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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6-1) - " 예수님은 왜 어린이를 축복하셨을까? " / 채수일 목사

관리자 2019-02-07 (목) 09:05 5년전 3404  

본문) 신명기 4,32-40, 고린도전서 3,18-23, 마가복음 10,13-16

 

1. 복음서에 따르면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10,13), 혹은 손을 얹어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랐습니다(19,13).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태도는 이해할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방으로 갔는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고, 제자들과 예수님은 고침을 받으려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9,1-2). 게다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퍼붓고 있었으니 말입니다(19,3-12). 그러니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기도하여 주기를 바란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태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말아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19,14)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같은 말씀이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노하셨고’(공동번역은 화를 내시며),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고 합니다(10,13-16).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0,15)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어린이다움’, 다시 말해 우리가 어린이다움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성격이나 성품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순진무구(純眞無垢), 사심 없이 타인을 신뢰하는 순박함,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본능적인 공감능력, 단순함, 솔직함 같은 것이지요. 나이가 들면서 세상풍파 겪으며 때도 묻고 성격도 고약해진 어른들에 비하면 이런 어린이다움은 칭송받아 마땅한 성품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다운 이상적인 인간의 성품이나 사람됨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인간성이나 성품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비난받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개혁교회전통에도 어긋나는 주장이지요. 또 어른보다 더 영악한 어린이들을 경험한 이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물론 예수님도 어린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유대 전통 위에 서 계십니다. 그러나 어린이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사회와 고대 사회에서 어린이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전통과 관습은 부모들에게 자녀들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권한과 권위를 허락하였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가정의 남자들과 여자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갖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에게 혹독한 체벌을 가하거나(13,24;19,18 ), 자녀를 노예로 팔거나 희생 제물로 봉헌할 수도 있었습니다. 12살이 되어 율법교육을 받기 이전의 어린이는 종교적으로도 미성숙한 자로 여겨졌고, 여자, 이방인, 병자, 가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권리를 갖지 못한 변두리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린이들의 성격이나 성품 같은 특별한 인간성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린이는 부모나 다른 사람의 보호와 배려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약한 사람, 용납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은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받아드리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능력이나 공적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규정하는 세상에서, 능력 없는 사람들, 공적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작은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어린이는 바로 이런 약하고 작은 자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호받지 않고서는 아직 스스로 설 수 없는 사회적 약자, 쉽게 상처받고 고통 받는 주변부 존재, 지상의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 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로서의 어린이를 있는 그대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내적 분열이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둘러싼 논쟁, 특히 방언에 대한 논쟁, 부유한 교인과 가난한 교인들 사이의 갈등, 계파간 대립이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을 지지하는 교인들, 아볼로 혹은 게바를 따르는 교인들 사이에도 다툼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교회 안의 이런 모든 갈등과 분열은 스스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곧 자신을 자랑하려는 헛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고전 3,22). 지혜건 지식이건, 재산이건 은사건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랑의 근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공동체는 갈등에 처하게 되고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해방과 구원의 주님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배신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길로 나간 것이지요. 신명기 법전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신실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찾아야 하고’(4,29), ‘주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참 하나님이시며, 그밖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4,39).

 

3. 오늘은 기장 총회가 정한 신학교육주일입니다. 신학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받는, 미래의 한국 교회의 지도자가 될 신학생들과 그들을 교육하는 교수들과 학교를 위한 성도들의 관심을 일깨우고 또 함께 기도하기 위한 주일이지요. 일반적으로 신학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전문적인 학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많은 신도들은 신학은 어렵고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만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학은 신학대학 안에서나 배우는 것이지 교회 안에서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신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일까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지금은 신학교육이 전문화되어 학교 안에서만 실천되고 있지만, 본래 신학은 교회의 학문,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신학 없는 신앙은 자칫 눈먼 열광주의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다수 교회처럼 지식과 학문을 경시하는 풍토에서 신학 없는 신앙은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없는 신학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없는 신학은 한갓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신학은 삶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구원에로 초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목회자가 되려는 목사후보생들만 공부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신학공부의 마지막 목표는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신학의 전문성 뒤편에 숨어서, 권위에 기대 하나님 배우기를 평생 동안 계속하지 않는 목회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일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주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참 하나님이시고, 그밖에 다른 신은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는 믿음은 만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은 형제자매라는 믿음과 같습니다. 인종과 민족, 계급과 신분, 성과 나이를 넘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같은 피조물임을 고백하지 않은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아닙니다. 주님은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므로, 만물을 하나님 대하듯이 대하지 않는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입니다. 올바른 신학을 공부하지 않거나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위기이지요. 그러므로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신학이 바로 세워져야 하고, 신학이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신학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을 때가능하며,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학문입니다. 이 명제는 한편으로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 곧 하나님 배우기는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을 찾도록 저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찾는 이에게 보여 주소서; 왜냐하면

당신께서 가르치시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찾을 수도 없고,

당신께서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면서 찾게 하시고,

찾으면서 그리워하게 하소서.

사랑하면서 발견하게 하시고,

발견하면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계기에서, 또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찾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우리는 그 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 하는 동안 다만 그 분을 그리워하면서 찾고, 찾으면서 그리워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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