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23-32, 눅 12:49-59
지난 4일은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로 이날부터 새해의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었고 다름 주중12일은 정월대보름입니다. 입춘에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 등의 입춘축에 쓰인 말처럼 좋은 일 많이 만드시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입춘날 붙이는 문구를 보면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기주오복 화봉삼축(箕疇五福 華封三祝)’,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噤不祥)’, ‘우순풍조 시화년풍(雨順風調 時和年豊)’ 등이며, 대련을 보면 ‘거천재 내백복(去千災 來百福)’,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 ‘계명신세덕 견폐구년재(鷄鳴新歲德 犬吠舊年災)’ 등입니다. 단첩으로는 ‘상유호조상화명(上有好鳥相和鳴)’, ‘일진고명만제도(一振高名滿帝都)’, ‘일춘화기만문미(一春和氣滿門楣)’,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到吉人家)’,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등입니다.
정월 14일 저녁에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먹습니다. 또한 달을 보면 운이 좋다고 하여 달맞이와 답교놀이를 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봄을 타고 살이 여위는 것을 막기 위해 백집의 밥을 얻어다가 절구 위에 앉아서 먹는 풍습인 백가반(百家飯)도 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사람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며 더위팔기를 하여 병이 없는 여름이 되길 기원했습니다.
예전에는 설날이라고 하여 그날 하루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름까지 거의 매일 행사가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윷을 놀거나 쥐불놀이를 하거나 연날리기, 제기차기, 널뛰기 정도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선조들은 정초에 12간지에 해당하는 날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각 날마다 해야 할 일과 금해야 할 일을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그 내용들은 주로 쉼과 농사 준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보름 동안 쉼과 함께 일 년의 농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을 돈독히 하는 일이고, 모든 원한을 털어버리고 하나가 되어 새로운 출발하는 하는 것이었습니다.
설날을 가족 단위의 명절이라고 한다면, 정월대보름은 마을 단위의 명절로써 공동체적입니다.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 등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이 가득한 대동의 마당입니다. 14일에는 오곡밥을 짓고 각종 나물로 복쌈을 먹습니다. 오곡밥을 먹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가반이라고 하여 세 집 이상의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액운이 사라지고 운수가 좋다고 하여, 서로 초대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집집마다 돌면서 밥을 얻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때를 잘 알기 위해서는 24절기(양력)와 명절(음력)이나 기념일과 관련된 내용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합니다. 하루에 하늘 한 번 올려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삶 속에서도 절기의 의미를 새기면서 지내다 보면,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연친화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매년 반복하다 보면 때를 알고 철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눈 오는 날 거지 빨래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눈이 오려면 구름이 있어야 하고, 구름이 만들어 지려면 수증기가 응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증기가 응결할 때에는 물이 증발할 때 빼앗은 열이 방출됩니다. 따라서 겨울철에 일반적으로 눈 오는 날이 더 포근하기 때문에 거지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자연에 적응하는 삶의 지혜를 배우면서 사리를 잘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을 철든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서 그때그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연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때를 분간하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본문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하느님 나라와 함께 평화를 원하셨고,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시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누가복음 12:51)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성실하게 따르려는 듯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갈등과 분열을 통해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위 목사라는 전광훈은 가짜 뉴스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고, 사법부의 법 집행을 방해하고, 공개적으로 폭동을 주문하며, 소요와 난동의 배후 노릇을 함으로 한국 기독교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그는 ‘국민저항권은 헌법 위에 있다’ ‘국민저항권이 시작됐기 때문에 윤 대통령도 구치소에서 우리가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 구속심사 당일인 18일 집회에서는 ‘서부지법에 안 나타나시는 분들 형사처벌하겠다’며 지지자들을 압박했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1000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 ‘사람들을 모집해 오는 교인들에 인당 5만 원의 활동비를 지급하겠다’고도 했다. 나아가 그는 15일 공수처 근처에서 벌어진 분신 사건에 대해서도 ‘제게도 개인적으로 생명을 던지겠다는 메시지가 수백 통이 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언제든지 내가 죽을 기회를 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서 효과 있는 죽음을 해야 한다’고 죽음을 사주하기까지 했다.”(기장총회 성명서 “법원 난동 배후 전광훈은 참회하라!” - 1월 19일) 그가 구하고자 하는 대한민국과 윤석열은 무엇이고,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 과연 예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할까요?
49절에서는 예수님이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면서 이미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는 말은 사람들은 이미 서로 갈라져 있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한 때를 분간하고 그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전이나 이후에도, 세상의 현실은 이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불이 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그것의 정도가 조금 더 심하거나 조금 덜한 상태였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남한 사회는 고난의 산을 넘어가는 중에 있습니다. 아직도 그 상황은 1:99라는 말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보다는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오려는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더 많은 어려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가끔은 희망이 보이지만, 그럴수록 분열과 갈등의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야만 그나마 있는 정치적 세력을 규합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묵시문학이나 종말을 말하는 구절은 거의 고난의 상황이 극에 달한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불과 분열이 만연한 세상에서 겪어야 할 어려움을 받아야 할 세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것이 끝날 때까지 내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12:50) 앞으로 이 땅과 사람들이 받아야 할 어려움을 물속에 잠겨서 죽음을 경험하는 세례를 받듯이 함께 견디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갈등과 분열이 주는 안타까움과 어려움을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듯이 견디어야 합니다.
