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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1-1) - " 출애굽의 기억과 나사렛의 희망 " / 송년주일 / 이병일 목사 >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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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성탄절(1-1) - " 출애굽의 기억과 나사렛의 희망 " / 송년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19-12-25 (수) 16:14 4년전 1616  

본문)  마 2:13~23; 호 11:1~4,8~9; 고전 1:26~31

 

사람들은 모두 고향이 시골이든 도심이든 그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그 기억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의 나에게 은근한 힘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만나지 못할 지라고 그 때 그 친구들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들을 누구나 한두 명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오늘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깊은 샘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망각함으로써 행복해지기도 하고, 기억함으로써 풍요롭기도 합니다. 망각과 기억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오늘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아야 좋은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면 좋은 것은 잊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활동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한 후에,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집단적 경험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 기억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다르다는 것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 전혀 의미 없거나 꾸며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기억이나 경험이 자기의 현재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과 경험은 어떻게든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떠난 후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기억들은 그들의 미래를 꿈꾸게 하는 원천이며 바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희망과 꿈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의미이며, 우리가 이날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에, 페르시아의 점성가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헤롯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이집트로 피신하였습니다. 점성가들이 말없이 돌아간 후에 헤롯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헤롯이 죽고 난 후에 예수님의 가족들은 돌아와서 나사렛에 정착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도하는 마태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단락마다 구약을 인용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집트에서 히브리 민중을 해방시킨 모세의 탄생과 비슷한 상황 속에 설정하기 위해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히브리의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바로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과 어린 아이들을 학살한 헤롯의 만행은 같은 맥락을 이룹니다. 그러나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이방인인데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헤롯은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을 학살하였고, 자기의 아들들과 부인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기 직전에 고관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경기장에 모아놓고 자기가 죽는 순간에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자기가 죽었을 때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울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유대 땅 전역이 슬퍼하며 울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였을 때에 어린 아이들의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헤롯에게 학살당한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피신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혹은 헤롯이 아이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헤롯은 끝까지 추적하여 예수님을 찾아내서 죽였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태어난 마을의 어린 아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준 예수님의 목숨은 이미 베들레헴의 어린 아이들이 대속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떠나고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 유대인들이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공동체험의 바탕인 출애굽(Exodus)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적인 체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을 때 그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느님과, 40년 동안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훈련하던 광야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앞에 새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경험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 출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하여 첫 곡식을 바칠 때에나, 한 해가 지나고 새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릴 때에나, 주변의 부족들에게 억압을 당할 때에나, 언제든지 감사와 회개의 순간에는 출애굽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을 “역사신조”라고 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 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신명기 26:5-10)

 

마태복음의 본문에서는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의 박사들이 돌아간 이후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의 수배령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은 돌아와서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며,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집트이며 나사렛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왜 이집트로 피신했을까요? 당시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주였으므로 헤롯이 의지만 있다면 그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거리도 멀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족은 안전을 위한 피신이라면, 로마나 헤롯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파르티아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이유를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출애굽을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예수님의 가족이 나사렛에 정착을 합니다. 그 때에 헤롯은 죽고 그의 아들인 헤롯 아켈라오스가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켈라오스나 안티파스나 모두 예수님의 가족에게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켈라오스가 두려워서 안티파스의 지배 영역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하면서,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립니다(마가 1:24; 10:47; 요한 18:5,7; 사도 2:22; 3:6).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한 촌읍으로 도시 세포리스에서 남동쪽으로 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세포리스는 과거 헤로데 대왕의 군사 요지 중의 하나로, 그가 죽자 갈릴리의 민중 지도자 헤제키야의 아들 유다가 민중과 더불어 이 도시를 점령하여 봉기의 거점으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 봉기는 곧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 때 세포리스는 초토화되었고 그 주민들은 수백 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반역의 고향으로 점 찍힌 나사렛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고 한(恨) 많은 고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라고 반문 했듯이, 유다로서는 반역이 끊이지 않는 문제의 고장이었습니다. 후에 나사렛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바울까지도 “나사렛 도당의 괴수”로 고발됩니다. “우리가 알아 본 결과 이 자는 몹쓸 전염병 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사도 24:5).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이집트와 나사렛에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이 이스라엘의 해방과 연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것을 읽는 우리들에게 미완성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헌신으로 끊임없이 손짓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자기의 희생으로 수많은 히브리 민중을 살린 어린양으로 죽었다는 모티브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로마 제국과 유대 지배자들에 의해서 핍박당하던 사람들에게 해방(구원)과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출애굽(해방)을 주도하신 야훼 하느님에 대한 기억과 미래의 희망과의 매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 속에서,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혹은 출현 그 자체를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더 아름다운 무등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함께 하신 모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고, 계속해서 노력할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아직 우리는 살아 있고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종류에는 3가지 감사가 있습니다. 첫째는 조건(If)의 감사입니다. 만약 무엇을 해준다면, 또는 들어준다면 감사하겠다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자신의 이익이나 무리들을 위한 이기적인 감사입니다. 둘째는 이유(Because)의 감사입니다. 무엇을 해주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내게 황금 들판을 주고 잘 익은 포도주와 건강과 행복을 주었기 때문에 하는 감사입니다. 이것은 성과의 감사입니다. 자칫 이뤄지지 않으면 자기 자신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기 쉽습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감사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나의 모자람이 있어 현재 있는 것, 주어진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감사입니다. 언젠가는 때가 죄면 복과 은혜와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 가장 존경스러운 감사입니다. 

 

올해 우리는 어떤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감사도 못하고 살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자식들에 대하여 서운한 감정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사랑과 정성으로 키웠는데 무시하거나 심지어 외면할 때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갚기보다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더 열심인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행하면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말씀, 즉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느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9:23-24)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하느님의 긍휼과 공평과 공의에 대한 자랑은 입과 생각으로만 감사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의 삶을 성찰하면서 돌아볼 때에 ‘이제라도’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이제라도’는 새롭게 방향을 바로잡고 다짐하여 훗날에는 온전히 감사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다시 ‘이제라도’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뒤돌아보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 부족한 것이 있어서 후회한다면, ‘이제라도’ 새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는 지금 이 순간을 미래를 향한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 온전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이제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교우들을 향한 사랑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이제라도’를 생각하고 행동하면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올해보다는 더 나은 새해가 다가올 것입니다. 

또한 무등교회에서 함께 하는 각자의 삶이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에서도 해방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누는 기쁨의 경험이 교우들뿐만 아니라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기억처럼, 처음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억처럼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고, 미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등교회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등교회에서 지내는 한 시간 한 시간이, 이 공동체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이 우리 모두와 지역의 주민들에게 구원의 기쁨, 해방의 희망이 되는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열심히 노력합시다. 그렇게 더불어 함께 일할 때에 이 땅에 예수님이 원하셨던 평화를 실현하는 날이 가까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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