:47 27일전 98  

본문) 슥 9:9~12, 빌 2:1~11, 요 12:12~19


 * 씨뿌림주일 *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씨뿌림주일입니다. 우리 교단은 15년 전에 씨뿌림주일을 정했습니다. 우리 교단이 씨뿌림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우리가 가을에 추수할 때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거둘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뿌릴 때도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거둘 때만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때도 예배 드리자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릴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고, 찬양입니다. 씨앗을 뿌리기 전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십자가 신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씨뿌림주일은 무엇보다 우리가 씨앗을 뿌릴 때 감사와 기도로 뿌리자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씨뿌림 주일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믿음의 씨앗이 되자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의 씨앗, 복음의 씨앗이 되자는 것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천국과 복음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열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순교자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요한복음 12:12-19 *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이 되기로 작정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죽는 씨앗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살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죽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낮아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섬기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나오는 맹인 이야기


성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함께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맹인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은 21장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전하는데, 바로 그 직전에 맹인 두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11장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바로 그 직전에 맹인 바디매오를 고친 말씀을 전합니다.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8장에 맹인이 고침을 받는 말씀을 전합니다. 요한복음은 맹인 이야기를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내용을 전하는데, 요한복음은 9장 전체를 통해서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청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말씀을 전하면서 맹인의 이야기를 함께 전한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당시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 봤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았어도 영적으로는 모두 맹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종려나무의 의미


오늘 말씀에 보면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증언합니다.

종려나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종려나무가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출애굽기 15장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사막의 오아시스에 있는 종려나무는 물 샘과 함께 구원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했습니다(삿 4:5). 이처럼 종려나무는 공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종려나무는 성전에서도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까지 종려나무의 모습을 비롯하여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왕상 6:29, 왕상 7:36, 대하 3: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종려나무는 키가 크고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번영(시 92:12)과 아름다움(아 7:7-8)을 나타내는 귀한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통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번영을 원하는 백성들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나무였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호산나를 외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외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 내용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당시 무리가 외친 내용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였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옛날에 다윗이 부강한 나라를 세운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로마 군대도 쫓아내고, 헤롯 왕도 쫓아내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님께 원한 것은 새로운 국가였습니다. 다윗 왕이 세운 것과 같은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군사적으로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부한 나라였습니다. 무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에 맞추려면 예수님께서는 말을 타셔야 했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왕보다 더 품위있고 근엄하게 말을 타고 들어가셔야 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택하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생각이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부터 새끼 나귀를 생각하셨습니다.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볼품이 없지만 섬기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순하고 순한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을 지는 동물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섬기는 나라임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새끼 나귀를 택하신 것은 그 속에 순수함과 성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끼 나귀는 어미를 따르는 동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모습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섬기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말을 탄 왕처럼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나귀와 같이 섬기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새끼 나귀가 어미를 따르듯이 순종하며 가는 길이요, 순결함과 순수함으로 가는 길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왕의 자리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쉬운 길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힘든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넓고 편한 길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좁은 길,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대한 것을 이긴다


스가랴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야의 모습도 요한복음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나귀를 타고 죄와 폭력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은 겸손, 그 자체입니다. 오늘 스가랴 본문에서 ‘겸손한’이라고 번역된 말에는 본래 ‘가난한, 비천한, 억압받는’의 뜻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의 메시야가 세상의 죄와 폭력을 이기고 화평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긴다는 이러한 구도는 평화가 폭력을 이기며, 선이 악을 이기는 구원의 역사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고백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세속적인 왕의 모습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왕의 모습을 부인하고 스가랴서의 말씀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비움, 낮춤, 순종의 믿음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비움’(빌 2:7)과 ‘낮춤’(빌 2:8)과 ‘복종’(빌 2:8)입니다. ‘비움’은 자기부정을 말하고, ‘낮춤’은 지극한 겸손을 말하며, ‘복종’은 십자가에 이르는 순종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이 물리적 힘으로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서, 이와 정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겸손과 순종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된 ‘포르네오’라는 단어에는 ‘생각하다, 판단하다’의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상을 제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비움과 낮춤과 순종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판단하면서 따르는 제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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