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4:1~4
1. 시험 받은 예수님
후안 델 플란데스, 시험받는 그리스도, 1500년경, 21x16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다음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다. 광야는 생명이 메마른 땅이다. 광야는 척박하고 사람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은 땅이다.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면서 일부러 그곳으로 가셨다. 고독과 고난과 죽음의 땅 광야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성경은 성령에 이끌려서 가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명이 메마른 곳 광야에서 예수님은 가장 근원적이고 심각한 시험을 받으셨다.
화가는 세 가지 시험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다. 위편 오른쪽에는 마귀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권하는 장면, 왼쪽에는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보여주며 자신을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는 마귀의 모습을 흐릿하게 같이 넣었다. 그래서 시험의 배경을 광야로만 하지 않고, 광야와 세속 사회가 함께 어우러지도록 설정했다. 주검을 향해 모여드는 하늘의 독수리들은 죽음의 광야를 더욱 실감 나게 하며 허공을 맴돌고 있다.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예수님에게 마귀가 다가온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발에는 악마의 상징인 물갈퀴가 있지만, 경건한 수사 복을 입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와 손에는 묵주도 들고 있어서 날마다 기도하는 경건한 신앙인의 외형을 하고 있다. 마귀는 한 손에 커다란 돌을 들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돌을 떡으로 만들면 허기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아주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그래서 거절할 수 없는 시험을 던진다.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먹는 것이다. 음식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아무리 인격이 고매한 사람이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먹는 것은 곧 생존이다.
40일 금식 후 주님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무서운 한계에 직면하셨다. 한계와 절박함은 동시적이다. 생사의 한계에서 가장 절박한 문제를 들고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마침 예수님 주변에는 돌이 널려 있다. 큰 돌, 작은 돌, 여러 가지 돌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떡으로 바꿀 수 있다. 시험은 가까운 데, 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주님은 순간 얼마나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배고픔과 유혹이 만나면 사람의 흔들림은 몇 배로 증가한다.
시험이 엄중한 만큼 예수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호하게 손으로 거절하신다. 시험은 죽음처럼 강했으나 시험을 대면하는 주님은 더욱 강하셨다. 마침내 주님은 시험을 이기셨다. 그래서 메시아로 나설 수 있었다.
2. 시련 앞에서
시험 앞에는 시련이 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치명적인 시험 앞에는 생존의 한계인 40일이나 굶는 고통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 17:1~3)
이스라엘이 광야를 방황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시험하였다.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게 한 하나님께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중대한 죄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사랑을 경험했으면서도 다시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을 모세는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격노한다. 시험 이전에 물이 없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이 있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데도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드는 때도 있지만, 보통은 탐욕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을 만났을 때 생기는 시험이다. 시련이 시험을 부른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울 때 우리는 시험에 든다.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아프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우리는 시험에 든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시험에 든다. 착한 사람이 불행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시험에 빠진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길 수 있는지 울부짖는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잘한 것은 아니라 해도 물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물이 없는 현실은 시험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시험을 만났을 때, 지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시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죄일 수 없다. 그러나 시험에 져서는 안 된다. 시험은 이겨야 한다.
2024년이 힘차게 밝았다. 청룡의 해라나, 푸른 용이 하늘로 솟구치는 해인가 보다. 내 삶에 이런 좋은 기운이 가득 차고 넘쳐서 올해는 정말 만사형통하고 행복하면 좋겠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바람대로 그렇게 될까. 몸은 건강하고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교통사고나 안전사고로부터 위험하지 않을까, 내 직장은 아무 일 없이 괜찮을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집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성장할 수 있을까…. 여러 시험 거리가 산적해 있다.
우리는 그래서 한 해 내내 기도해야 한다. 새해 기도문 제출하지 않아도 좋다. 내 삶이 얼마나 연약한지 절감하면서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되는 거니까. 기도 제목을 제출하라는 것은 한 해 동안 목회자와 함께 기도하자는 취지다. 우리의 삶이 시련을 만나지 않도록, 만난다 해도 시험에 빠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3. 시험을 이기는 길
인생에 시련을 피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그러길 원하지만, 현실에서 시련을 피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시련 없는 삶, 시험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 없는 삶을 갈구하기보다 시련 앞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이겨나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합리적이고 달콤한 시험에 맞닥뜨려 주님이 극복한 방법은 하나님 말씀이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태 4:4/신명기 8:3 재인용)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가는 무서운 시험을 이기는 방법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 물질 중심의 현대 사회에 주님의 이 선언은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성경 속에 우리를 구원할 비밀이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는 말씀을 정말 사랑한다. 읽고 외우고 쓰고 등 여러 가지를 한다.
우리 교회도 2년 전부터 매주 성서 일과를 쓰고 있다. 거의 50명이 매주 성서 일과 쓰기에 참여하고 있으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매주 성서 일과를 쓰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다음 주일 설교 본문을 미리 읽으니 설교 듣기에도 도움이 된다. 올해는 더 많은 성도가 참여하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히브리서 4:12)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진리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신다. 히브리서는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다, 힘이 있다고 했다. 성경이 2~3천 년 전에 기록된 고문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사는 현장에 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따라 살면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참 생명과 행복을 만들어낸다는 고백이다.
목사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목사의 할 일 중 딱 하나만 말하라 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럼 성도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등불이요 구원의 능력이라면 생활의 가장 중심점에 말씀을 놓고 사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주일이 중심점이고 나머지 날들이 주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관심과 생활 리듬과 초점을 온전히 주일에 맞춰야 한다.
설교는 목회자의 교양강좌나 도덕 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이라는 고백으로 들어야 한다. 목사가 곧 하나님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그래서 예언자=목사는 정확하게는 대언자(代言(者)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정치로 치면 대사 같은 역할이다. 대언자나 대사(Ambassador)는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없다. 보낸 이의 뜻을 철저하게 전하는 것이 임무다. 대언자/대사가 보낸 분의 뜻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전하면 일을 그르치고 해임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는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준비하고 전해야 하고, 듣는 이들도 눈앞에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들어야 그때 그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가 어떤 시련을 만나도 시험에 들지 않고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신다.
2024년 올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지 두렵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누구나 뜻하지 않은 시련을 만날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된다.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떠날 수도 있다. 불신과 악의 세력에 내 신앙이 무너질 수도 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이기셨다. 인간에게 정말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시험에 대해 아주 분명하고도 깔끔하게 이기셨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이것이다. 주님은 내가 지금 만난 시험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힘겹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이겼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고 새로운 구원을 창출했다. 말씀으로 치명적인 시험을 이기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시험을 극복할 길을 열어주셨다. 올 한해 어떤 시험을 만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으로 이겨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