겪어야 할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을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참기 어려운 고난이 다가왔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고난 속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할 수도 있고,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무 곳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었으나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와 정반대의 상황을 전제로 하면서 역(逆)유토피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뜻하는 말이라면, 디스토피아는 반대로 암울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추측합니다.
고난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대하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대응과 그들을 적으로 몰고 그런 공동체를 해체하여 고난이란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의 대응이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내전 같은 상황이 깊어지게 됩니다. 고난 유토피아가 고난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반응으로 즉각적으로 닥쳐오는 반면, 고난 디스토피아는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늑대가 되고 약탈자, 폭도가 되리라는 믿음을 매개해서만 닥쳐옵니다. 따라서 전자가 일차적이라면 후자는 이차적이며, 전자가 직접적이고 자연 (발생)적이라면 후자는 간접적이고 인위적입니다. 인민의 자발적인 자율성과 자본과 정치에 의한 타율성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고난 유토피아는 고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면서 드러내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고난 디스토피아는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고난을 더 가중시키면서 절망하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 의도에 좌지우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전한 야훼 하느님의 말씀처럼 잘못된 욕망으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맹렬하게 타는 불과 바위를 부수는 망치가 임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 본문에 있는 대로 나열하면,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 자들,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하느님의 이름을 잊은 이들,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야훼의 백성이 하느님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는 이들, 하느님의 말씀을 도둑질이나 하는 예언자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거짓말과 허풍으로 하느님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 하느님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함께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절망의 현실은 함께 겪으면서 어떻게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희망이라는 우물은 점점 깊어지는데 누가 두레박이 될 것이며, 그 두레박의 끈은 무엇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이 고난의 현실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연대뿐인데, 연대는 ‘더불어 함께 사는’ 가치를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하는 사람을 ‘일잘러’라고 하면서, 일잘러가 되기 위한 글과 책도 많이 있습니다. 회사(company, corporation)와 동료(colleague, co-worker) 앞에는 모두 co-라는 접두어가 들어갑니다. 일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못 하는 게 있으면 도움을 빠르게 요청하고, 내가 잘하는 게 있으면 부족한 분과 콜라보해서 빨리 끝내는 것, 이렇게 일을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이 진짜 일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경쟁과 이윤으로 뿔뿔이 흩어진 마음들을 모아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하여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일잘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때를 잘 분간하여 그것이 받아야 할 세례라면 예수님처럼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꿈과 희망을 개인적인 삶이나 교회의 활동에서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해서 새로운 마음을 품을 때입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확실하게 희망을 심고, 그 희망의 열매들을 우리의 아이들이 누리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이 생각하고 행동할 때입니다. 희망을 모든 생명들과 나누기 위하여 연대하면서 ‘더불어 함께 사는’ 가치를 몸과 마음에 새길 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로 만들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희망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어떠한 고난의 순간에도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써 기어이 다가오는 희망을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희망이란 절망의 끝에서 피는 꽃이라는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희망이란, 기다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과 희망이란, 지금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준비하면서 희망이 품안에 안기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에 묻혀서 희망을 기다리겠지만, 나는 일상과 신에게 충실하면서 희망을 기다리고 만들어갑니다. 희망이란,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의 몫이기에, 지금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고, 무엇을 이겨내고 있으며, 무엇을 기다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살면서, 희망이 내 것이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희망은 언제나 내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희망을 만드는 일에 함께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중에서 꼭 필요하면서도 우리 교회 공동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일이 단지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넓게 이 나라와 지구의 생명들의 살림을 향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나와 가족의 몸을 건강하게 할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를 건강하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일에 교회적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칠년지병 구삼년지애(七年之病 求三年之艾)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칠 년은 앓아야 하는 병에 걸렸는데, 병은 베어서 말린지 삼년 된 쑥을 달여 먹어야만 낫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겠습니까?> 아들은 삼 년 묵은 쑥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풀이 쑥이요, 며칠만 지나면. 곧 마르는 풀이 쑥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 쑥이기에 사람들은 일부러 삼 년씩이나 묵혀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은 삼 년 된 쑥을 구하기 위해 온 천하를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칠 년이 지나서, 아버지는 병이 나아 일어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거의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를 보고 집을 떠날 때 쑥을 베어 매달아놓고 갔더라면 아버지는 삼 년만 고생했으면 되었을 걸 하고 몹시 후회하였다고 합니다.”<孟子 離婁(이루)편>
그 아들이 3년 묶은 쑥을 찾으러 길을 떠나기 전에 쑥을 베어서 말려 두었다면, 늦어도 3년 후에는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여 7년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길을 떠나서 3년이 되기 전에 3년 묶은 쑥을 찾았다면 더 빨리 낫게 할 수도 있겠지요. 어떤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은 하고, 미리 준비할 것은 준비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할 것은 찾아서 하다보면 우리가 계획한 것을 늦지 않은 때에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올해에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일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봅시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부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부터 찾아서 열심히 행동해 봅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 일이 지금 아쉽고 안타까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은 세례를 함께 받아야 합니다. 희망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서 희망을 만들어 갑시다. 먼저 간 사람들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어 걸어가면서 만든 길을, 우리가 함께 그 길을 이어서 걸어갈 때에 또 그 길을 따라서 우리 자녀들이 걸어갈 희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정호승의 “봄길”이라는 시를 읽으며 묵상하겠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