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22~35, 출 1:15~2:10, 딤후 1:3~14
오늘은 성탄절 첫째주일이고, 2023년 마지막 주일로써, 성탄의 기쁨과 한해의 은혜와 아쉬움, 그리고 새롭게 한 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공존하는 주일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거룩한 주일에, 자신의 것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 봅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다짐과 소망을 현실로 만들고자 한 해 동안 부단한 노력과 지속적인 기도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적어도 한두 가지 정도의 각오와 소망을 갖고 한 해를 출발했을 것이고,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 되어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떠신가요? 그 다짐과 각오, 혹은 바람과 소망이 이루어졌습니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아쉬움이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족하시든 아쉬워하시든,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걸어오신 여러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서, 옆 교우들께, 격려와 위로와 칭찬을 합시다. “고생하셨습니다. 당신이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입장을 좀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한 해를 출발하면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은 이루어진 것 같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이뤄드렸습니까?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을 나의 바람과 소망으로 삼고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까? 나의 바람과 소망을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으로 삼고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 되게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까?
이 세상에 오직 “나”라는 사람은 한 명일텐데,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 소망과 바람을 위해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텐데, 그것을 사명과 책임으로 알고 기도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기도하며 살았죠?
더불어 생각해 봅니다.
우리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바람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이뤄드렸을가요?
우리나라가 한 해 동안 시대정신으로 삼고 걸어온 길이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에 걸 맞는 것이었을까요?
더 나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지구촌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지구촌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바람이 무엇이었을까요?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이뤄드렸을까요?
지구촌이 한 해 동안 시대정신으로 삼고 걸어온 길이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에 걸 맞는 것이었을까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지금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기후 위기는 더해가고, 갈수록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로 치닫는 우리 사회를 마주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무겁게 들어야 할 때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 중에 있는 우리에게 어떤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과 뜻, 바람과 소망을 전해주려고 하실까요?
먼저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 바람과 소망을 애타게 기다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그에 대해서 누가는 25절과 26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위에 계시더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시므온의 평생 소원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구원자, 메시아를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꺼지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멸망해가는 것을 결코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으신다고 믿을 때에야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늦은 나이까지 무너져가는 세상, 긍휼과 위로가 절실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기도했던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시므온의 기도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시므온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므온이라는 한 사람만의 기도와 삶은 아니겠으나, 시므온의 기도와 삶처럼 동일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의롭고 경건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와 삶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수도 있겠죠.
나는, 우리 교회들은, 이 사회는, 지구촌은 과연 올 한해를, 어떤 기도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 그리고 마음과 뜻을 구하며 살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의롭고 경건한 자의 기도와 삶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고, 삶을 보시고, 바로 그들의 기도와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해 나가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복음서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바람과 소망과 일치되었던 시므온이 있었다면, 구약에는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모세 누이인 미리암과 무명의 모세 엄마, 그리고 애굽 왕의 딸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애굽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히브리 여인이 낳은 남자 아이는 무조건 죽이라는 애굽 왕이 직접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이 두 산파는 히브리 여인 중에, 레위 지파의 여자가 낳은 모세라는 남자 아이를 살려 냅니다.
그러면, 이 산파들은 왜 모세를 살렸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17절)
다시 말하면, 모세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애굽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굽 왕이 통치하는 애굽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바람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영원할 것이고, 영원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십브라와 부아는 참 하나님(신)은 히브리 여인이 낳은 사내 아이든, 왕족이 낳은 사내 아이든, 모든 생명의 존엄을 공평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바람과 소망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자신들의 절대명분이 되어 애굽 왕의 명령을 어겼을 때 그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감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엄마나 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혈육이기에 모세가 살아나기를 더욱더 바랐을 것입니다만, 십브라와 부아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공주라 할지라도 자신의 아버지인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애굽 왕의 통치를 지켜보면서 사리분별하여 아버지의 부당함을 알았을 것이고, 온 세상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참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여러 사람들의 헌신과 결단과 다짐, 어떤 경우에는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세라는 이름의 뜻풀이를 이렇게 합니다.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10절)
놀랍게도 모세는, 훗날 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게 되었고, 자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후에, 히브리인들을 물(홍해)에서 건져냅니다.
피조물을 살려내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 그리고 바람과 소망과 동일한 것을 가졌던 여인들에 의해서 모세는 건져냄(살림,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모세도 피조물을 건져내는 선순환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명을 이어가는 나는, 우리는, 지구촌은 누군가의 헌신과 사랑과 희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지구촌은 마땅히 또 다른 나를, 우리를, 지구촌을 살려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서신서를 봅시다.
바울이 사랑했던 디모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디모데가 있기까지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목회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인 바울이 있었습니다.
결국 디모데는 대대로 흘러온 가문의 믿음이 있었고, 바울의 헌신과 끈기와 사랑과 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디모데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 바람과 소망을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그 어떤 고난을 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거저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나 송년주일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아낌없는 사랑, 절제와 인내와 수고로 우리가 이만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과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올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까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교회들을 향한, 그리고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바람과 소망, 마음과 뜻이 어떻게 실현되기를 바라실까요?
얼마 남지 않은 한 해, 그리고 새롭게 시작될 새로운 한 해,
하나님의 바람은 모든 피조물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믿음을 바로 세우고,
나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어,
내가 건져냄을 받을 기회를 얻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나와 우리, 그리고 교회와 지구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