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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주현절(5-1) - " 세 나라 , 두 백성, 한 아들 이야기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20-02-07 (금) 12:30 4년전 1776  

본문) 암9:7-10,  롬8:12-17,  막3:20-27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 1848년 1월 14일 아침,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수 제임스 마샬은 '눈 덮인 산맥'이라는 뜻의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기슭, 아메리카 강변의 한 제재소 방수로를 점검하다가 방수로에 쌓인 자갈과 진흙사이에 묻혀서 빛을 발하고 있는 콩만 한 물체들을 발견했고 그것이 순도가 매우 높은 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전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연안 무역에 종사하던 선원들이 몰려왔고 이어서 멕시코와의 전쟁 때문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금을 찾아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1848년 그 해 12월에 급기야 당시 포크(James Knox Polk) 미국 대통령은 빗발치는 질문에, "터무니없는 공상적 소문만 빼면 사실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발언함으로써 1949년부터 이른바 그 유명한 '골드러시'(Gold Rush)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 당시의 광풍처럼 불었던 골드러시의 행렬 속에서 그들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행렬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852년(골드러시가 시작된 지 3년 후) 어느 날 나는 오마하를 떠나 서부 태평양 연안을 향해 달리는 두 무리의 포장마차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길을 따라 여러 날은 함께 달리다가 마침내 두 갈래 길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무리는 마차의 포장에 'God Seekers'라고 표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미 2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청교도들의 후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무리는 마차 포장에 'Gold Seekers'라고 표시하고 황금 노다지를 찾아 헤매는 Forty-niners(금을 찾아 미국 서부로 달려간 “1849년의 사람들”)였습니다. 전자는 미국 동부에 상륙한 청교도들의 후예들로 믿음으로 서부를 개척하여 오늘의 미국 문명을 건설하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황금을 얻기는 했으나 금광이 폐광 된 이후 그들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운명이 갈린 세 나라 이야기(암9:7-10)


오늘 구약 본문 암9장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결국 서로 다른 운명에 이르게 된 세 나라 이야기를 꺼냅니다. 첫 번째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이었던 히브리인, 구스족속 같았던(암9:7)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나라는 블레셋과 아람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블레셋 사람들은 ‘갑돌’에서, 아람사람들은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스라엘이 정착한 가나안 땅 주변에서 살게 하셨습니다(암9:7). 세 나라는 가나안 땅과 그 주변에 함께 거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나라가 가나안 땅 주변으로 올라온 이유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왔고 블레셋, 아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보다 잘사는 나라, 부강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가나안 땅 주변으로 이주해온 것입니다. 당연히 블레셋과 아람, 이 두 나라는 우상숭배와 죄악과 쾌락과 음행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스라엘도 처음과는 달리 블레셋과 아람나라처럼 동일하게 우상숭배와 불의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악가운데 사는 세 나라를 함께 멸하셨습니다(암9:8). 지면에서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고 곡식을 추수할 때처럼 채질하셔서 쭉정이들은 걸러내고 알곡은 건져내듯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암9:8-9). 그렇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이 세 나라는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 완전히 무너져버린 두 나라(블레셋, 아람)와는 달리 하나님은 70년 포로생활 중에 하나님께 돌이키고 회개한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겨우 안정된 보금자리를 박차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미 황폐해진 옛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맨손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려 했던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마침내 새 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 뉘우침이 없고 회개가 없는 백성,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들(암9:10)”은 죄 가운데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 중에서 뉘우치고 통회하며 회개하여 돌아 온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따르며, 포도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을 것(암9:13)”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나라와 종족과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두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끝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심판받아 망하게 되는 나라와 범죄하고 넘어졌으나 회개하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 삶을 다시 시작하는 새 백성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길을 걸어간 두 백성 이야기(막3:20-27)


운명이 서로 갈린 블레셋과 아람, 그리고 이스라엘 세 나라 이야기에 이어서 오늘 복음서 막3:20-27은 서로 길을 걸었던 두 백성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스라엘이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구원받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예루살렘 주변은 여전히 수많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백성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죄의 유혹에 에워싸여 있으며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대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적들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 백성 중 한 편은 대적들 앞에서 동족들끼리 싸웁니다. 그들의 지도자를 공격하고 한 편끼리 반목하고 싸웁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망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또 다른 한 편은 우리의 대적이 누구인지를 분별하여 아군은 보호하고 적군은 공격하여 싸워 이깁니다. 소위 명목상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한 편은 우리 대적 마귀 편을 들어 아군들과 싸웁니다. 아군을 공격하여 자멸합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백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군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누구인지 분별하여 대적을 공격하고 대적을 물리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들을 죽이고 망하게 하는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 백성들끼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가족이 나섰습니다(막3:21). 착하고 성실했던 장남, 한 가족의 기둥 같았던 형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갑자기 집을 나갔습니다. 무기 하나, 군대하나 없이 나라를 구원한다는 정신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 미친 형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충정으로 예수를 붙들러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입니다(막3:22). 성경만 연구하는 성경학자들이 성경해석의 기본도 모르는 무식한 목수의 아들이 혹세무민하고 좌충우돌하며 자꾸 귀신을 내쫓는다면 벌이는 이상한 일들을 막으려고 와서 예수가 귀신들의 대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막3:22). 


누가 우리의 대적입니까? 아무리 흠이 있고 허물이 있어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 죄인들을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사랑과 평화와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은 우리의 대적이 아닙니다. 혈과 육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엡6:12). 우리의 대적은 무엇보다 악한 마귀와 그 휘하의 악한 영들입니다. 사람들의 배후에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오해하고 넘어뜨리는 어둠의 권세를 결박해야 합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마3:27)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말씀과 기도로 어둠의 생각을 정복하고 죽여야 합니다. 우리들 넘어지게 하고 이웃을 향해 분노하게 하는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사랑이 임하고 은혜가 임하기까지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고맙고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 곁에 두신 사람으로 보일 때까지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한 아들 이야기(롬8:12-17)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간 세 나라 이야기, 서로 대적한 두 백성이야기에 이어 오늘 서신서 롬8:12-17의 말씀은 새 능력을 받고 사는 한 아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힘, 에너지” 때문입니다. 기름 떨어진 차는 고철에 불과 합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고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우리가 우리를 에워싼 대적들과 싸우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우리의 원수들과 싸울 때 우리는 새 힘, 새 능력, 새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동네에 있는 개울에서 헤엄치는 실력으로 태평양을 건너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 때는 전혀 새로운 힘이 필요합니다. 내 실력과 능력을 초월하는 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권능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원수마귀를 이기기 위해, 우리 앞에 당한 모든 불가능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죽어도 꺾어지지 않는 내 혈기를 꺾기위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이웃사랑, 원수 사랑을 위해 우리는 하늘의 능력, 새 힘, 새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 능력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원수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롬8:13) 내 욕심, 내 자아, 내 교만이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내 안에 주님이 오십니다. 새 능력이 덧입혀집니다. 매일 죽어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면”(롬8:13) 이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 매일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육신이 사는 순간 우리는 하늘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죽습니다. 망합니다. 마귀의 노예가 됩니다. 기도는 죽고 사는 일이요, 예배는 우리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 때 하나님의 자녀(장성한 아들)가 됩니다(롬8:14-15).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로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장성한 아들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정욕을 이기며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아버지의 상속자가 됩니다.(롬8:16-17) 대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장성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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